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자보 – ‘방문(榜文)’

2015. 8. 5.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출처_한겨레


한때 우리나라 대학가에는 대자보 문화가 꽃피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386’세대가 대학을 다니던 1980년대와 90년대가 특히 그러했습니다. 아마도 이때 대학을 다니셨던 분들은 최루탄이 난무하는 교정에서 눈물, 콧물 흘리면서 찢겨진 대자보를 읽었던 기억이 있을 겁니다. 한동안 잊혀진 대자보는 2013년 고려대학교에 붙은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로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일부 대학가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대자보들이 붙기도 하였습니다.


조선시대 방문(榜文)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이런 대자보는 그 기원이 언제인지 모를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방문(榜文)’이라 하였고, 간단히 ‘방(榜)’이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주로 사람이 많이 다니거나 모이는 곳 등에 특정 내용을 써 내걸거나 붙여 두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가장 처음 나타나는 방문(榜文)에 관한 기록은 태조 1권에 있습니다. 역적 기새인첩목아를 잡기 위한 군사작전 중 “새인첩목아가 가서 접(接)하는 각채(各寨 개별 성)에서는 즉시 잡아서 빨리 보고할 것이며, 만약 이를 숨기고 자수(自首)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본보기가 있을 것이다.”라는 방문을 곳곳에 내걸었던 기록이 있습니다. 


출처_『조선왕조실록』


‘현상수배범’잡는 방문


조선시대 방문은 군사작전과 도적을 잡는데 긴요하게 활용되었습니다. 현대식으로 말한다면, ‘현상수배범’벽보 정도 될 것입니다. 세조 5년( 1459년 4월 27일 기사) “저자의 미곡을 겁탈한 도적을 잡는 방문을 내걸다”라는 실록 기사를 보면, 밤에 도적이 저자[市]에 들어가서 사람들이 한데다 쌓아 둔 미곡(米穀)을 겁탈(劫奪)했으므로, 성문(城門)을 닫고 수색하여 잡도록 하고, 방문(榜文)을 내걸기를,


“능히 〈도적을〉 잡도록 고(告)하는 사람이 있어서 양인(良人)이면 3자급을 뛰어 올려서 왕이 직접 관직을 줄 것이고, 천민이면 천민을 면해주고, 면포(綿布)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관에서 60필을 준다. 만약 도적을 잡지 못한다면 책임자(五部管領)를 죄(罪)준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1465년 2월 4일에는 “조정과 민가(中外)의 대소 인민(大小人民)으로 도적(盜賊)을 고발하려는 자는 거처(居處)와 사건의 상황을 갖추 기록하여서, 밀봉(密封)하여 궤(櫃) 속에 넣으면, 사실이면 중한 상(賞)을 받을 것이고, 비록 사실이 아니더라도 또한 죄는 가하지 않을 것이나 만약 원수를 미워하여 무고(誣告)하는 자는 중히 논(論)하겠다.”라는 방문을 내건 사실이  있습니다.


지방에도 내 걸린 방문


방문은 서울 뿐 만 아니라 지방에도 내 걸었던 것으로 파악됩니다. 1787년 정조 11년 2월 11일자 기사를 보면, 방문이 전국 곳곳에 붙어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각성(各省)에 방(榜)을 붙여 찾고 있는데 잡은 자에게는 천금의 상(賞)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왕래할 때에 사찰(寺刹)과 시가(市街)에도 모두 방문(榜文)이 붙어 있었습니다.”(정조실록 23권)


한글로 쓰인 방문


조선시대 방문은 대체로 한문으로 쓰였는데, 백성들에게 알릴 내용은 경우에 따라서 한글로 작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선조 때인 1592년 8월 1일 자 기사를 보면, 선조가 “황해도에 내릴 교서는 이미 지어 왔는데 사인(士人)들은 스스로 알아볼 수 있겠지만 그 나머지 사람들은 아마 알지 못할 것이다. 이 교서는 사인이 있는 곳에 효유(曉諭: 알아듣도록 타이름)하도록 하라. 또 이두(吏讀)를 넣고 지리한 말은 빼어 버려 조정의 방문(榜文)처럼 만들고, 또한 의병장이나 감사 등에게 언문(諺文)으로 번역하게 하여 촌민(村民)들이 모두 알 수 있도록 하는 일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였는가 하면, 8월 19일자 기사에서는 “언서(諺書)로 방문(榜文)을 많이 써서 송언신(宋言愼)에게 보내어 민간을 효유하게 하라. 듣건대 유성룡(柳成龍)이 어떤 중과 함께 북도(北道)에 가서 정탐한다 하니, 또한 언서를 보내어 효유하게 하라.”고 하여, 방문이 한글로도 작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화폐유통을 바로 잡기위한 방문


경제 행위의 질서를 잡는데도 방문이 활용되었습니다. 마땅히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없었던 당시로는 방문을 내걸어 화페 유통을 촉진 하였습니다. 태종 11년 1411년 1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의정부에서 방문을 내 걸고 시장이나 민가에서 화폐 대신 상포를 못 사용하도록 하였습니다.


