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와 자기 검열에 주눅 든 우리를 돌아보다

2015. 6. 25.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4월호>에 실린 'SBS 스페셜' 작가/ 신진주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얼마면 돼?” 가진 게 돈밖에 없어 살 수만 있다면 사랑도 돈으로 사고 싶었던 드라마 주인공이 있었습니다. 한때 유행어이기도 했던 그 드라마 대사는 돈조차 없던 가난한 방송작가인 나에게도 슬픔인지 냉소인지 모를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세월이 흘러 “교양밖에 없는 교양작가”라고 스스로를 흔쾌히 규정짓는 자존감이 형성되기까지 ‘부’는 저에게 이룰 수 없는 욕망이고 판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알량한 자존감을 또 한 번 위기에 몰아넣은 녀석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예능감”이라는 괴물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방송은 예능의, 예능을 위한, 예능에 의한 마당이 되어버렸고 교양 프로그램은 서서히 축소되거나 예능의 옷을 걸치고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교양 프로그램에서 방송작가를 새로 영입할 때도 ‘예능감 있는 교양작가’를 원하거나 아예 예능작가와 교양작가를 절반씩 채용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대관절 ‘예능감’이 무엇이길래? 교양작가로 이미 18년이나 살았지만 배울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배워야 하나?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한 고참 예능작가가한마디로 일축했습니다. “예능감은 타고나는 겁니다.”


교양작가와 교양PD의 예능 탐험


그렇다면 나는 타고난 ‘교양감’으로 예능의 바다를 도도히 헤엄쳐보리라, 나름의 역발상으로 마음을 정리할 즈음 운명처럼 한 남자가 솔깃한 제안을 해왔습니다. 세상의 다양한 TV쇼를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보자는 거였습니다. ‘최후의 바다, 태평양’ ‘푸른 눈의 신령’ ‘신의 길, 인간의 길’ 등의 다큐멘터리로 자연과 인간의 정신세계에 관해 깊은 탐구를 해왔던 김종일 PD는 전작으로 보나 과묵한 캐릭터로 보나 예능감과는 거리가 먼, 원단 교양PD입니다. 그런 그가 TV쇼, 그러니까 예능 프로그램에 호기심을 가진 이유는 6개월간의 영국 연수에서 느낀 문화충격 때문인 듯했습니다. 유럽에서 목격한 수많은 TV쇼가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기획도 섭외도 방송도 불가능한 것들로 가득 차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가 던진 질문이 나의 타고난 교양감을 제대로 자극했습니다. “그 나라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우리는 왜 그런 쇼가 불편한 걸까요?” 그들이 이상한 걸까, 우리가 이상한 걸까? 예능감 없는 교양작가와 교양PD의 TV쇼 탐험은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탐험의 시작은 늘 그렇듯, 정해진 제작비와 상관없이 거창하고도 원대했습니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대한민국이라면 불가능했을 TV쇼를 샅샅이 뒤져 찾아내는 저인망식 자료조사가 시작됐습니다. 그중에선 그야말로 기상천외해서 입이 떡 벌어지고 혀를 끌끌 차게 하는 TV쇼들도 많았는데, 몇 가지만 소개한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치안이 불안한 남아메리카에선 대낮에 빈민가의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TV쇼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생중계되는 화면에는 방금 총에 맞아 사망한 피해자의 시신이 그대로 노출되는 등 방송의 폭력성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집트에서 화제가 됐던 몰래 카메라쇼는 테러리스트로 가장한 연기자들이 여행 중이던 연예인을 납치해 복면을 씌우고 허공으로 총을 쏘아대며 테러 상황을 연출하다 공포에 질려 울부짖는 연예인의 복면을 벗긴 뒤 몰래카메라에 속아 넘어간 것을 조롱합니다. 아프리카에선 성매매 여성들이집안일 오디션에 참가해 경쟁을 벌이게 하는데, 우승자에게는 거액의 결혼자금이 상금으로 지급됩니다. 성매매 여성들의 새 출발을 돕는 게 기획 의도라는데, 그 나라에선 성매매 경험이 있더라도 집안일 잘하고 결혼자금만 있으면 정말 새 출발이 가능한 건지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가까운 중국의 TV쇼도 만만치 않습니다. 속옷만 걸친 여성들을 침대에 묶어 놓고 깃털로 간질이는 등의 선정적인 쇼가 공자의 나라에서 버젓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은 충격을 넘어 묘한 슬픔까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렇듯 방대한 자료조사가 끝난 뒤 우리의 행선지는 모두 5개국으로 좁혀졌습니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 레바논과 미국, 그리고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결정에는 대한민국 예능이 왜 연예인들의 가족 리얼리티라는 천편일률적인 소재에만 국한돼 있는지를 까발려보겠다는 교양작가의 소심한 한풀이도 한몫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한때나마 동경해 마지않던 ‘예능감’이란 것도 결국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국적 집단주의라는 한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TV에서 좀 벗으면 어때? 네덜란드


