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공부하는 ‘인문 독서’가 필요한 이유

2014. 4. 11. 16:09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 flickr by VisitBritain Images

 


 

사람들은 중요한 일을 미루는 데 천부적 재능을 갖고 있습니다. 운동이 몸에 좋다는 것은 상식이지만, 사람들은 규칙적인 운동에 시간을 내지 못합니다. 인스턴트 음식이 몸에 안 좋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는 반면, 그런 음식을 끊는 일은 미루게 됩니다. 그들은 내일부터를 외치는데 익숙합니다. 세계적인 자기계발전문가 스티븐코비는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은 일상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죠. 계속 미루다간 우린 늙고 결국 죽는다는 것이 문제가 될 뿐이라는 건데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이들에게 시간은 넉넉하지만, 그걸 아는 순간 우리에게 남겨진 시간은 짧아지고야 맙니다. 삶의 목표는 분명해지고, 가야할 방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는 습관은 의지만 있다면 언제나 실행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책읽는 것을 멀리했던 어제처럼 살고 싶어하죠. 요즘 지하철 풍경은 천편일률입니다. 모두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앉아 있어요. 개성이라곤 조금도 찾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읽는 것보다는 듣고 보는 일을 좋아하고 즐기게 됐습니다. 그러고도 사회 전반적으로 불고 있는 인문학 공부 열풍은 역설적 아닌가요? 온,오프라인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은 인문학 강좌에 몰리고 있습니다.

 

SBS CNBC의 대중 인문강의 `나는 누구인가(WHO AM I)에 등장하는 명사들 면면을 보면, 소설가 베르나르베르베르에서 세계적 철학자 슬라보예지젝까지 대중성과 깊이를 동시에 아우를 정도로 진화했습니다. 구름과 같은 관중이 강연을 듣기 위해 모여들지만, 그 효과는 의문입니다.

 

 

출처: SBS CNBC 방송 화면 캡처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중의 필요성을 간파하지 않았다면, 어떤 방송국도 이처럼 용감한 기획을 진행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실제 생활에선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있지만, 그 안의 욕망은 이미 인문적 깊이를 욕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같은 ‘이벤트성 강좌가 대중의 인문학 공부 열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가’와 이같은 흐름이 ‘인문학 공부에 진정 도움이 되는 길인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손쉬운 지름길을 놔두고 어렵고 힘든 길을 돌아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인문학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르네상스 운동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인간에 관한, 인간을 위한, 인간의 학문’을 주창한 것이 인문학입니다. 14세기 이전 그렇다면 서양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던가요? 로마 제국의 말기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는 AD 313년,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기독교를 공인했고, 그 이후 테오도시우스 1세는 AD 392년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습니다. 이후 서양 세계는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황제를 앞서 종교권력이 서양을 1천년간 지배했던 중세시대로 진입했습니다. 모든 인간은 종교적 규율 안에서 살아야 했고, 규율을 어기면 교황은 `파문'이란 무시무시한 벌을 통해 특정한 인간을 공동체에서 배제시켰습니다. 배제된 인간은 하나같이 신의 가르침이 아닌 `자기 신념'이나 `생각'을 진리로 발설한 경우였죠. 유대 공동체로부터 파문당한 철학자 스피노자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서양의 중세를 소위 `암흑기'로 평가절하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로운 생각과 행동을 종교적 `도그마'로 제한하는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출처_이미지비트

 

오늘날 인문학 공부를 하는 첫째 목적은 어떤 도그마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도그마(dogma)의 본 뜻은 `그리스도교의 교리'를 뜻하는 말이었지만, 오늘날 그것은 ‘독단(獨斷)’으로 풀이되곤 합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은 2007년 학부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한 편의 보고서를 발표했습니다. "하버드 교육의 목적은 리버럴에듀케이션(Liberal Education)을 실시하는데 있다" 고 선언했는데요. 리버럴에듀케이션을 우린 `교양교육'으로 풀이하지만, 실제의 뜻은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와 교육’을 의미합니다. 그러면서 본문에 교양교육의 중요한 목표를 서술하는데 이것은 하버드의 교육 목표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인문학 공부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명문대학의 교육 목표치곤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가요? 하버드뿐만 아니라 미국의 많은대학들이 재학 중 고전 읽기를 필수 과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세인트존스 대학은 4년간 고전 100권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교과과정의 핵심으로 합니다. 강좌 하나를 더 듣게 하는게 아니라 고전 즉, 책 한 권이라도 더 읽혀서 세상으로 내 보내려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미 대학이 취업을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에 충실하며 그 실용성에 치우친 나머지 대학 교육의 진정성이 타락해 버린 것은 비단 한국 대학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세계 대학들은 기업에 예속돼 학문의 목적성을 상실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인문독서를 통해서라도 위기를 벗어나고자 몸부림 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 방법으로 인문학을 공부해 나가야 할까요? 정답은 역시 `인문독서'입니다.  좋은 강연자를 모신 강의는 훌륭한 자극제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지속적인 가르침을 받지 않은 한 모든 인문강좌는 이벤트성 ‘교양 수업’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강의실을 벗어나는 순간부터 그들은 책을 펴드는게 아니라 스마트폰에 고개를 박고 맙니다. 인문학 공부 열풍이 떠들썩 하지만 실효성은 없고 전시효과만 있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 사람들은 일과 생활에 치여 시간을 낼 여유도 없고 책을 잡을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자신의 삶과 자아와 세상에 관해 질문하는 법을 잃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불고 있는 인문학 열풍은 뒤늦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인간의 지극히 본능적인 행동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최고의 처방전은 ‘읽는 습관’을 자신의 삶에 달라붙게 하는 일입니다.

 

인문학 독서의 중요한 본질은 다양성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잡식성 독서'로 나아가는 일이죠. 책읽기를 좋아하는 분야로 시작할 순 있지만, 편식하는 습관은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에도 해롭습니다. 인문독자는 어떤 저자, 어떤 분야, 어떤 책에 관해서도 편견을 가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독서를 시작할 때 분야별로 치우치지 않고 두루두루 읽는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편견이 아닌 건전한 비판은 독서행위의 중요한 미덕이죠.

 

출처_이미지비트

 

작고한 출판 평론가 故 최성일은 "책에 투항하느냐 투항하지 않으냐, 곧 비판적 독서를 하느냐 하지 않느냐가 책읽기의 프로와 아마추어를 결정한다"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도그마를 해체하는 독서가 진짜 인문 독서입니다.

 

인문 독서 후, 우리는 어떻게 변할까요? 인문독자는 지식을 자랑하거나, 작가가 되기 위해 책을 읽는게 아니라 `인간을 알기 위해' 책을 읽을 것입니다. 인문학 공부는 ‘사람 공부’입니다. 나와 타자를 동시에 이해하는 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문 독자, 그들은 편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포용력을 가질 것이며, 윤리적이며 자율적인 인간이자주체적인 사람으로 우뚝 설 것입니다. 세계적인 독서가 알베르토망 구엘은 자신의 저서 <책읽는 사람들>에서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지경으로 변할 때, 누구에게도 인도받지 못한다는 당혹감이 밀려 올 때, 우리는 글이 쓰인 곳에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는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독서를 통해 세계를 읽고 자신을 읽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도그마에 포위된 중세 1천년이 금한 것은 ‘인문독서’였습니다. 깨어난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이기에 르네상스 말기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고 쓴 것입니다. 읽고 쓰는 순간부터 사람은 깨어나며, 자기를 인식하고,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