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많이 읽는 것과 깊게 읽는 것은 어떤 것이 더 좋을까?

2014. 7. 14. 13:57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_ flickr by Moyan Brenn



얼마 전 지인들과의 술자리. 평소에 꽤나 식자연하는 후배 한 녀석이 “요새 애들 진짜 책 안 읽는다”라며 뜬금없는 불씨를 붙였습니다. 여기서 ‘애들’이란, 초등학생부터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을 통칭하는 제유였던 듯합니다. 그러자 동석해 있던 또 다른 후배가 “회사 다니고서부터 소설책 한 권 제대로 읽어본 지가 언제였나 까마득하다”라고 호응을 해주었습니다. 


이야기는 엉뚱하게도 “선배는 한 달에 책 몇 권이나 보세요?”, “그러는 너는 작년에 책 얼마나 봤냐?”, “아무래도 선배보다는 많이 봤을 걸요?” 등등 서로의 독서량을 캐묻는 네거티브 양상으로 틀어졌습니다. 학생들의 독서량에 대한 문제 제기로 점화된 불씨는, 열띤 토론의 장으로 타오르기는커녕 몇몇 놈들의 불같은 성질만 돋우며 ‘취중악담’으로 흘렀고, “자, 자, 닥치고 술이나 마시자”라는 최고 연장자의 진화가 있고 나서야 비로소 소방되었습니다. 물 끼얹힌 모닥불마냥, 그날 밤의 술자리는 어색한 연기만 피우다 허무하게 소진되어버렸습니다. 


침소봉대이기는 했어도 나름 유의미한 발언은 하나 나왔습니다. “책 많이 읽는 게 뭐가 그리 자랑이냐?”라는 한 녀석의 일침. 비록 “너는 입 다물고 안주나 하나 더 시켜”라는 누군가의 윽박질에 조용히 묵살되었지만, 술자리가 파한 이후에도 내내 제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화두로 남았던 것입니다. 



출처_ wikipedia




‘일 년에 책 백 권 읽기’, ‘일주일에 책 한 권씩 읽기’처럼 독서의 양적 측면에 집중한 자기계발 운동이 활발한 요즘입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도 퍽 유행이죠. 개인 블로그나 SNS를 통해 지금까지 읽은 책 목록을 자랑스레 공개하는 독서가들도 종종 보이고요. 심지어 한 권 한 권 독파한 책들에 대한 독후감까지 남기기도 합니다. 이런 ‘북 리뷰’ 포스트를 일주일에 두세 건씩 꾸준히 올리는 블로거들을 보면 무척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압도적인 독서량에 기가 질리기도 합니다. 또한 책 많이 읽은 이들을 ‘지식인’, ‘문화 리더’ 등으로 소개하는 미디어를 접하는 동안에는 스스로 괜히 위축되곤 합니다.


일개 필자인 저의 적은 독서량을 대변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일면 사실이기도 하고요. “책 많이 읽는 게 뭐가 그리 자랑이냐?”라고 일갈했던(그러고 나서 조용히 메뉴판을 펼쳐 안주를 고르던) 녀석의 말은 어쩌면 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과연 독서법에 대한 나의 ‘주장’이 될 수 있는가, 그저 자기합리화에 불과한가?’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흥미로운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 1250년에는 잉글랜드의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도 책을 3권 가진 경우는 비교적 행운에 속했다. 이 소박한 장서 가운데 한 권은 성서였고, 또 한 권은 기도서였고, 또 한 권은 성인의 전기였다. 이 정도의 책값만 해도 웬만한 집 한 채 값에 맞먹을 정도였다. 혹시 우리가 책의 홍수 시대를 맞이하여 안타까워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능과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히 더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권의 책을 여러 번 숙독하는 것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도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그만 간과하고 있다. 즉 우리는 책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책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 


_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중


요컨대 알랭 드 보통은 ‘양’의 독서보다는 ‘질’의 독서 쪽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앞서 재차 언급했던 그 녀석(“책 많이 읽는 게 뭐가 그리 자랑이냐?”)이 만약 이 예시문을 읽었더라면, 좀 더 그럴듯한 논지를 펼쳤을지도 모릅니다.(입 다물고 안주를 시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요.) 


