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을 알고 기사 쓰기, 성범죄 보도 피해자 공개는 어디까지?

2014. 5. 26. 11:01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어느 주간지에서 읽은 짤막한 기사의 일부분입니다. 이 기사에서 다룬 것은 지난 2월 법원에서 선고한 ‘유서대필사건’(동료의 유서를 대필하여 자살을 부추겼다는 등의 이유로 징역 3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까지 했던 강기훈 씨 사건을 가리킨다. 재심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의 자살방조 부분 무죄 선고로 강기훈 씨는 누명을 벗는 듯 했으나 아직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검찰의 상고로 이 사건은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의 재심 결과였죠. 기자는 판결 선고 당시의 법정 모습을 비교적 담담히 묘사했습니다.




하지만 기사를 읽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판결로 확인된 언론보도 문제점이 기사가 다시 생각난 것은 역시 최근 법원에서 선고된 세 건의 판결 때문입니다. 3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는 ‘나주 성폭행 사건’ 보도와 관련하여 언론사 세 곳(경향신문, SBS, 채널A)에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위자료 액수, 위법성이 인정된 보도 내용 등 세부적인 사항에서는 언론사별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나주 성폭행 사건 당시 우리 언론보도의 문제점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셈입니다.


나주 성폭행 사건 관련 언론보도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그 해 하반기 내내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성폭력 범죄 관련 우리 언론보도의 문제점에 대해 토의하는 자리를 마련했는데요. 그 결과물 중 하나가 2012년 12월 12일 국가인권위원회와 한국기자협회가 공동으로 제정 • 발표한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기준’입니다.

 

출처_ 기자협회보


이 권고기준에 따르면, “언론은 취재와 보도과정에서 성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의 2차 피해를 유발하지 않도록 피해자의 신상을 식별할 수 있는 정보를 공개하지 '않'아야 하며 성범죄 사건의 본질과 무관한 피해자의 사생활 등을 보도함으로써 피해자에게 범죄 유발의 책임이 있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하지 '않'아야"합니다. 언론계 내부로부터 경향신문의 경우, “향후 성범죄 사건 취재와 보도에서 인권 보호의 호루라기 역할을 할 가이드라인을 제정, 운영하기로” 결정했고, 기존 자료를 참고해 ‘경향신문 성범죄 보도준칙’을 제정하기도 했습니다.


과거 90년대 익명 보도의 원칙을 세운 법원 판결이 우리 언론의 실명 보도 관행에 큰 변화를 가져왔었는데요. 이번 나주 성폭행 사건 보도 관련 판결 또한 우리 언론보도 관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2012년 8월 30일 새벽이었습니다. 가해자는 거실에서 잠자고 있던 피해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 이불째로 피해자를 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공터에서 강간했습니다. 강간 후에는 자신의 범행을 은폐할 목적으로 피해자의 목을 졸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가해자는 피해자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현장을 떠났지만 문자 그대로 ‘구사일생’ 피해자는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이것이 흔히 ‘나주 성폭행 사건’이라고 부르는 일입니다.


사건이 터진 후 기자들 사이에 광풍이 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은 말했습니다. 모든 언론사들이 경쟁적으로 나주 성폭행 사건을 보도했고, 좁은 나주 시내가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기자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 와중에 엉뚱한 사람의 얼굴이 가해자의 얼굴로 일간지 1면에 실리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생겼습니다.


이 나주 성폭행 사건 보도에서는 우선, 범죄가 발생한 원인과 그 책임을 피해자 측에 묻는 것처럼 보이는 보도가 많았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 어머니의 친분을 강조하는 보도가 이루어졌는가 하면 알코올중독인 데다가 경제적으로 무능력하기까지 한 아버지와 게임 중독인 어머니의 무관심과 방치로 인해 범행이 발생했다는 취지의 기사도 이어졌죠. 또, 피해자 관련 보도가 지나치게 상세히 이루어졌습니다.


