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 공론장과 양극화의 미로에 서다

2015. 6. 26. 14:03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의제설정을 통한 공론장 형성에 기여


최근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는 대통령의 민생‧안전 행보, 유명 작가의 표절 논란, 진보 논객의 데이트 폭력에 관한 이야기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소설가의 표절 문제라든지, 데이트 폭력 이슈는 블로그에 썼던 글이 SNS로 급속히 전파되었죠. 그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 의견을 내놓고 토론을 하는 ‘공론장(公論場)’이 형성되었습니다. 소셜 네트워크로 얽힌 가상공간에서 확산된 여론을, 여론을 주도해 온 매스미디어도 뉴스화 했습니다. 매스미디어가 아니라 사회관계망으로 얽혀 있는 개인들도 SNS를 통해 ‘생각할 거리(what to think about)’를 던져줄 수 있게 된 거죠. 의제설정(agenda-setting)을 통한 공론장(public sphere) 형성에 절대적이었던 매스미디어의 영향력이 예전만 같지는 않습니다.


수평적인 소통 공간? 끼리끼리 모이는 공간?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중요한 가치 중에 하나가 대중이 배제되지 않는 수평적인 의사소통이라면 SNS가 소통의 창구를 ‘민주화(democratizing)’했다는 점에서 기여한 부분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이 발언대로 사용하기 힘들었던 매스미디어에서는 묻힐 법한 이야기가 이미 다뤄졌지만 다시 환기할 필요가 있는 주제들을 거론할 수 있는 ‘형식적 가능성’이 열린 셈이니까요. 그런데 온라인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연결망이나 공유되는 이슈가 아무런 맥락 없이 무작위적으로 일어나는 것일까를 생각해보면 ‘그렇다’고 답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지금은 시들해졌지만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싸이월드’에서 ‘일촌’을 맺었던 사람들 중에 유명인을 제외한다면 나와 생판 모르는 낯선 사람들이 몇이나 되던가요?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조리돌림용’이 아닌 이상 내가 싫어하는 사람을 팔로잉하거나 내가 관심 없는 주제를 공유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요? 대체적으로 나의 관심사를 나눌 수 있는, 나와 유사한 사람들(like-minded people)과 연결되지 않던가요? SNS의 수평적인 의사소통이라는 형식적 가능성 때문에 진보가 보수와, 호모포비아가 동성애 옹호자와, 마초가 페미니스트와 정치적 이슈에 대해, 섹슈얼리티에 관해, 양성 평등에 관해 어떤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중간지대 없는 파편화, 그리고 집단 극화


온라인에서 맺는 관계란 오프라인에서보다 더욱 ‘유유상종’입니다. 끼리끼리 뭉치는 거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나 이슈는 클릭 한 번으로 차단하면 그만이니까요. 예를 들어 ‘여혐(여성 혐오)’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고 가정해보죠. 적어도 이 사람의 삶에서 ‘여혐’은 아주 중요한 초미의 관심사일 겁니다. 그 문제에 대해 ‘자아관여도(ego-involvement)’가 매우 높지요. 따라서 판단도 기준도 명확합니다. 방향도 부정적으로 고정돼 있습니다. 명품이나 해외 프랜차이즈 커피를 들고 다니는 여성들을 거칠게 비난합니다. 이 사람은 어떤 성향의 사람과 SNS로 친구를 맺을까요? 페미니스트와 온라인에서나마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SNS가 온라인의 바벨탑이 될 수도


‘여혐 성향’의 사람들은 자기와 유사한 입장은 동일한 것으로, 조금이라도 다른 입장은 자신과 완전히 반대편으로 인식합니다. 논의의 접점이 될 수 있는 중간지대(grey area) 없이 흑백으로 갈라집니다. 합의와 절충에 도달하기보다는 특정 이슈를 놓고 분열과 ‘파편화(fragmentation)’의 양상으로 치닫게 됩니다. 마치 신이 내린 홍수로 뿔뿔이 흩어졌던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아 뭉치려고 했으나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에 진노한 신이 이들의 공통 언어를 분화시켜서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집단으로 갈라놓았듯이, 연결망이 강화된 SNS에서도 이질적인 사람들의 상호 공존보다는 동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적 응집력이 더 또렷해집니다. 


파편화는 ‘집단 극화(group polarization)’으로 귀결되죠.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의 구심력이 세지는 겁니다. 그럴수록 다른 집단과의 ‘대조 효과’는 더욱 선명해집니다. 그러므로 페미니스트와 손을 잡는 일은 없습니다.



발언하기 두려워하는 소수의 침묵


SNS를 통해 나를 팔로우하는 사람들 중에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을지 모릅니다. 근데 그런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죠. 소수란 얘깁니다. 사람들은 다수로부터의 고립을 두려워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다수의 입장이나 여론과 다를 경우 발언하기를 꺼리게 됩니다. 소수로 낙인찍힌 자들은 배제되니까요. ‘여혐 집단’을 팔로우하는 페미니스트—페미니스트가 여혐 집단을 팔로우할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가 SNS로 얽힌 ‘여혐주의자들’ 속에서 여혐 현상을 비판하는 주장을 펼칠 수 있을까요. 그런 얘기를 했다간 당장 온라인상에서 집단적인 린치를 당할 겁니다. 신상도 털릴지 모르죠. 그렇기 때문에 침묵하는 자들의 입장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하수도로 빨려 들어가는 와류의 물줄기처럼 말입니다. ‘침묵의 나선(spiral of silence)’이란 바로 그런 겁니다. 


상궤에서 벗어난 SNS…선험적인 규정보단 국면 분석


SNS라는 공간 자체가 파편화나 집단 극화라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건 아닙니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만, 이집트나 튀니지의 민주화 바람에 SNS가 기여했다는 주장도 있고 공론화가 필요한 이슈 만들기에 SNS만큼 효과적인 미디어도 드물 겁니다. 그러나 SNS의 방향성이란 게 내재적으로 결정돼 있는 건 아닙니다. ‘가능성의 공간’이란 말은 그 공간이 양가적이거나 모순된 공간이란 뜻입니다. 공론장이 될 수도 있고, 혁명과 집단행동의 진원지가 될 수도 있지만 파편화와 극단주의자들의 결속이 교조적으로 다져지는 집단 극화의 온상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SNS가 무엇이라고 선험적으로 규정하는 게 아닙니다. SNS를 부정의 공간으로, 긍정의 공간으로 만드는 요소들이 무엇인지, 그 계기이나 계기는 어떤 것인지 따져보는 일입니다. SNS의 길은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통상적인 ‘상궤에서 벗어난 길(off the beaten track)’, ‘미결정된 길’인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참고자료>

요하이 벤클러 지음/ 최은창 옮김(2015). <네트워크의 부>. 커뮤니케이션북스.

마크 포스터 지음/ 김승현‧이종숙 옮김(2005).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날기 전에 인터넷을 생각한다>. 이제이북스.

캐스 선스타인 지음/ 이정인 옮김(2011). <우리는 왜 극단에 끌리는가>. 프리뷰.

Cass Sunstein(2007). <Republic 2.0>. Prinston University Press.

Martin Heidegger(2002). <Off the beaten track>. Cambridge University Press.

Em Griffin(2009). <A first look at communication theory>(7th ed.). McGraw-H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