현대의 인쇄술 역사는 14세기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그 이전에는 필경사(筆耕士)라 하여, 종이에 직접 깨알 같은 글자들을 손수 적는 이들에 의해 책이 쓰여 졌죠. 주로 성서와 기도서들이었습니다. 유려한 필기체로 한 자 한 자 새긴 손글씨, 본문 내용을 함축해놓은 채색 삽화가 어우러져 현대식 용어로 ‘레이아웃’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런 정성이 따르다 보니, 책 한 권 값이 집 한 채 값과 비등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알랭 드 보통은 “고통스러운 장인정신은 비록 폭이 좁았지만 깊이는 상당했던 사회의 산물”이며 “한 권 한 권의 책을 비범한 아름다움을 지닌 물건으로 만들고자, 그리하여 그 책의 영적이고 도덕적인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소망했다”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책이 지금처럼 대량 인쇄되는 시스템도 아니거니와, 한두 푼으로 쉽게 소장할 수도 없고, 따라서 책을 많이 접하거나 읽기가 어려웠던 당시 상황에서는 그만큼 책 한 권의 가치가 드높았을 것입니다. 책을 ‘얼마나’ 읽었느냐보다는, ‘어떻게’ 읽었느냐가 관건인 시대였던 것입니다. 『신곡』을 저술한 단테, 『고백록』을 쓴 아우구스티누스 모두 이때 사람들이죠. 


 

출처_ wikipedia




프랑스의 저명한 학자 롤랑 바르트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모든 진지한 독서는 ‘다시 읽는 것’이라고. 양의 독서가 트렌드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요즘, 이 말은 여러 번 곱씹어볼 만합니다. 이른바 ‘권장 도서 목록’을 하나씩 지워가며 완독 권수 늘리기에만 급급해 할 것이 아니라, 한 권이라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거듭 들여다보라는 충언처럼 들리기 때문이죠. 롤랑 바르트의 독서론에 대해 일본의 젊은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노는 이렇게 부연 설명을 합니다.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고 읽는 것”,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것”이라는 부분에 밑줄을 긋고 싶습니다. 독서라는 것이 첫 장을 펼쳐 마지막 장을 덮기까지의 단순 읽기 행위가 아닐진대, 과연 양의 독서만으로 구조 전체를 시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방향을 갖고 탐구하는 단계까지 이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숙고하게 됩니다. 


히라노 게이치노가 권하는 독서법은 일명 ‘슬로 리딩’, 느리게 읽기입니다. 그 실천 과제로서 조사•조동사•의문문에 주의하기, 남에게 설명할 것을 전제로 읽기, 내 처지로 바꿔보기, 창조적으로 오독하기, 다시 읽기 등을 제시하고 있죠. 마치 소의 되새김질과 비슷합니다. 소는 이미 삼킨 음식을 게워 여러 번 씹은 뒤 다시 목으로 넘깁니다. 되새김질은 한자어로 ‘반추(反芻)’라 하는데, 이 단어는 ‘어떤 일을 되풀이하여 음미하거나 생각하다’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책의 되새김질, 책의 반추는 당연히 느리게 읽어야만 가능한 것이죠. 이런 과정을 통해 한 권의 책은 독서가의 뇌리에서 잘 소화되고, 그래서 어쩌면 삶 전체에까지 그 영양분이 고루 스며들 수 있을 것입니다. 


 

출처_ 이미지 비트




양의 독서와 질의 독서를 이야기하다 보니 자연스레 진정한 ‘다독(多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많음’이 모여 ‘읽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읽음’이 쌓이다 보면 시나브로 ‘많음’이 되는 게 아닐까요. ‘다독’이라는 단어에서 독서가가 방점을 찍어야 하는 글자는 ‘다(多)’가 아니라 ‘독(讀)’일 것입니다. 알랭 드 보통이 강조한 책 한 권의 가치, 롤랑 바르트의 다시 읽기, 히라노 게이치노의 슬로 리딩은 모두 진정한 다독의 의미를 환기시켜주죠. 


그리스의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 책 한 권 안 읽어봤으나 인생의 여러 영역에서 자신만의 명쾌한 답을 내릴 줄 알았던 ‘조르바’를 존경했습니다. 조르바는 세상을 읽을 줄 아는 사내였기 때문이죠. 결국 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세상을 좀 더 잘 읽어내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그리하여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남들이 정해놓은 모범답안이 아닌 나만의 답을 정립하기 위해서가 아닐까요. 느리지만 꼭꼭 씹어서 읽는 신중한 독서야말로, 빠름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힐링이자 자기계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독다독, 진정한 ‘다독’을 위한 책 읽기는 오늘도 계속됩니다. 발밤발밤, 느리되 늘어지지 않는 보폭으로 또 한 페이지를 넘겨보는 오늘입니다. 


 

출처_ flickr by Simon Co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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