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취하고 싶은 ‘북드링커’ 위한 마력적 소설

2015. 2. 9.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_ observationdeck



그는 마신다

책을 펼치고 한 줄 한 줄 눈으로 마셔버린다

그의 머릿속에 불을 당기는 이 뜨겁고 향기로운 말들


책은 그의 몸 속으로 흘러들고

그의 몸은 취기로 부풀어오른다

사방 어디에나 그윽하게

술내음을 풍기며 그를 유혹하는 책이 있다


_ 남진우 시 ‘북드링커’ 일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남진우는 산문집 <올페는 죽을 때 나의 직업은 시라고 하였다> 개정판에서 ‘북드링커’라는 시로 서문을 대신했습니다. 눈으로 책을 마시고, 그렇게 취기가 오른다는 시인의 인식이 인상적입니다. 이 시가 독서가의 어쭙잖은 허세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 (술이 아닌) 무언가에 취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랑하는 애인에게 취하고, 좋아하는 일에 취하고, 아름다운 음악에 취하고, 학우들과의 토론에 취하고, …. 무언가에 취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몸과 마음이 편안한 상태여야겠지요. 기합이 바짝 들어간 상태로는 쉽게 취기가 오르지 않을 테니까요. 애인과 함께 있을 때,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학우들과 토론할 때, 우리의 내면은 시나브로 달뜨며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 되곤 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그(그녀)를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근사한 음악을 들으며 내가 주인공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는 짜릿함! 무언가에 취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주인공’이 되는 것이지요. 자기 삶의 주연 말입니다.


고전을 읽어라, 권장 도서를 읽어라, 요즘 베스트셀러 한두 권쯤은 읽어라, 같은 말들을 듣고 읽는 책이라면 단언컨대 ‘무알코올’일 겁니다. 취할 수 없겠지요. 누군가가 읽으라고 해서, 읽어야만 하니까 읽는 책들은 마력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자신의 감성과 감정에 이끌려 읽게 되는 책이야말로, 순도 100퍼센트의 창의적 알콜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지요. 한 사람이 책을 집어들고 펼치게 되는 일은 실은 대단한 화학작용입니다. 애인과 헤어진 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들국화의 ‘걱정 말아요 그대’를 듣는 것과 같은 과정입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이 노랫말과 멜로디를 통해 한 사람의 내면은 (일시적으로나마) 평온함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설마, ‘교양을 쌓기 위해’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정말 있는 건 아니겠죠? 그렇죠?


문학 작품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마력적 희열이란, 독자 개개인을 ‘취하게’ 만드는 것, 한 사람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만들어준다는 것이 아닐까요. 아르튀르 랭보가 즐겨 마셨다는 압생트(Absinthe)처럼,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몹시 애호했던 모히토(Mojito)처럼, 문학은 ‘취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마셔지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주문을 기다리며 가지런히 진열된 위스키 병처럼 말입니다.


독한 책 한 잔에 기꺼이 취할 준비가 돼 있는 북드링커 여러분. 취기를 한껏 돋우어줄 열 잔의 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영원한 젊음을 열망하던 미청년 도리언 그레이의 열망은 결국 저주로써 성취됩니다. 그의 초상화가 대신 늙어가게 된 것이지요.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며 점점 자기 삶을 파국으로 몰아넣는데…. 무려 ‘탐미주의’ 작가라 불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입니다.



출처_ 교보문고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김영하


프랑스의 소설가 프랑수아즈 사강은 마약 소지 혐의로 재판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김영하의 데뷔작인 이 소설은 타인의 ‘나를 파괴할 권리’를 적극 수용하는 남자의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쉽게 말해, 타인의 자살을 돕는 남자의 이야기이지요. 타인의 자기 파괴를 면밀히 들여다보면서 ‘타인’이라는 주체에 한 발짝 다가가는, 궁극적으로 ‘소통’과 ‘관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출처_ 교보문고 



 <가면의 고백> - 미시마 유키오


“살에까지 파고든 가면, 살집이 달린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하는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의 대표적인 군국주의 문인입니다.(자위대 800여 명 앞에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기도 했지요.) 우람한 상반신을 드러낸 채 일본도를 쥐고 있는 그의 사진은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이런 미시마 유키오가 <가면의 고백>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씀으로써, 즉 가면을 씀으로써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을 고백하는 대목은 대단히 아이로니컬하게 다가옵니다.



출처_ 교보문고 



 <순교자> - 김은국


전쟁은 끔찍한 경험이지요. 아무리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운다 한들, 전쟁은 살인 대 살인의 싸움입니다. 작가는 이런 생지옥 한복판에서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원초적 고뇌에 빠집니다.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당시의 군사적, 정치적 절망을 격정적이지 않게, 오히려 매우 담담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신은 이 전쟁을 내려다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사유하는 대목은 압권입니다.

