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경장 120주년에 되돌아본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

2014. 1. 7. 10:27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올해는 갑오경장이 있은 지 120주년 되는 해라고 합니다. 자주적으로 개혁을 이뤄내지 못하고 결국 식민 통치에 무릎 꿇어야 했던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는데요. <식민지 불온 열전>(역사비평사)이란 책을 보면 그런 치욕을 겪으면서도 비록 대놓고 표현은 못했지만, 조선 사람들은 쉽게 마음 속 깊이까지 쉬이 굴복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출처 - 교보문고]


식민지 조선에서 전국의 수재들이 모였다는, 오늘날 경기고의 전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다녔던 강상규라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1937년 4월22일 그는 일본인 유람객으로 가득 찬 창경원을 둘러보고 이런 일기를 씁니다. “아아, 가련하도다. 무궁화동산이여. 금잔디에 개똥과 말똥만 수북이 쌓여 있다. 이 오물을 누가 청소해 줄 것인가.” 


강상규는 일본인의 정치를 ‘원숭이 정치’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조회 때 황거요배(일왕이 사는 곳을 향하여 절)를 하면서 “신에게 빨리 망하도록 묵도하였다”고 쓰고 있습니다. 일본은 그에게 ‘도적놈’에 불과했습니다. 강상규는 친구들이나 고향 청년들을 의식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가 하면, 조선 독립을 위한 10개년 행동계획을 세워 실천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는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며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 때는 전교 212명 중 5등을 했다고 하네요.


강상규는 결국 일본 경찰에 잡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동안 옥고를 치릅니다. 그 뒤 그는 ‘전향한 모범수’로 평가받기도 합니다. 어떤 면에서 그가 보인 불온한 행동조차 한때 젊은 날의 치기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할 법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은 의미가 없을까요?  책에는 강상규 뿐만 아니라 사랑방에서 일본 욕을 하거나, 학교 칠판에 ‘조선 독립’이라고 썼다가 곤욕을 치른 이름 없는 민초들의 ‘불온’이 소개됩니다. 이런 행동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식민지 일본을 살아낸 사람들은 모두 일제에 협력했으니 전부 친일파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처절하게 싸우는 독립투사가 될 수 없을지언정, 뼛속까지 친일의 논리를 체화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순응하는 듯 보이지만 그 밑에는 불온이 도사리고 있었고, 삶과 지배와 저항은 엉켜 있었습니다. 그것은 강상규의 예에서 보듯, 식민지배가 30년 가까이 지속됐는데도 유지됐습니다.



저자는 비록 좌절되고 가능성으로만 남은 ‘불온’일지라도 ‘미래를 위한 자산’이라고 말한다. 일제강점기에도 “광범위한 ‘불온’의 영역 없이는 항일운동이나 독립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 불온열전의 주인공들은 일제강점기에도 살아남았지만 대체로 해방 이후 살해되거나 실종된다. 분단과 전쟁은 일제도 쓸어내지 못했던 ‘불온’을 제거하는 과정이었다. “불온이 없는 사회에서 독재는 시작”됐다. 그러나 아무리 통제해도 언젠가 불온은 고개를 들고 튀어나온다. 겉으론 평온해 보였던 강상규가 불온을 품고 있었던 것처럼. 김영배는 경찰 조사에서 반성의 뜻을 보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가끔 미친 생각이 뱃속에서 나온다.”


[경향신문 2013-08-02] 저항을 뱃속에 숨긴 ‘불온 선인’들은 독립의 자산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식민지배 논리를 체화하고 동조하고 심지어 선전까지 한 사람들은 이른바 조선 사회의 ‘엘리트’라 불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국권침탈의 원인을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보다는 우리의 실력 부족에서 찾았습니다. 망국의 아픔을 겪더라도 근대화를 이루고 조선이 부강해지면 일본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동양의 국가들이 뭉쳐서 서양에 대항해야 한다는 일본의 침략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일본이든 대한제국이든 누가 지배하는지는 상관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이 훗날 친일파로 변모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해방 후 1948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시작되는 헌법을 토대로 한 우리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다. 현행 헌법까지 계승된 구절이다. 그것은 흔히 생각하듯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한순간 외래에서부터 도입된 것도” 아니었다. 구한말 소개된 민주공화 사상은 독립운동 조직 내에서도 대한제국 복원을 추구했던 복벽주의, 입헌군주제를 꿈꿨던 보황주의 같은 군주제와 끊임없이 투쟁을 벌였고, 수십 년간의 학습과 경험을 통해 임시정부에서 비로소 구현된 것이었다. 저자는 “대한민국의 시작은 한국의 레지스탕스, 그들의 투쟁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말한다.


[경향신문 2013-05-03]일제의 야망과 광기에 맞선 혁명가와 비밀결사단체들



[출처 - 교보문고]


우리는 독립운동이라고 하면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처럼 독립운동가 개인만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신민회와 공립협회의 조직적인 뒷받침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일어났던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나 이완용 암살 미수 사건 등도 그랬습니다. <한국의 레지스탕스>(생각정원)는 신민회를 비롯한 대한광복회, 의열단, 조선공산당 등 7개의 비밀결사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독립 운동사를 들여다봅니다.


신민회는 1900년대에 이미 입헌공화제를 표방했습니다. 지금은 ‘입헌공화제’라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지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왕이 없는 사회’를 꿈꾼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수없이 명멸한 독립 운동가들은 그런 가치가 구현되는 독립 국가를 꿈꾸며 모든 걸 버리고 투쟁의 대열에 뛰어들었습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건국될 수 있었던 건 그런 정신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장 제1조,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거쳐 면면이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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