“저화(楮貨)를 발행한 이후부터 조정과 민가(中外)에서 상포(常布)를 일절 쓰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대소 인민(大小人民)들이 간수한 포(布)를 제용감(濟用監)에 납부하면 저화(楮貨)로 바꿔 준(准給)다는 사실도 이미 방문(榜文)으로 내어 붙였습니다.” 


출처_한국학자료센터 (www.kostma.net)


고관대작의 비리를 고발하는 방문


그런가 하면, 조선시대 탄핵은 문서를 작성하여 소위 언론 3사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을 통해 왕에게 전달하여야 하나, 방문을 통해 탄핵을 주장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1511년 중종 6년에는 “김근사 등을 탄핵하는 방문이 붙다”라는 기사가 있는 것을 보면, 방문이 고위관직을 비방하는 용도로도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광화문에 걸려있던 방문의 내용은 참으로 개인의 비리를 모두 들춰내는 수준입니다. 그 기사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방문(榜文)을 광화문(光化門) 담장에 붙였는데,

“김근사(金謹思)·성운(成雲)·김굉(金硡)·이빈(李蘋)은 오늘날의 사흉(四凶)이다. 근사는 폐주(쫒겨난 임금)의 총애 받은 신하(幸臣)으로서 폐주가 총애하던 기생을 첩으로 삼았으니, 신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운은 눈을 내려 뜨지 않고 조정을 경멸하며, 부정한 재물로 큰 집을 지었다. 김굉은 본래 그 집안에 음란한 기풍이 크게 행했으니, 두 기생을 첩으로 삼고 방종 음란을 마음대로 한다. 이빈은 거상(居喪) 중에 내를 막아 논을 풀었으니, 이것은 온 나라의 중론(衆論)이다.”


유언비어, 와언 등을 단속


1521년 중종 16년에는 민가에 이상한 유언비어가 돌았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조정에서 처녀들을 뽑아간다는 소문이 돈 모양입니다. 이에 중종은 그것이 아니라는 방문을 붙여, 백성 모두가 알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처녀를 뽑아간다는 것은 부실한 말이라는 것으로 즉시 제도(諸道)에 유시하여, 시골 백성들에게 모두 확실히 알게 해야 한다. 또 서울이라 하더라도 여염(閭閻)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다 알 수야 없지 않겠느냐? 그러니 방문(榜文)을 내걸어 유시하도록 하라. (중종실록)


익명 방문(榜文) 금지


조선시대 방문은 익명으로 남을 비방하거나, 허위 사실을 유포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세종은 1421년 12월 8일에 익명 방문을 금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영락 16년 (1418년) 6월 12일 부왕의 교지(敎旨) 속에, ‘간악한 무리들이 사람을 죄에 걸리게 하려고 하여, 남의 죄를 꾸며서 이름도 없이 방문(榜文)을 써서 붙여, 음휼(陰譎)한 대악(大惡)이 되기까지 하니, 처음에 본 사람은 즉시 이를 찢어 없애든지 불에 태워버리고, 비록 부자의 사이라도 말을 전하여 시끄럽게 하지 말며, 또 이를 찢어 없애든지 불에 태우지 않는 자는 요언(妖言)·요서(妖書)의 율(律)로써 크게 징계하여 뒷사람에게 경계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이 법이 근래에 전혀 받들어 시행되지 않는다. 금후로는 익명문서(匿名文書)를 즉시 불에 태우거나 찢어 없애지 않고, 저들 중에서 말을 전한 사람이나, 이를 관사(官司)에 들여보낸 사람에게는 일찍이 내렸던 왕지(王旨)에 의거하여 시행할 것이다.”


방문의 형식


아울러 방문의 형식은 “각사(各司)의 모든 방문(榜文)은 다만 ‘모사(某司) 일(日) 월(月)’이라 쓰고 거기다 도장만 찍을 뿐 서명(署名)은 하지 않은 채 모든 큰 거리에다 붙이는 것이 예(例)입니다.(중종실록 1531년 11월 1일 기사)”라는 기록을 보면, 날짜를 적고 관인을 찍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방문(榜文)에 관한 규례


조선시대 방문이 때론 무질서해 보이기도 합니다. 익명의 방문이 붙기도 하고, 남을 비방하는 방이 내 걸리기도 했습니다. 고종 32년 1895년에는 내무아문에서 각 도에 제반 규례를 발표하였는데, 그 제42조에는 “관청의 방문(榜文)을 벽에 내건 근처에는 사적인 통문(通文)과 사적인 방문(榜文)을 붙이는 것을 허용하지 말 것”이라 하여 방문의 질서를 잡고자 하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연월일과 관인이 찍힌 방문은 한문이나 한글로 작성되어 백성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하였고, 도적, 역적을 잡는 전단지로서의 기능 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언비어와 와언을 단속하는 기능을 하였을 뿐 아니라 백성을 설득하는 기능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대자보는 모두 모바일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육필 대자보도 사진으로 찍혀 SNS를 유영합니다. 대자보의 아우라는 온데간데없습니다. 하지만, 육필로 쓴 대자보는 마치 조선시대 ‘방문(榜文)’과 같은 아날로그 향수를 느끼게 해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