출처_ 경향신문


피해자의 사진, 그림, 독서록 등이 당사자 동의도 없이 공개됐습니다. 심지어 ‘성폭행 피해 초등생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피해자의 일기장을 찍은 사진과 그 내용이 공개됐습니다. 아마도 평범하면서도 단란했던 피해 아동과 그 가정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범행의 흉악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것이었겠죠.


대부분의 신문과 방송에서 피해자의 집 위치를 특정했으며, 집 외관과 내부도 공개했습니다. 범죄사건을 보도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피해 상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누가 보더라도 이건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또, 많은 기자들이 피해자의 집 안으로 들어가 집 안 모습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결국, 2013년 7월 피해자와 그 가족은 언론사 5곳을 상대로 손해배상 등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 중에서 경향신문, SBS, 채널A에 대한 1심 재판이 끝나 지난 3월 19일 판결이 선고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동안 논의됐던 성폭행 범죄 보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법원 역시 인정했습니다. 이 판결에 대해 채널A는 항소를 제기, 관련 사건은 항소심 계류 중이며. 조선일보와 연합뉴스에 대한 1심 판결은 아직 선고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출처_ Flickr by Tex Texin

 



우리 사회에서 언론보도에 의한 2차 피해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일부에서는 2차 피해를 일으키는 기자들을 범죄자보다 더 ‘잔인하다’까지 비난 합니다. 이러한 말은 우리 사회가 기자에게 요구하는 높은 법적 책임, 도덕적 의무를 감안한 수사적 표현이라 봅니다.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어떤 기자는 하나의 기준으로 이미 확립된 ‘익명 보도의 원칙’에 대해서도 불만을 표출했습니다. 익명 보도 관행으로 인해 기사가 지니는 역사적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반감됐다는 것이죠. 익명 보도나 범죄 보도시 2차 피해의 문제는 모두 직업적 기자로서의 업무방식, 관행 그리고 전통적인 신념과 충돌하는 문제입니다. 따라서 범죄보도에 의한 2차 피해를 막으려면 바로 이러한 전통적인 기사 쓰기 방식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져야 한다고 봅니다. 즉, 발생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최대한 충실히 옮겨야 한다는 생각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판결의 의미를 정리해봤습니다. 언론보도에서 범죄 피해자의 사생활 혹은 사적인 사항을 공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피해자의 일기장, 독서록, 노트, 그림, 사진은 물론이고 부모의 월수입액, 주거지의 위치나 주소, 집 내외부 전경 등을 공개하는 것은 모두 사생활 침해입니다. 특히, 피해자의 상처 부위를 공개하는 것은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되는 사생활 침해라고 할 수 있습니다. SBS에 대한 판결에서 법원은 “원고 △△△의 상처를 촬영한 사진은 사생활 영역 중에서도 가장 보호가치가 큰 비밀 영역에 속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피해자의 끔찍한 상처 부위를 공개한 의도는 범행의 잔혹성을 알리고 어린이 대상 성폭력범죄에 대한 경종을 울리려는 것이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를 촬영한 사진을 보도를 통하여 사회 일반에 공개하는 것은 어떠한 공익적인 목적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까지 했죠. 피해자 관련해서 공개 가능한 사항은 나이, 피해자 집 내부 모습을 단순 도식화한 그림 정도입니다.

 

출처_ Flickr by steakpinball


사건 자체 또는 피해자 관련 사항이 아니어도 언론이 보도할 것은 정말 많지 싶습니다. 범죄에 대한 수사는 적절하게 진행되고 있는지, 범죄가 일어난 사회구조 및 환경적 요인은 없었는지, 피해 회복과 관련된 시스템은 제대로 갖춰졌는지, 하나의 사건에 연관성 있는 여러 부처, 기관 간 협업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등 공적 영역에 대한 감시와 비판을 언론에서 해줘야 합니다. 현장을 누비는 서로 다른 언론사 소속의 그 많은 기자들이 다 비슷한 말만 되풀이하는 것은 정말이지 비효율적이며 식상합니다. 아픔만 더하는 보도는 이제 그만 하고 ‘감시견’이라는 이름에 맞는 정말 필요한 보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알리는 보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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