 


출처_ 교보문고 



 <이방인> - 알베르 카뮈


모친의 장례식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도, 심지어 살인을 저지르고도 시종일관 태연하고 당당한 주인공 뫼르소에게 거부감을 느낄 독자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의 태연함과 당당함을 계속 좇다보면, 이 소설이 던지는 묵직한 물음에 이르게 됩니다. 사회 법규가 외치는 ‘도덕성’이라는 것이 과연, ‘나’로 통칭되는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제대로 가 닿을 수 있는가, 그리고 도덕성이란 공명정대한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있는가, 그 안에서 수많은 ‘나’들은 어떻게 처신하고 보신해야 하는가. 결코 만만한 주제가 아니지요. 깊이 생각하며 여러 번 읽어볼 만한 소설입니다.

 


출처_ 교보문고  



 <봉별기> - 이상


“속아도 꿈결, 속여도 꿈결. 굽이굽이 뜨내기 세상. 그늘진 세상에 불질러버려라.” 이 소설의 유명한 마지막 구절은 이미 노랫말로도 익숙합니다.(가을방학 1집 수록곡 ‘속아도 꿈결’) 폐병 앓던 이상은 요양을 위해 어느 지방에 기거하게 되고, 거기에서 한 기생을 만나 구구절절한 만남과 이별의 역사를 쓴 바 있는데, 그 경험을 <봉별기>에 담아놓았습니다. 자학과 불안과 술독을 빼면 도통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 유약한 지식인의 이야기. 한 줄 한 줄 휘청거리며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상이라는 예술가의 내면 깊숙이 풍덩 빠진 기분이 들지도 모릅니다.



출처_ 인터파크



 <킬리만자로의 눈> - 어니스트 헤밍웨이


미국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자기 조국의 전장도 아닌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들고, 탐험과 수렵을 즐긴 시대의 호남아였습니다. 그런 야성적인 면모를 작품 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요. <킬리만자로의 눈>은, 연인과 함께 아프리카의 한 고원을 등정하던 주인공이 부상으로 인해 꼼짝없이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절망적 상황을 그립니다. 생의 마지막이 임박해오는 순간의 초조함과 분열증적 태도, 그러면서도 우뚝 솟은 킬리만자로 정상의 웅장한 만년설 풍광을 놓치지 않는 강인한 탐험가의 기질, 이런 근사한 장면들이 헤밍웨이 특유의 터프하고 간결한 문체로 묘사됩니다.



출처_ 교보문고 



 <토니 타키타니> - 무라카미 하루키


하루키의 많은 작품들에는 ‘고독’이 짙게 배어 있습니다. 특히 소설집 <렉싱턴의 유령>에 수록된 단편 <토니 타키타니>는 실로 압도적인 고독의 무게를 그리고 있는데요. 동명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습니다. 씨네21 김혜리 기자는 이 영화의 리뷰에서 “단편이지만 <토니 타키타니>는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의 정수를 품고 있다. 필멸하는 존재의 운명, 전 우주를 뒤덮은 고독, 그리고 항상 적정 습도 및 온도를 유지하는 고급 리조트 호텔의 공기와도 같은 문장.”이라고 원작을 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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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 교보문고 



 <학술원에 보내는 보고서> - 프란츠 카프카


보고서를 보내는 주체는 원숭이입니다. 인간에게 포획되어, 인간의 매너와 인간의 이름(‘피터’)과 인간의 영악함을 갖추게 된 짐승이지요. 인간이 된 원숭이라…. 피터의 보고서를 계속 읽다 보면, 괜히 심기가 불편해져 버립니다. 이른바 ‘문명인’이라 자처하는 우리 인간들의 과거, 유인원 시절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지요. 결국 인간의 진화란, 서로가 서로를 구속하고, 길들이고, 억압하면서 이루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시지를 않습니다. 소설 속 피터가, 인간들에 의해 ‘인간’으로 변모했듯 말입니다. 

 


출처_ 교보문고 



 <휴먼 스테인> 필립 로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는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두 사람이 주인공이어야 하고, 그 밖의 타인들과 요소들은 조연이자 배경으로 전략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제언입니다. 한때 명문대 교수였다가 사소한 말실수로 쫓겨난 노년의 남자, 불운한 성장기를 보낸 것으로도 모자라 젊은 나이에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이혼한 여자. 이 둘이 만나 격렬히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사람의 오점(the human stain)’이라는 제목은, 어쩌면 부정의 의미가 아닌 긍정에 가까운 함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점 있는 남녀가 서로 만나, 오점 없는 완전무결한 사랑을 완성해가는 이야기. 이 작품은 안소니 퀸, 니콜 키드먼 주연의 동명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지요.

 


출처_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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