제작진 만장일치로 가장 먼저 촬영이 확정된 나라는 네덜란드였습니다. 데이팅쇼인 ‘이브를 찾는 아담’이 풍차와 튤립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던 네덜란드의 이미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작은 뗏목을 타고 각각 무인도로 향하는 남녀는 섬이 가까워지자 뗏목 위에서 돌연 입고 있던 옷을 벗어 던지고 전라의 상태로 바다에 뛰어듭니다. 섬에 도착한 남녀는 사회적 지위나 가정환경을 짐작할 만한 어떤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채 오직 알몸으로 서로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성기를 포함한 출연자들의 알몸이 모자이크 처리 없이 방송에 그대로 노출되는데, 출연자들은 포르노 배우도 연예인도 아닌 일반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네덜란드 TV에서 이 정도 노출은 12세도 시청 가능한 아주 순박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19금이라는 말이 아예 없는 네덜란드에서 최고 등급인 16세 이상 시청 등급을 받은 TV쇼는 대체 얼마나 선정적인 걸까요?


네덜란드 BNN방송국의 ‘슛 앤 스왈로우’. 한국 방송에서는 도저히 소개될 수 없을 정도로 노출이 심하지만 9년째 인기를 누리는 장수 프로그램입니다.


그런 의문을 풀기 위해 찾아간 BNN방송국의 ‘슛 앤 스왈로우’ 제작 현장. 그곳에서 우리가 목격한 것들 중 80%는 모자이크를 하더라도 한국 방송에 도저히 소개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젊은 여성 진행자가 성매매 체험에 도전하는가 하면(물론 가격을 터무니없이 높게 부르는 방법으로 실제 성매매는 성사되지 않지만 모든 상황은 리얼입니다), 남성 진행자가 마약을 하고 클럽에서 처음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내는 체험을 하거나(역시 모든 상황은 리얼이며 카메라는 호텔방까지 투입됩니다), 두 진행자가 실제 연인의 성관계 장면을 모니터로 지켜보며 서로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조언을 하는 등 제작진이 제공한 자료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당황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야동 취급을 받았을 이 쇼가 네덜란드에선 9년째 인기를 누리는 장수 프로그램이라니 그 배경이 궁금할 수밖에요!


현지의 역사학자와 사회학자의 분석에 따르면 척박한 자연환경과 좁은 영토를 가진 네덜란드는 전통적으로 무역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상인들의 힘이 왕권보다 강력했고, 이런 사회적 배경이 종교개혁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전쟁과 맞물리며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사상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됐다고 합니다. 세계 최초로 동성결혼과 안락사, 대마초와 성매매가 합법화되고, 그 모든 것이 TV에서 공론화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네덜란드 사람들의 생존법칙인 실리주의 덕택이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거리에서 만난 네덜란드 사람들은 젊은이부터 아이를 데리고 나온 중년 부부에 이르기까지 ‘슛 앤 스왈로우’ 같은 쇼가 성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문제에 대해 발전적인 대화의 계기를 마련해 준다며 호평했습니다. 정치풍자 프로그램에서 왕족의 얼굴을 남태평양 원주민의 알몸과 합성한 사진이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되는 나라! 네덜란드가 세계 언론 자유 순위에서 매년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사회 어디에도 금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노르웨이, 레바논, 미국, 일본 예능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