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6070 대학가 미팅 엿보기

2014. 5. 14. 16:42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언제부터 미팅을 해보셨나요? 최근에는 미팅하는 연령층이 점점 젊어지고 있습니다. 남녀가 만나는 것에는 나이의 국경이 없다고 했던 옛말을 하던 사람들도 점점 다양한 연령층이 미팅하는 것을 보면서 놀라곤 하는데요. 그러면서 과거의 낭만과 순수함이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낭만이 가득했던 1960, 70년대의 대학가 미팅을 만나러 시간 여행을 해봤죠. ‘그땐 그랬지!’라고 외치면서 함께 가볼까요?


출처_네이버 영화 ‘클래식(2003)’ 스틸컷




지금과 달리 1960년대의 대학가에서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부르는 이름이 따로 있었습니다. 자취보다는 기숙사에서 대학 생활을 했던 이들은 4인 1실 규모에서 많이 지냈는데요. 4학년 ‘고문’, 3학년은 ‘실장’, 2학년은 ‘경호 실장’, 그리고 신입생에게 ‘미팅추진위원장’을 맡겼답니다. 그만큼 이성 교제에 대한 열풍이 불기 시작했던 시기죠.


이성 교제가 쉬워져서 요즘 대학생들은 하루 동반자쯤 쉽사리 구할 수 있다는 기사가 나왔지만, 풍기 문란해졌거나 하는 뜻은 아닙니다. 당시 시각에서는 큰 이슈가 되어도 지금 시각으로 보면, 옛날 냄새가 물씬 나는 얘기죠. 말 그대로 밥 먹고, 차 마시고, 손목 한 번 잡는데도 덜덜 떠는 ‘진짜’ 데이트 상대를 만나는 일이었기 때문인데요. 지금처럼 쉽게 이성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만남을 이어가 친구가 되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답니다.

 

출처_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6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 미팅은 무척 활발해졌습니다. ‘4.19 학생혁명 이전세대’와 ‘이후 세대’를 구별하는 방법의 하나로 “미팅을 해봤느냐, 아니냐?”가 얘기될 정도였죠. 당시 대학가 미팅은 주로 ‘티켓 판매 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일단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면, 과대표를 선정할 때 미팅을 잘 주선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으로 뽑죠. 그리고 남녀 각 대학 과대표가 만나서 인원수와 시간, 장소를 협의했습니다. 과대표가 미팅을 연결할 수 없다면, ‘미팅 추진 위원장’을 미팅이 절실한 학생 중에서 임시로 뽑아 대표로 나섰답니다. 대부분 남학생이 여학교로 직접 찾아가 만남을 제의하는 형식이었지만, 가족 중에 누나, 여동생 등 주변 지인의 주선으로 그룹미팅을 추진하기도 했죠.


이렇게 대표가 만나서 인원 등 세부적인 내용이 결정되면, 각 학교에 배정된 숫자만큼 티켓을 팔았습니다. 일종의 참가비였는데요. 티켓을 팔아 모은 돈으로 다방을 잡거나, 야외 나들이 미팅 교통비로 사용되었습니다. 티켓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흰 종이에 번호를 적거나 그림을 그려 같은 번호와 그림을 뽑은 사람이 짝이 되는 의미였답니다. 미팅에 참석할 때까지 아무도 자신의 짝이 누가 될지 모르다가 막상 보고 이내 실망하는 경우가 많았죠. ‘내가 바라본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했어.’라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다시 미팅을 잡는 경우가 많았답니다.

 

출처_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재밌는 것은 66년 한 여대 신입생의 미팅 횟수가 기사로 보도되었는데요. 3월부터 5월 사이 두 달 동안 그 대학 사회생활과는 10회, 자수과가 8회, 정외과와 사학과 각 6회, 영문과 사회사업과 교육과 체육과가 5회씩 미팅을 했다는 내용이었죠. 일주일에 한 번은 보통이고, 사흘에 한 번 꼴로 미팅을 나간 학과가 있는 등 그만큼 모두 미팅에 관심이 높았죠.


이렇게 미팅에 열을 올렸던 이유는 6•25전쟁과 4•19혁명 등 급격한 환경변화를 거친 이후에 안정적인 사회가 되어가면서, 대학생들의 관심이 사회에서 자기를 찾는 과정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어려운 이유 같지만, 그만큼 유교 문화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개방적인 사회의식이 점점 퍼졌다는 얘기와 맥락이 같죠.


당시 대학가의 미팅에 대해서 여학생들은 대부분 미팅 무용론을 얘기했습니다. 대학생의 특권이니 미팅을 해보지만, 막상 나가보면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생각을 하죠. 반면에 남학생은 미팅에서 만날 상대의 과를 알아서 미리 공부할 수도 있고, 안 입던 옷도 입어보면서 자신과 맞는 이성상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60년대 중반부터 분 미팅 바람은 70년대에 들어와서 꽃을 피웁니다. 절정 중의 절정을 맞이하는 시기로 이들의 문화가 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죠. 주로 미팅 장소가 다방을 많이 갔던 때였기 때문에 기존에 있던 명동의 초원다방, 광화문 청자다방 등이 명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도 그 이름을 딴 초원다방과 청자다방이 곳곳에서 생기기도 했죠.


그 밖에도 다양한 미팅 방법이 등장합니다. 고의로 남자의 수를 늘려서 선택받지 못한 한 명만 피 바가지를 쓰게 하는 피보기팅, 날씨 좋은 봄날에 남학생들은 줄 세운 기지 바지를 입고 여학생들은 ‘하이힐’에 미니스커트를 입고 딸기밭에서 미팅하는 딸기밭팅, ‘나체팅’(창경궁 밤 벚꽃놀이 미팅. night cherry-blossom meeting을 줄인 말) 등 그 방법이 점점 다양해지죠.

 

출처_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미팅은 시들해집니다. 대학생 군사훈련을 시작으로 유신, 긴급조치 등 시대 상황이 미팅과 같은 가벼움보다 민주화 시위 등의 무거운 현실 참여를 끌어냈죠. 대표적인 ‘서울의 봄’은 그 시대의 냉혹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2014년이 지금의 대학교에서 미팅은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변했습니다. 단체로 하는 미팅보다는 개별적으로 만나는 소개팅이나 같은 과 캠퍼스 커플이 더 많죠. 그래도 대학생이 되면, 자유롭게 누군가를 만나는 미팅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설렘을 낳죠. 그 설렘만큼 아름다운 사람과 만나 사람을 선물로 받으시길 바랍니다.



참고자료
네이버 캐스트 ‘그 시절 그 이야기’

네이버 ‘이웃사랑’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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