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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가 지속가능했던 이유 - 일간신문 〈조보〉


출처_국립고궁박물관


조선왕조가 500여 년 동안 지속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조선을 어떠한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그 해답이 각기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정치·경제적 측면에서 나름의 여러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조선이 지속가능했던 이유를 문화적 측면 특히 기록 문화에 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실록의 분산 배치 – 인터넷의 원형 ?


아시다시피, 『조선왕조실록』은 국보 제151호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1995년에 지정되었습니다. 실록은 한양의 춘추관, 충주, 전주, 성주에 보관하였으나, 임진왜란 후 자주 소실될 것을 우려해 강화, 봉화, 영변, 평창 등에 보관하였습니다. 현재에는 정족산본, 오대산본, 태백산본 등이 남아 있습니다. 계속되는 전쟁에 왕조실록을 후대에 전승해 주려, 전국 곳곳에 분산 배치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인터넷이 미국 국방성의 서류가 구소련의 공격으로 소실될 것을 우려해 분산 배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발명해 낸 작품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조선왕조실록』의 분산 배치는 아날로그 형태로 된 ‘인터넷의 원형’인 셈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거대한 기록 뿐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 『추안급국안』 등의 방대한 기록이 전해 오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조보〉,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본, 출처_경향신문


〈조보〉의 등장 시기


조선시대 〈조보〉가 언제 처음 나왔는가에 관한 학설은 분분합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중종 3년인 1508년 3월 14일에 처음 등장합니다. “신(성희안)이 또 지난번에 북경(北京)으로부터 요동(遼東)에 도착하여 〈조보〉(朝報)를 보니 논박을 받아 산관(散官, 일정한 직무가 없는 벼슬)으로 된 사람이 많았습니다.”라는 기사에서 나타납니다. 하지만 〈조보〉의 유사형태인 ‘분발(分撥,分發)’ 이라는 단어가 태종 때(1413.12.16.일자 기사)이미 나타났으며, 1432년(세종 13년) 황희 영의정이 쓴 편지에 〈조보〉의 다른 이름인 ‘저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점(김영주, 2008)을 미루어 보아, 적어도 〈조보〉의 유사형태가 조선초기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여 집니다. 일설에 의하면, 태조 이성계가 1392년 즉위하자 예문춘추관에서 사관들이 왕실의 소식(기별)을 필사하여 각 관청에 돌린 것이 기원이라고도 합니다(김영재, 2010).


<조보>의 발행과 통제


〈조보〉의 발행은,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과 같은 승정원에서 하였습니다. 승정원에서는 왕이 내리는 명령이나 신하의 건의 등을 기록하여 이를 기사화하고 매일 아침에 반포하고, 배포하였습니다. 이때 조선의 왕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발행인과 편집국장 역할을 동시에 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특정 기사를 배포하거나 배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게이트키퍼’역할을 해 〈조보〉를 통제하였습니다. 


역시 광해군 !


1609년 4월 5일 광해군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신(객사客使)이 오랫동안 국경에 머무를 모양이니, 우리나라의 비밀스러운 일은 〈조보〉(朝報)에 내지 말고, 또 몰래 내통하는 자를 특별히 엄금하도록 은밀히 선위사(宣慰使: 외국 사신을 영접하던 벼슬) 등에게 지시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1621년 3월 11일 “듣자니 간사한 모리배들이 〈조보〉(朝報)와 정목(政目)을 백금 50, 60량을 받고 왜인에게 팔아넘긴다고 한다. 잠상인(潛商人) 가운데 이러한 무리들을 십분 엄하게 금지하여 번거롭게 누설하지 못하도록 하라고 경상 감사에게 하유하라.” 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1622년 5월 22일 광해군은 “요즈음 명나라 관원들이 도성에 가득한데, 돌아가지 않고 계속 머무르고 있으므로 우리나라의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없다. 더구나 드나드는 역관이 매우 많으니, 〈조보〉(朝報)와 정목(政目: 관직의 해임과 임명을 적은 목록)을 베껴다 사사로이 주는 일이 없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근심해 마지 않는다. 삼사에서 아뢴 내용과 숨겨야 할 일에 대해서는 일체 〈조보〉에 내지 말도록 하라.” 고 명하기도 하여 〈조보〉의 콘텐츠 통제를 하였습니다.


