취미로 시작한 독서토론, 직업이 되기까지

2011. 6. 21. 09:02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독서토론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 없나요? 논제는 어떻게 뽑아야 하고, 진행은 어떤 방식이 좋고. 심각한 얘기 다 빼고, 현장에서 바로 쓸 수 있는 내용이 필요해요. 그런 책을 써주세요!”


00도서관 강의에서 만난 한 교사의 호소였습니다. 4주간 진행된 '독서토론 리더교육'. 이번 주가 마지막 수업이다 보니 고민을 그대로 털어놓으셨나 봅니다. 물론, 처음 듣는 질문은 아니었습니다. 사서, 교사, 학부모로부터 여러 번 들어 온 질문이었습니다. 그때마다 '빨리 써야지, 빨리 써야지' 마음만 바빠지곤 했죠.

그녀의 말처럼 '독서토론의 a, b, c'를 알기 쉽게 써놓은 책은 없습니다. 토론 모형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탁상공론만 난무할 뿐, 정작 필요한 논제 뽑기나 진행법에 대한 정리는 없죠. 늘 생각해왔지만 토론모형이나 대회형식을 익히는 게 우선이 아니라 '말하는 법'부터 배워야 합니다. 기본적인 스피치도 안 되는데, 토론이 가능할까요? 실제로 아무리 책을 재미있게 읽어도 말로 전달하지 못하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이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 집단도 다를 수 없습니다.



▲2010 서울문화재단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사서대상 독서토론 워크숍
(황석영 작가의 『강남몽』을 읽고 토론하는 워크숍 진행)


그러니, 제대로 된 독서토론 책이라면 '말하는 법'부터 얘기해야 합니다. 발음, 발성, 목소리, 제스처, 시선, 경청 등 스피치 기본을 익힌 후 중복하지 않고 간결하게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게 필요합니다. 단답형밖에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구체적으로 말하기' 연습을 해야 하고, 그 다음 독서법이나 논제, 진행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다 갖추어진다 해도, 책이 어려우면 쓸모 없습니다. 무조건 쉽게 써야 합니다. 어린이, 청소년, 성인 연령별 사례가 풍성해야 하고, 그것을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토론에 문외한인 엄마도 아이와 해 볼 수 있는 실제적인 독서 토론법을 담아야 합니다.

회사에서 독서모임을 진행하고 있는데 진전이 없다는 직장인. 스피치를 잘 하고 싶어 독서토론을 시작했다는 대학생. 혼자 하는 독서에서 벗어나고 싶어 도전했다는 주부. 여러 사례가 있었습니다. 가끔, 개인 코칭을 하기도 하는데 논제 4개를 1시간 30분간 코칭한 적도 있죠. 문장의 오류부터 논리의 부족, 문맥의 부자연스러움, 소재 등을 짚다 보면 시간이 부족합니다.



▲ (주)행복한상상에서 사용하는 찬반 표지판. 자유 논제 후 찬반 논제를 다룰 때 활용한다.
독서토론은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는 훈련,
생각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훈련에 큰 도움을 준다.)


정리하자면, 제가 생각하는 좋은 논제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 책의 핵심과 연관성이 높다.
▲ 창의적이다.
▲ 간결하다.
▲ 쉽다.
▲ 발췌가 구체적이다.
▲ 발췌와 질문의 밀도가 높다.
▲ 토의적 논제와 토론적 논제의 구분이 명확하다. (둘 다 이루어지면 좋은 토론이다.)
▲ 입체적이다.
▲ 문장 : 중복이 없다. 구체적이다. 주술호응이 맞고, 문맥이 자연스럽다. 간결하다. 외


이 중 하나를 꼽으라면 '창의성'입니다. 책의 이면을 보게 하는 논제,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논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려주는 논제라면 좋은 논제이죠. 독서토론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읽은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서? 정답을 맞히기 위해서? 아닙니다. 사고를 확장하고, 내가 보지 못한 '면'을 보기 위해서 입니다. 이를 위해 창의적 논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가끔, 비슷한 논제가 ‘우수수’ 쏟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경우 창의성 부족을 실감하곤 합니다. 물론, 창의적인 논제라도 책과 멀어선 안 되며, 책의 주요 맥락을 짚으면서 새로우면 좋습니다.

가끔, 지금 하는 일을 살피다 보면 웃음이 나옵니다. 수년 전, 취미로 시작했던 독서토론. 이젠 일이 됐으니 신기할 따름이죠. 지금 일이 즐겁게 오래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고 무엇보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 오르기도 합니다.

얼마 전 토론현장에서 학년 차를 없애는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웠는데요. 한 책을 읽고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이 토론하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죠. 나이차는 다양한 생각을 불러왔습니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는 눈으로 아이들은 서로를 바라봤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꿈꿔온 현장이었습니다. 초등학생은 중, 고생을 보며 배웠고 중고생은 엉뚱한 초등학생을 보며 반성했는데요. "네, 아니오"로 일관해오던 자신들의 '정답 맞히기' 사고관이 얼마나 경직되었는지 절감하는 것 같았습니다. 독서토론엔 답이 없습니다. 가야 할 길도 없죠. 그저 말하게 하면 됩니다. 좋은 책을 고르고, 좋은 논제를 뽑아 주면 됩니다. 그게 가르치는 사람의 몫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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