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다워

2015. 11. 12.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뜨거운 밥 앞에 무릎을 꿇고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논을 빌려 벼농사를 지었어요. 초봄 못자리를 시작으로 5월엔 모내기, 6월엔 김매기 일꾼 우렁이를 넣고, 7월 땡볕 아래서 손으로 일일이 김을 맸지요. 모내기, 김매기, 벼 베기 하는 날엔 아이들도 함께해요. 아이들은 제 깜냥껏 어른들 일을 도우며 밥 한 그릇이 제 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자연스럽게 배우지요.

 

기계가 들어갈 자리의 벼를 미리 낫으로 베어놓아요. 남편은 숫돌에 낫을 잘 갈아서 들고 왔어요. 황금빛 들판 끝에 서서 쓱쓱 벼 베는 모습은 정말 보기 좋아요.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익은 벼의 황금빛은 정말 고와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 파란 옷의 나우시카가 걷던 황금빛 벌판처럼 눈부시지요. 일찌감치 논물을 빼낸지라 추수할 땐 논바닥이 적당히 말라 있었어요. 그 많던 우렁이들도 논에 물 뺄 때 다 쓸려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커다란 콤바인이 논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벼를 베면서 지나갑니다. 낟알들을 바로 훑어서 기계 안으로 삼키고 볏짚은 뒤로 뱉어내요. 추수와 탈곡이 동시에 됩니다. 김매기 할 땐 논에 들어가 종일토록 허리 굽혀 일하느라 힘들었는데, 추수는 기계가 금세 해치우니 생각보다 쉬워요. 사람들은 기계가 놓친 벼 포기를 베거나 떨어진 이삭을 줍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낫을 들려주었어요. 오늘은 벼 베고 이삭 줍는 일이 공부거리입니다.


콤바인 안으로 들어간 알곡은 트럭 짐칸에 실린 커다란 자루(1톤백)로 옮겨져 건조장으로 갑니다. 볍씨와 못자리, 논 갈기, 논 쓸기, 모내기, 우렁이, 유기질 비료, 추수비 등등의 비용을 제하고 논 주인에게 도지 2가마 드리고 나니, 함께 농사짓는 세 가구 1년치 먹을 쌀 정도 남네요. 조촐하기 그지없지만, 건강하고 착한 쌀을 손수 길러먹는 기쁨은 수치적 계량을 뛰어넘습니다.

 

묵은쌀이 다 떨어져갈 때, 햅쌀을 또 맞이합니다. 땅도, 벼도, 우렁이도, 햇살도, 비도, 사람도, 모두 고맙습니다.


벼 서너 포대를 정미소에 가져가 현미 백미 두 종류로 찧었어요. 햅쌀밥은 묵은쌀과는 비교가 안 되게 고소하고 찰진 데다 윤기가 흘러요. 우리 가족이 농사지어 거둔 따뜻한 햅쌀밥 한 그릇 앞에 두니, 이 시가 떠오르더군요.

 

우주의 중심은 어디?
식탁 한가운데 오른 밥
천수답에 잠긴 하늘에서 건져 올린 달
어머니 물 항아리에서 건진 별
거울보다 더 환하게, 아프게
눈을 찌르는 무색무취의 빛

고가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와, 밥
앞에 무릎을 꿇네
뜨겁게 서려오는 하얀 김
얼굴 붉어지네
밥이 무거운 법(法)이네 

           - 시 <밥이 법이다> 부분 (김석환) 

 

매일 밥을 먹어왔지만 마치 처음 먹는 밥 같아요. “고가도로를 과속으로 달려와” 이윽고 “밥 앞에 무릎을 꿇”고, 내 안에서 식물성의 기쁨이 발아하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가을걷이 마치니 비로소 겨울 휴가

 

겨울을 앞두고 마음이 바빠요. 얼기 전에 잊지 않고 갈무리해야 할 것들이 많거든요. 바깥 수도 부동전의 물을 빼고, 봄부터 써온 호스는 둘둘 감아 창고 안에 들여놓습니다. 보일러 배관과 지하수 모터가 얼지 않도록 열선을 꽂고, 논에서 거두어 온 볏짚으로 추위에 약한 어린 나무들을 감싸주었어요. 
 

찬바람 드나들던 닭장에 비닐을 쳤어요. 추위에 움츠려 떨던 중병아리들이 활발해졌고, 알을 잘 안 낳던 암탉들도 둥우리를 기웃거리네요.