누가 기사를 작성했나?


〈조보〉 기사를 만드는 사람은 현대식 표현을 빌리자면, ‘왕실 출입기자’쯤 됩니다. 이 사람을 조선시대에는 주서(注書)라 불렀습니다. 주서는 왕의 앞자리에 사관과 함께 앉자 왕명이나 지시사항 등을 받아 적고, 이를 승정원에 가지고가 정리하였습니다. 어떤 사항은 확대해서 쓰고, 어떤 기사는 짧게 쓰는 등 소위 어젠다(agenda)를 설정하였습니다. 이때 왕에게 올리는 건의(거조擧條)는 주서보다 높은 승지가 취사선택하였습니다. 이렇게 편집한 것을 매우 흘려 쓴 난초체로 쓰고, 이를 아침마다 게시하였습니다. 이런 역할을 하다 보니, 대신관료들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고의로 탈자를 만들기도 해 수난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주서가 왕의 명령이나 지시사항을 바로바로 받아 적어야하기 때문에 이들에게 필요한 자질은 뛰어난 문장력과 빨리 쓸 수 있는 속필 능력이었습니다. 아침저녁을 중심으로 2교대로 근무를 했고, 격무에 시달리다 보니, 오래 근무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워낙 요직이어서 근무 후에는 지방 수령으로 나아갈 자격이 주어졌습니다. 그래서 주서는 조선시대 촉망받는 엘리트 직이기도 했습니다.(박홍갑 외, 2009)  


기사의 내용


주서에 의해 작성된 〈조보〉의 내용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많이 실린 콘텐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왕의 명령이나 지시사항 - 왕의 동정, 건강상태, 국가행사 등

- 신하들의 상소에 대한 답변(비답) - 인사동정 : 관리의 임면, 면직, 이동, 승진 등

- 왕의 대국민 담화문(윤음) - 왕에게 올리는 각종 보고서, 건의 등 - 자연재해, 역병 등


〈조보〉의 배포


이러한 기사가 궁궐에 게시되면, 각 관청에서 보낸 기별서리(奇別書吏)가 필사해 가지고 해당 관청에 가서 베껴 쓰는 등서(謄書)를 해서 배달부인 기별군사(奇別軍士)에게 줍니다. 그러면 기별군사는 각각의 부서에 배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은퇴한 고관대작 혹은 양반집에도 배달하였습니다. 또한 〈조보〉는 지방에까지 배달되었는데, 5일 혹은 10일치의 기사가 봉투에 넣어져서 배달되었습니다. 배달 경로는 지방에서 파견된 경주인(京主人)이나 중앙과 지방 연락원이었던 경방자(京房子)을 통해서 전달되었습니다(박정규,1982). 또한 공공업무를 수행하러 지방에 내려가는 관리들이 가지고가 지방 수령들에게 전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조보〉의 구독료


지방에서 뿐만 아니라 한양의 각 관청에서는 신문 구독료를 지불했습니다. 형조의 당상관 1인의 〈조보〉구독료는 네 냥이었고, 그 아래 낭관의 구독료는 6명이 네 냥이었습니다. 또한 구독료를 지불하면, 서울에 있는 외국공사관이나 영사관에서 구독해 볼 수 있었습니다(박정규,1982). 그리고 일반 백성들도 신문 값만 지불하면, 〈조보〉를 사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소설 <동패낙송>집에 보면, 주인공 궐녀가 〈조보〉를 사다 본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상평통보, 출처_아시아경제


한글 〈조보〉?


