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의심이 밝혀낸 대형마트의 ‘꼼수’

2015. 6. 22.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6월호>에 실린 동아일보 소비자 경제부 기자/ 한우신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기자가 의심하는 문제가 모두 뉴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의심하지 않는 문제는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기사 ‘대형마트 파격 할인의 배신’의 시작은 작은 의심이었습니다. 팀 회의 시간에 누군가 ‘대형마트에서 파는 제품의 가격이 시기별로 어떻게 변했는지’ 알려주는 스마트폰 앱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실제로 이 앱은 우리 기사가 나가고 얼마 후 방송사에서 뉴스로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왜 이런 앱이 생겼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앱이 생긴 건 소비자들이 대형마트의 상품이 예전에는 얼마였는지 궁금해 하는 탓일 터. 과거 가격이 궁금한 건 대형마트들이 ‘현재 판매 가격’이 과거보다 할인된 가격, 지금 안 사면 소비자에게 손해인 가격이라고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확실히 내렸을까?


실제로 대형마트에서는 신문, 전단지, 온라인 광고 등을 통해 ‘반값 할인’ ‘파격 세일’ 등의 문구로 소비자를 유혹합니다. 특히 설날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연중 최저가를 내세우며 홍보에 열을 올립니다. 또한 매장에 가보면 ‘오늘만 이 가격’ ‘7일간 이 가격’ 등의 문구를 써 붙인 상품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회의가 진행되면서 나를 포함한 기자들의 논의는 “대형마트가 내세우는 파격 할인이 과연 정말 파격적인 할인일까”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됐습니다.처음에는 기자들이 직접 나가 가격 조사하는 것을 고려했습니다. 그 상황을 상상하니 애로 사항이 많아 보였습니다. 몸이 힘든 게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조사를 하다보면 티가 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설날 맞이 할인행사를 알리는 대형마트의 광고전단지


대형마트들은 분명 의심을 하게 됩니다. 취재를 방해하거나 보도를 하지 말 것을, 다양한 경로로 요청하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안으로 나온 것이 소비자단체와 공동으로 조사하는 것입니다. 한국소비자연맹에 조사를 제안했습니다. 한국소비자연맹은 소비자 단체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곳입니다. 한국소비자연맹에서는 “소비자의 권익 보호를 위해 의미 있는 조사가 될 것”이라며 수용했습니다.


조사를 논의하던 시기는 2월 초로 설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대형마트들은 앞다퉈 설날 특별 할인을 홍보했습니다. ‘최대 반값’ ‘확실히 내렸습니다’ 등 소비자를 유혹하는 홍보 문구들이 쏟아졌습니다. 기자들과 한국소비자연맹은 대형마트의 설날 반값 할인을 점검해보는 것이 시기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마트별로 총 조사 품목은 30개였습니다. 조사는 설날 전(2월 15일, 16일)과 후(3월 1일), 두 차례로 나눠 이뤄졌습니다. 조사 결과 일부 품목은 전단지 가격과 실제 매장 가격이 달랐습니다. 설날 행사 기간이 모두 끝나고 3월 1일 2차 조사가 이뤄졌습니다. 설날 할인 상품들이 행사가 끝난 후 얼마에 팔리고 있는지 조사한 것입니다. 기사의 핵심이 되는 조사였습니다.


대형마트의 견제


대형마트들이 목요일을 기점으로 할인 상품을 정한다는 것을 알고 3월 4일(수)과 5일(목), 11일(수)과 12일(목) 네 차례에 걸쳐 매장을 찾았습니다. 조사에 나선 사람은 최고야 기자였습니다. 최 기자에 말에 따르면 조사를 시작한 지 10여 분이 지나자 미행이 붙었습니다. 남자 두 명이 최 기자와 4~5m 떨어진 거리에 계속 머물렀습니다.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푸드코트에서 식사를 할 때도 옆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상품 앞에 붙은 가격표시를 좀 유심히 보려고 하면 판매 사원들이 다가와 “무엇을 찾는지” “도와줄 건 없는지”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추측컨대 주부로는 보이지 않는 여자가 대낮에 마트에 와서 가격표를 살피는 모습이 CCTV를 통해 비춰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뭘 하는지 알아보라는 지시가 떨어졌을 거고, 판매 사원들은 “최대한 기분 나쁘지 않게 방해하라”는 요청을 받았을 것입니다.


