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만나는 야생동물들

2015. 12. 15.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생활백과



눈밭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


“엄마, 어디 가?”

카메라를 메고 나서니 아이가 묻습니다.

“고라니 발자국 찍으러.”

“널린 게 고라니 발자국이지, 뭐.”

시큰둥한 아이의 대꾸를 들으니 슬며시 웃음이 나요. 고라니가 흔하디 흔해 이젠 별 관심거리도 못 되나 봐요.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땐 고라니 엉덩이만 봐도 환호했는데 말이지요.


고라니 발자국이에요. 눈 덮이니 먹을 게 부족한가 봐요. 가을걷이 후 방치해둔 마당 텃밭의 이랑을 넘나든 흔적이 뚜렷합니다.


며칠 전엔 어미 고라니와 함께 먹을 걸 찾아 헤매던 조그만 아기 고라니를 봤어요. 겁 많은 눈망울에 가늘고 긴 다리, 화들짝 놀라 달아나던 예쁜 엉덩이... 눈 속에서 얼마나 배고플까 싶더군요. 농사철엔 콩순이며 고추순을 먹어치우는 골칫거리 고라니지만, 먹을 게 부족한 한겨울에 어린 새끼와 눈 쌓인 산과 밭을 헤매는 걸 보니 그저 안쓰러운 마음만 듭니다. 김장하고 남은 배춧잎이나 슬쩍 놓아둘까 봐요.


원래 울창한 숲이었는데 개발한다고 이렇게 깎아놓았어요. 삶터를 빼앗기고 헤매는 야생동물들의 발자국이 깎아지른 눈비탈에 선명합니다.


포크레인이 깎아놓은 뒷산 눈비탈에 야생동물들의 발자국이 어지러워요. 고라니 발자국이 가장 많고, 일렬로 뜀뛰듯 진행하는 족제비 발자국도 보이고, 너구리 발자국, 고양이 발자국, 아주 작은 설치류의 발자국도 보입니다. 흰 눈 위에 찍힌 크고 작은 발자국들을 가만히 바라보노라면, 발자국 위로 걸음걸이가, 몸짓이, 두리번거리는 눈망울이, 착시처럼 어른거려요. 고라니, 족제비, 너구리, 청설모 들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에요. 백지에 짙은 물감을 칠하는 순간 눈앞에서 화들짝 살아나는 양초 그림처럼, 봄 여름 가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야생동물들의 궤적이 겨울 눈밭 위에선 마법처럼 생생해집니다. 


먹을 것을 찾아 민가 가까이 내려온 고라니예요. 저 선량한 눈매와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야생동물들은 지나간 자리에 발자국 흔적을 남깁니다. 발자국은 금세 사라져요. 배설물도 남깁니다. 배설물도 오래지 않아 사라지죠. 나무 둥치에 남긴 털이나 발톱 자국은 좀 더 오래 갑니다. 하지만 그조차도 머잖아 자연 안으로 흡수돼요. 모두 금세 지워지는 겸손한 흔적이에요. 뒤이어갈 후손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지요. 인간의 흔적도 그 정도만 남기면 참 좋을 텐데 말이지요.


새매에게 쫓기는 작은 새들


"타닥, 탁, 탁!!" 

거실 유리문에 뭔가 부딪치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박새 몇 마리가 유리에 부딪쳤다 바닥에 떨어지고 다시 날아오르며 혼비백산이에요. 거의 동시에 휘익-! 데크까지 날아든 커다란 맹금류! 새매였어요. 박새들은 혼이 빠져 필사적으로 달아났고, 먹잇감을 놓친 새매는 데크 난간 위에 잠깐 앉아 좌우를 매섭게 살피더니 날아왔을 때처럼 휘익-!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습니다. 길어야 4~5초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지요. 맞은편 숲 위를 유유히 선회 비행하는 새매를 이즈음 몇 차례 보긴 했지만, 집 데크 앞까지 사냥감을 쫓아 내려올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렇게 가까이서 새매를 본 건 처음이었어요. 가슴 서늘하도록 매섭고 아름다웠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그날도 거실에 앉아 있는데 "타닥, 탁!!" 작은 새들이 거실 유리문으로 날아들 듯 부딪쳐 떨어졌습니다.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키는 순간, 데크를 향해 급강하하던 새매가 코앞에서 휙! 방향을 틀어 옆으로 날아갔어요. 움직이는 사람 실루엣에 놀란 것 같아요. 새매가 스쳐 날아간 자리엔 충격으로 넋이 나간 작은 새 두 마리가 꼼짝도 못한 채 엎드려 있었습니다.