이러한 〈조보〉는 제호가 없었으며, 기사제목 즉 헤드라인이 없었습니다. 다만 각 부분의 첫머리에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사건처리순서에 따라 기사가 기록되는 특징이 있었습니다. 〈조보〉에 사용된 서체는 독특한 흘림 서체로 ‘조보체’, ‘기별체’라 했습니다. 웬 만큼의 학식이 없이는 읽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궁궐에서도 〈조보〉를 한글로 작성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순조 즉위년인 1800년 7월 20일 2번째 기사를 보면 “대왕대비가 〈조보〉나 소장 등을 언서로 등서해 들여오게 하라”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조보〉가 한글로도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읽었나?


〈조보〉의 독자는 대체로 관청의 관리들이 중심이었다고 보여 집니다. 또한 지방의 관리들이 보거나 사대부나 양반들이 보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조보〉의 독자층은 우선적으로 기사를 쓴 ‘조보체’를 읽을 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독자층은 매우 적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비록 소설이기는 해도 <동패낙송>집에는 주인공 궐녀가 북방으로 떠난 남편 우하형을 찾기 위해 틈틈이 〈조보〉를 사서 보던 중 〈조보〉에서 우하형의 이름을 발견하고 찾아 가게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면을 비추어 보면, 비록 일반인이라 하더라도 〈조보〉의 독자가 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인쇄된 〈조보〉


〈조보〉는 한때 인쇄되어 판매되기도 하였습니다. 율곡 이이가 1578년 2월에 쓴 석담일기 하권에 보면, 이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서울에 놀던 사람들이 중국에서 관보를 인쇄한다는 말을 듣고, 이를 본받아 생활 밑천이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의정부에 “조정의 관보를 인행하여 각 관청에 내고, 그 값을 받아 생활의 밑천을 하겠습니다”라는 건의를 했고, 그 허락을 받습니다. 그 후 이들은 사헌부에서도 허락을 얻은 후 활자를 만들어 〈조보〉를 인쇄하여 각 관청과 외방 관청의 서울 주재 사무소와 사대부들에게 판매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두어 달 뒤에 선조가 이를 보고, 화를 내며 말하기를 “ 관보를 간행하는 것은 사적으로 사국(史局)을 설치하는 것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만일 다른 나라에 유전되어 알려 진다면, 나라의 악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라 하였습니다. 그 후 이들은 잡혀가 모진 고문을 받고, 주모자를 추궁 당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주모한자가 없어, 대간이 형을 정지하자고 왕에게 청하였으나, 왕은 이를 거절하고, 이들을 귀양 보냈습니다(국역 대동야승,1982). 뿐만 아니라 정조는 즉위 시(1776년) 신하들과 〈조보〉를 인쇄하는 것에 관해 토론도 하였으나, 신하들이 선조의 예를 들며, 흔쾌히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조보〉가 계속 인쇄되어 판매되었다면,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세계 신문역사가 바뀌었을 것입니다. 


〈조보〉의 기능


이러한 〈조보〉는 1894년 고종 31년에 관보로 바뀌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조선시대 〈조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통해 필사, 배달하고 읽었던 신문입니다. 하지만, 〈조보〉는 조선의 행정부서를 감시하는 기능을 하였을 뿐 아니라, 자연재해 등을 알림으로써 환경감시기능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보전달 기능을 충실히 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이러한 정보전달은 여론 형성에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공론형성에도 기여했습니다. 신하가 〈조보〉의 내용을 가지고 왕과 의견을 주고받는 모습들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또한 〈조보〉는 역사기록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했습니다. 이러한 〈조보〉의 총제적인 기능은 한마디로 ‘조선의 왕조PR’기능을 수행한 것으로, 이는 조선이 500여년 동안이나 지속가능하도록 하는데 일조를 하였다고 보여 집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김영주(2008). “조보에 대한 몇 가지 쟁점”, 『한국언론정보학보』, 통권 43호

김영재(2010). 『조선시대의 언론연구』, 서울:민속원

박정규(1982). 「조선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신문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박홍갑 외(2009). 『승정원일기』, 서울:산처럼

민족문화추진위원회(1982). 『국역 대동야승 4』, 서울:(주)민족문화문고간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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