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쓴 시나리오라서 더 놓칠 수 없었던 영화들

2014. 10. 23. 13: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_ 네이버 영화 <천년학>  



소설은 이야기이고, 소설가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입니다. 영화 역시 이야기입니다. 시나리오 쓰던 사람이 소설을 쓰기도 하고, 소설가가 시나리오를 쓰기도 합니다. 소설이든 시나리오든 결과물의 형태는 다르지만, ‘훌륭한 이야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좋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시나리오도 잘 쓸 수 있고, 멋진 시나리오를 쓰는 사람이라면 무리 없이 소설 한 편을 완성해내기도 하죠. 


<펄프 픽션>과 <킬 빌> 시리즈 등으로 유명한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티노는 각본 작업과 연출을 겸하는 이른바 영화작가로서, 영화 팬들 사이에서는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통합니다. 그는 몇몇 인터뷰를 통해 좀 더 시간이 흐른 뒤에는 본격적으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바람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류는 한때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는데 <도쿄 데카당스>와 <쿄오꼬> 등의 작품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했습니다. 


‘스토리텔링’에 일가견이 있는 소설가들의 영화계 진출은 그리 낯설어 보이지 않습니다. 실제로도 사례가 많지요.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소설가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영화 다섯 편을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영화 속에서 소설가의 흔적을 느껴보실 수 있길 바랍니다. 




  사랑했던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기를 -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이 영화가 개봉한 지 어느덧 십 년이 넘었네요. 예쁜 손예진 씨와 잘생긴 정우성 씨의 조합으로 개봉 즈음에 꽤 화제를 모았었던 기억이 납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는 눈물샘 자극 스토리라인이었습니다. 영화 초반부터 주인공 수진(손예진 분)의 건망증으로 인한 소소한 사건들이 부각되며 묘한 긴장감을 깔아놓는데요. 마치 체크포인트를 따라가듯, 이야기 속 ‘건망증 복선’들은 결국 알츠하이머라는 극적 목적지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소설가 김영하와 이재한 감독이 공동으로 시나리오를 작업했다고 하는데, 두 사람의 이야기는 2004년도《씨네21》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십여 년 전 기억이 아련히 떠오르네요. 


씨네21 기사 읽기 



출처_ 네이버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 



  소설 ‘선학동 나그네’는 영화로 다시 태어나 - 천년학 

 


이청준 선생은 우리나라 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문인입니다. ‘눈길’, ‘당신들의 천국’, ‘병신과 머저리’, ‘소문의 벽’, ‘이어도’, ‘퇴원’, ……. 이청준 선생의 소설은 정규 교과 과정의 문학 수업이나 대학교의 국문과, 문예창작학과 등 전공 강의에서 반드시 다루어집니다. 특히 1979년 계간지《문학과 지성》에 발표한 단편소설 ‘선학동 나그네’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두 편에 영감을 주었는데요. 1993년작 <서편제>와 2007년작 <천년학>입니다. 전작의 시나리오는 연극 연출가이기도 한 주연 배우 김명곤 씨가 원작을 각색했고, 후작에서는 이청준 선생이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천년학>이 개봉하고 일 년이 조금 넘은 2008년 7월에 이청준 선생은 타계했습니다. 소설가들은 한 작품의 마지막 문장을 써내기 전까지 온전히 쉴 수 없는 병 아닌 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쩌면 소설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서도 소설가들은 그런 태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결코 쉴 수 없는. 



출처_ 네이버 영화 <천년학>   



  일상은 무궁무진한 변화 속에 있음을 - 스모크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소설가 폴 오스터는 젊은 시절부터 매우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발표해왔습니다.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뉴욕 3부작>은 탐정 소설의 형식을 취하면서, 우연으로 시작된 사건들이 어떻게 개인의 삶에 유의미하게 작용하는지를 그린 작품입니다. 우연이 필연으로 변해가는 과정이랄까요. 폴 오스터는 일상의 풍경 속에서 미묘한 변화를 감지해내는 재능을 가진 작가 같습니다. 그래서 ‘우연’이라는 요소에 천착하는지도 모르겠네요. 그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 <스모크>도 일상을 관찰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브루클린의 한 담배 상점 주인 오기 렌(하비 카이틀 분)은 13년간 가게 앞 거리 풍경을 카메라로 촬영했습니다. 사천 장이 넘는 사진들은 모두 똑같은 시간과 풍경을 담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궁무진한 변화들이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옷차림과 표정, 날씨 등등이 다 다른 것이죠.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상은 담배 연기처럼 쉽게 사라지고 마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동하는 유기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출처_ El Espectador (좌)  / 네이버 영화 <스모크> (우)  



  당신이 알던 세상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 미스트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이라면 결말의 충격에서 쉽게 헤어나오지 못하셨을 듯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테니 함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쨌든 이 작품은 절망적인 현실을 참 매혹적으로 그려놓았는데요. 스티븐 킹의 동명 원작 소설 역시 그러합니다. 스티븐 킹은 ‘절망’을 묘사하는 솜씨가 빼어난 작가이죠. 시나리오까지 손수 작업했으니 그 완성도야 ‘믿고 보는’ 수준이죠. <미스트>를 연출한 프랭크 다라본트 감독과는 이미 1994년 <쇼생크 탈출>과 1999년 <그린 마일>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습니다. 두 작품 역시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었고, 그가 각본도 썼습니다. 원작자와 영화감독이 합을 잘 맞추는 예가 많지 않은데 이 두 사람은 서로 통하는 구석이 있나 봅니다. 세 영화 모두 훌륭한 작품들이고, 특히 <미스트>는 한밤중에 혼자 방 안에서 몰입하여 감상하기 딱 그만인 영화입니다. 강력 추천! 



출처_ 작가 Josh Mosey 블로그 (좌) / 네이버 영화 <미스트> (우) 



  단 한 번의 선택이 숨통을 조인다! - 카운슬러

 


<핏빛 자오선>, <더 로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쉽게 읽히지 않는 편입니다. ‘편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까요? 그의 소설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추악한 양면성에 대하여 별 것 아니라는 듯 담담하게 이야기하곤 합니다. 문장도 짧고 건조한 편입니다. 마치 소설 전체가 독자에게 “원래 인간은 이런 존재야. 몰랐어? 뭘 그리 놀라고 그래?”라고 되묻는 기분이랄까요. 아무튼 코맥 매카시는 참 싸늘한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쓸 수 있는 작가입니다. 특유의 냉정한 태도가 소설뿐만 아니라 시나리오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카운슬러>는 잡아먹거나 잡아 먹히거나, 이 두 가지 선택밖에 없는 비정한 비즈니스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극단의 비극으로 치닫는 이야기가 영락없이 ‘코맥 매카시표’입니다. 불쾌하고 불편한 진실을 이토록 무심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니. ‘클래스’가 다른 이야기꾼임이 분명합니다. 



출처_ mic.com (좌) / 네이버 영화 <카운슬러> (우) 



깊어가는 가을, 마땅히 볼만한 영화가 없다고 느낀다면, 소설가들이 시나리오 작업한 탄탄한 구성의 영화를 만나보시면 어떨까요? 놀라운 이야기의 전개와 숨어있는 복선들의 연결이 마치 지금까지 본 영화들에 대한 기준을 바꾸게 할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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