세 부분으로 나눠 이뤄진 조사 결과는 꽤 충격적이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대형마트들이 너무 잘하고 있으면 어떡하지”란 걱정 아닌 걱정도 했었습니다. 공들여서 조사했는데 “소비자를 속이지도 않고 아주 잘하고 있는 것”으로 나오면 큰 기사로 쓰기는 힘들기 때문입니다. 조사 결과 설날 할인 상품으로 홍보된 30개 상품 중 11개가 설날 할인 행사가 끝나도 가격이 그대로이거나 설날 행사 가격이 오히려 더 비쌌던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설날 때 판매 가격이 할인 가격이 아니었던 셈입니다. ‘파격적인 할인’이라 부를 만한 반값 할인이 이뤄진 상품은 대형마트별로 1, 2개뿐이었습니다. 해당 상품은 대부분 모든 대형마트에서 같은 가격에 할인 판매됐습니다. 대형마트가 아닌 제조회사의 역량으로 할인이 이뤄졌다는 의미입니다. 기준 가격이 없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커피믹스의 경우 구성 개수가 180개, 200개, 220개, 250개 등 다양했는데, 개수가 적은 제품의 절대 가격이 대용량 제품보다 비싼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개수가 많이 들어 있는 커피믹스의 개당 가격이 개수가 적은 커피믹스의 개당 가격보다 비싸기도 했습니다. 많이 사면 할인해 줄 거란 상식과는 다른 결과였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현상이 같은 매장의 같은 판매대에서 발생하는 어이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에서 나아가 무시한다고 볼 수 있는 사례였습니다.


출처_인천일보


평소보다 더 비싼 할인 가격


설날 선물세트도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태가 발견됐습니다. 평소에 팔리는 용량보다 적은 ‘행사용 용량’ 참치캔을 만들어 세트를 구성하는 것이 대표적이었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선물세트용 참치의 용량은 135g으로 평소에 우리가 먹는 용량인 150g보다 작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용량이 작으면 그만큼 세트에는 많은 개수를 넣을 수 있습니다. 선물세트의 가격은 낱개 구성품 가격의 합보다 비싼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기간을 한정해 할인 판매한다고 홍보한 상품들도 허점이 많았습니다. ‘오늘 단 하루’, ‘7일간 이 가격’ 등의 문구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상품 중 상당수는 ‘내일도 이 가격’이었고 ‘7일이 지나도 이 가격’이었습니다. 1차 조사 때는 기간 한정 할인이라고 홍보된 신선·냉동식품 37개 가운데 12개가, 2차 조사 때는 43개 제품 가운데 10개가 할인 기간이 끝난 후에도 가격이 똑같거나 오히려 더 싸진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기사를 통해 이런 문제점들을 지적했습니다. 더불어 대형마트에 납품하는 제조회사를 취재해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선물세트 구성과 가격 결정이 대형마트의 요청으로 이뤄진다는 사실을 기사에 담았습니다. 1년 내내 ‘1+1’ 상품처럼 눈속임 할인이 만연한 현실도 짚었습니다. 대형마트의 눈속임 할인은 대형마트 간 경쟁이 극심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며, 할인 상품은 고객을 ‘일단 매장으로 끌어들이는’ 미끼로 활용한다는 전문가의 분석도 덧

붙였습니다. 미끼로 활용되는 할인 상품이 실제로 매장에는 없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도 꼬집었습니다.


눈속임 할인은 이제 그만


기사가 나간 후 많은 독자이자 소비자들은 “배신감을 느낀다”며 분개했습니다. 그런데 일부는 “원래 그런 거 아니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이면에는 “기업의 마케팅으로서 이해한다”는 생각과 “원래부터 대형마트를 믿지 않았다”는 불신이 섞여 있었습니다. 사실 “원래 그런 거 아니냐”는 시각은 내부에도 존재했습니다. 조사가 이뤄지고 기사가 작성되는 동안 “대형마트들 원래 그런 건데 이게 무슨 기사가 될지”에 대한 회의적인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기사에서 언급된 대형마트들의 행태에 대해 공정거래위원회는 표시광고법에서 규정하는 부당한 광고 중 기만적인 행위에 해당한다고 밝혔습니다. 앞으로 수시로 단속하겠다는 계획도 덧붙였습니다. 법에 저촉되는 행위를 문제 삼는데도, “왜 이렇게 호들갑이냐”는  소리가 나오는 것에 대해 우리는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법이 아닌 관습에 지나치게 익숙한 게 아닌지,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의지를 잃어가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본보의 지적에 대해 대형마트들은 “할인 행사 후 재고가 남으면 추가 할인을 하기도 한다. 어쨌든 할인 가격보다 비싸게 받은 건 아니지 않느냐”고 해명하기도 했습니다. 상품 하나만 국한해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소비자의 신뢰입니다. 평범한 소비자들은 대형마트가 할인을 한다고 하면 1개 살 걸 2개 사고 1만 원 쓸 걸 2만 원 씁니다. 그런데 할인이 실제로는 할인이 아니었다고 하면 소비자는 배신감을 느낄 거고 점점 유통업체들의 어떤 홍보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뢰가 무너지면 유통업체들에게도 좋을 건 없습니다.


사견으로서는, 대형마트들이 업(業)의 본질을 되찾았으면 합니다. 대형마트는 시작 자체가 ‘할인점’이었습니다. 언제 가더라도 상품을 싸게 살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마치 지금만 할인하는 것처럼, 지금 사지 않으면 엄청 손해를 보는 것처럼 홍보를하는건 스스로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소비자를 혼란스럽게 하는 홍보에 쓸 자원을 할인점이란 본질을 닦는 데에 썼으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그런 눈속임 할인은 대형마트에 국한된 얘기는 아닐 것입니다. 언론이 존재해야 하는 중요한 의미가 거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