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거리’에 담긴 숨은 의미는?

2014. 7. 23. 11: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한겨레2014. 2. 17.  


 

요즘에는 책이 너무 많아서 책 귀한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함부로 버려두고 다른 용도로 사용하며 보진 않는 천덕꾸러기 취급합니다. 이리저리 함부로 하니 쉽게 책이 상하게 되는데, 예전 같으면 테이프나 접착제를 이용해서 몇 번이고 보수(?)해서 봤겠지만, 지금은 휙 하고 쓰레기통에 던진 후 똑같은 책을 다시 삽니다.

 

책이 흔해졌으니 책을 읽는 태도도 바뀝니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어서 그 안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했던 과거의 책 읽기는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없고, 한 번 읽고 나면 탁하고 덮어두기 일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책을 읽는 태도를 보면 생각나는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내려온 풍습이 있습니다. 바로 책거리인데요. 책 한 권을 모두 읽거나 배우는 것을 마무리했을 때, 이끌어준 스승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동문수학하던 벗들에게는 음식을 차려 대접하는 풍습을 말합니다. 오늘은 과거에서 지금까지 책거리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책거리는 다른 말로 책씻이’, 혹은 세책례(洗冊禮)’라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우리에게 학교가 아니라 글방이나 서당(書堂)이 교육시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책을 한 권 가지고 있는 것도 귀했던 시기여서 책 한 권을 모두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면, 본인은 물론 부모에게까지 매우 의미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거기에 과거의 책 읽기는 그 책 속의 내용은 훈장(訓長)이 직접 물어보고 써보게 해서 개별적인 문답을 통한 시험 아닌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니 한 권의 책을 공부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특정한 책을 읽거나 써서 그 내용을 모두 배웠다고 공인하는 뜻있고 자랑스러운 순간에 학문을 이끌어준 훈장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동문수학하던 벗들에게도 음식을 대접하면서 기쁨을 나누는 것이 바로 책거리입니다. 지금의 학교처럼 다니기만 하면 학년이 올라가고 새로운 교과서를 받는 것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모두 끝마쳐야 다른 책으로 넘어가는 방식의 교육이 자리했기 때문에 책거리가 더욱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책거리하는 날이면 책거리를 하는 학동의 집에서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서 가져왔습니다. 진수성찬으로 차린 잔칫상이 아니라 소박하지만 서로 나눠 먹을 수 있는 국수, 경단, 송편 등과 같은 정성이 가득 담긴 음식이었습니다. 그중에서 송편을 빠지지 않고 올라왔습니다. 속을 꽉 채운 송편처럼 이번에 익힌 책을 바탕으로 학문도 그렇게 충실하게 이룩하라는 기원을 담고 있습니다.



출처세계일보2005. 6. 10.  




이렇게 의미가 있던 책거리가 언제부터인가 이상한 방향으로 엇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글방과 서당이 없어지고 학교라는 곳에서 모두 같은 교육을 받다 보니 똑같은 교과서에 다음 학년이 되면 새로 나오는 교과서가 의미 있는 책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해 동안만 들고 다니는 책이 되어 버렸죠. 그러다 보니 학년이 끝나면서 책을 찢어서 교실에 뿌리거나 불태우는 등의 잘못된 방향으로 퍼져나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책을 불태우는 행동을 막던 선생님을 학생이 폭행하는 사건도 발생했습니다.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이 되면서 중·고등학교에서는 학기가 끝날 때면 교과서를 모두 거둬서 반납하게 하여 잘못된 책거리가 학생들 사이에서 퍼지지 않도록 조치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학생들 스스로 자신들의 행동이 과격해지고 잘못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 학교에서 자체 캠페인으로 올바른 책거리 문화를 만들도록 노력하기도 했습니다.



출처_ flickr by Hanna Linnea  




책거리는 한때 올바르지 않은 사회현상으로 많은 학부모와 교사의 우려, 그리고 사회적인 관심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문화를 바로 잡으려는 노력 끝에 과거에 내려오던 책거리 풍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에서뿐만 아니라 대학교에서도 학기가 끝나면 종강파티를 하면서 한 학기를 마무리하는 의미의 책거리를 하는 것이 보통의 문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학교에서 책거리를 간단한 다과를 놓고 교사/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먹으면서 한 학기 동안 보냈던 시간에 대해 돌아보는 자리를 심심찮게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제대로 준비해서 차와 전통적인 풍습대로 송편을 준비하는 경우도 있답니다. 또 책을 한 권 떼고 나서가 아니라 방학이 시작하기 전에 의미 있는 자리를 갖기도 하죠. 본래의 의미와는 조금 달라진 모습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책거리 문화가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한겨레2014. 2. 17




요즘 같이 책을 한 권 배운다는 의미가 쉬워진 세상에서 책거리는 소중한 문화를 간직하게 하도록 도와주는 풍습입니다. 가치가 있는 만큼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어가도록 노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앞으로 배움을 이어가는 학교에서도 사회의 학습장에서도 이런 문화가 이어져서 더 소중하게 배우고 가르치는 문화를 확산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문화가 더 풍부해지도록 다독다독에서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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