 

닭장에도 비닐을 쳐주었어요. 어른 닭이야 어지간한 추위는 견딜 수 있지만, 가을에 깨어난 병아리들에겐 추위가 치명적이거든요. 중병아리들끼리 서로 몸을 맞대고 웅크려 떠는 모습이 몹시 짠했는데, 이제 한시름 놓았습니다.


고구마도 다 캤고, 들깨와 서리태와 팥은 비닐집 안에 말렸다가 작대기로 털어서 갈무리했어요. 밭의 고춧대도 서리 내리기 전에 다 뽑았지요. 끝물 풋고추는 소금물 끓여 부어 항아리에 삭히고, 고춧잎은 데쳐서 나물을 무쳤어요.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댄다’는 말이 실감날 만큼 일거리는 산더미인데, 일손은 부족하니 마음이 허둥댑니다. 가을걷이 끝났다고 밭이 완전히 비워지는 건 아니에요. 양파 마늘 심는 철이 지금이거든요. 양파와 마늘은 혹독한 겨울을 밭에서 나고 내년 봄에 알이 굵어집니다.

 

흰 것은 흰 양파, 자주색은 자주 양파 모종이에요. 고구마 캔 빈자리에 유박과 퇴비와 계분과 나뭇재를 섞어 평이랑을 짓고, 양파와 마늘을 심었습니다.

 

양파 마늘밭을 다독여둔 후, 마지막으로 밭에 남은 배추와 무, 알타리와 쪽파를 거둡니다. 무청은 엮어서 헛간에 걸고, 무로는 무말랭이를 만들거나 동치미를 담그지요. 속이 찬 배추 70포기로는 김장을 담가요. 1박 2일로 치러내는 김장 일은 만만치 않아요. 김장까지 다 마치고 나면 비로소 한 해의 일거리가 마감되었다는 안도감에 한숨을 돌립니다.


아, 드디어 휴가예요! 농부의 긴 겨울 휴가. 동굴 속 작은 짐승처럼 칩거하며 목공도 하고 바느질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써야죠. 생각만으로도 설렙니다.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잠결에 늦가을 비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느지막이 일어난 아침,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가 블라인드를 올린 순간, 깜짝 놀랐어요. ‘아! 단풍이 밝네!’ 가을비 촉촉이 내리는 아침, 자작나무, 개화나무, 단풍나무 잎이 등불처럼 환했어요. 순간 머릿속에 불 켜지듯 환히 떠오르는 구절이 있었지요.


“나겹이 아주 밝은 날.”


초등학교 1학년 어느 가을날, 아이가 일기장에 썼던 날씨 표현이에요. ‘낙엽’은 ‘나겹’이라고 틀리게 쓰면서 ‘밝은’은 어찌 그리 정확히 썼나, 신기했던 기억이 나요. 그땐 ‘밝은’ 느낌을 머리로만 이해했는데 오늘 그 밝음을 확연히 보았지 뭐예요. ‘아, 밝구나, 밝아. 정말 밝네...’ 감탄하면서요.

 

가을비에 젖은 단풍이 선명하고 밝아요. 짧은 순간 빛나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눈이 시리게 밝은 단풍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자니, 연이어 한 구절이 또 떠올랐어요.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법륜 스님의 책 <인생 수업>의 부제입니다.

 

 봄에 피는 꽃, 새싹만 예쁠까요? 가을에 잘 물든 단풍도 무척 곱고 예쁩니다. 아무리 꽃이 예뻐도 떨어지면 아무도 주워 가지 않지만, 가을에 잘 물든 단풍은 책 속에 고이 꽂아서 오래 보관합니다. 우리의 인생도 나고 자라고 나이 들어가는데, 잘 물든 단풍처럼 늙어 가면 나이 듦이 결코 서글프지 않습니다. 자연이 변화하듯 편안하게 늙어 가면 그 인생에는 이미 평화로움이 깃들어 있습니다.

 

- 법륜스님, <인생 수업>(휴) 중에서

 

도시에 살 땐 짧은 가을을 슬퍼하고 추운 겨울을 싫어했어요. 하지만 이젠 모든 계절이 다 좋아요. 짧고 눈부신 가을도 좋고, 긴 겨울의 휴식도 좋고, 봄날 새순의 생동감도, 뜨거운 여름의 땀방울도 좋아요. 모든 계절이 완벽하고, 모든 삶의 사이클에 빈 구석이 없어요. 그 흐름 안에서 순연히 나이 들어가는 게 좋아요. 그 어떤 청춘으로도 되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도 지금 잘 물들고 있는 걸까?’
막바지 가을 단풍의 짧고 환한 밝음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