저쪽 발판 위엔 노랑턱멧새 수컷이, 이쪽엔 암컷이 떨어져 있습니다. 새들이 허공으로 착각할까봐 유리문에 격자를 넣었는데도 이런 일이 생기네요. 요즘엔 건물 유리창에 맹금류 그림자를 모방한 ‘버드세이버’ 스티커를 붙여 새들의 충돌을 방지하기도 한대요.


떨어진 새들은 멧새였어요. 노랑턱멧새 암컷과 수컷. 우리집 앞뜰에서 포르릉 포르릉 낮게 날며 풀씨를 먹던 녀석들이지요. 흔한 텃새이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에요. 우리집 데크에 종종 찾아오는 곤줄박이나 박새와는 달리, 멧새나 솔새, 붉은머리오목눈이 등은 좀체 사람 가까이 오지 않거든요. 그토록 낯가림 심한 녀석들이 앞뒤 안 가리고 집으로 돌진했으니, 매에 쫓기던 순간이 얼마나 긴박하고 다급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왼쪽이 노랑턱멧새 수컷, 오른쪽이 암컷입니다. 노랑턱멧새는 머리 위에 예쁘게 솟은 댕기깃이 매력적인데, 이 녀석들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그 댕기깃이 쑥 들어가 버렸네요.


작은 몸뚱이가 유리문에 부딪쳤을 때 받았을 충격은 상상 이상일 듯해요. 눈만 떴지 몸은 움직일 수는 없는 '얼음땡' 상태로 꼼짝을 못하네요. 걱정이 되었지만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30분쯤 지나자 암컷 멧새가 먼저 몸을 추스렸어요. 앉았던 자리에다 똥을 찍- 싸더니 휭 하니 날아가더군요. 수컷은 정신을 수습하는 데 더 오래 걸렸어요. 무려 1시간이나요. 마침내 오그렸던 발가락을 펴고 자세를 바로잡더니 앉았던 자리에 똥을 찍! 싸고는 허둥지둥 날아갔습니다. 둘 다 무사히 살아서 날아가는 모습을 보니 참 기뻤어요. 남겨진 새똥 두 점조차 사랑스럽더군요. 근데... 날아가기 전에 똥은 왜 싸는 걸까요? 


겨울 새들과 친구가 되다


겨울은 야생동물을 만나기 좋은 계절이에요. 무성한 나무숲에 가려 눈에 띄지 않던 동물들도 흰 눈이 쌓이면 발견하기 쉽고, 또 배고픈 야생동물들이 사람 사는 집 가까이 내려오는 일도 잦아지기 때문이지요. 


새들 가운데 특히 곤줄박이는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적은 편이에요. 사람 사는 집 유리창을 기웃대며 안을 들여다보거나 부리로 유리를 톡톡 건드리기도 할 만큼 호기심이 많아요. 땅콩 같은 먹을거리를 창가에 놓아두면 겨우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와 환한 기쁨을 안겨주는 예쁜 새죠. 아침마다 유리창 앞에 와서 “재재재재--” 배고프니 빨리 땅콩 내놓으라고 재촉할 때 보면 어찌나 당당한지, 밀린 빚 받으러 온 빚쟁이 같다니까요. 하하.


흰 눈 위에 새의 날개 자국이 찍혔어요! 가벼운 착지의 흔적이군요. 오른쪽의 귀여운 새 발자국에선 작은 새가 두 발로 통통통 뛰어오는 모습이 보이는 듯해요.


“재재재재--”

곤줄박이가 어김없이 아침을 먹으러 왔어요.

"우리 곤이 왔어? 오냐오냐, 알았다~" 

이번엔 유리창 앞에 땅콩을 뿌려주는 대신, 땅콩을 얹은 내 손을 가만히 내밀어 봅니다. 새는 고개를 갸웃갸웃 하며 망설이고 또 망설이는 눈치예요. 내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합니다. 조심스럽게 손끝 가까이 날아왔다가 포르릉 뒤돌아가길 두어 번, 그러더니 이내 날아와 사뿐히 손끝에 앉았어요! 아, 작은 발톱으로 손가락을 꼭 그러쥘 때의 그 앙증맞은 감촉이라니! 


어느덧 친해진 곤줄박이가 내 손끝에 앉았습니다. 따뜻하게 눈을 맞추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를 여유까지 주네요.


그렇게 우린 친구가 되었습니다. 곤줄박이는 땅콩을 물고 감나무 가지 위로 날아가서, 발톱으로 땅콩을 꼭 그러쥐고 부리로 콕콕 쪼아 먹습니다. 다 먹고 나면 다시 포르릉 날아와 내 손끝에 앉지요. 다시 그윽하게 눈맞춤을 나누고 작은 땅콩조각을 덥석 물더니만 ‘앗, 실수!’ 얼른 뱉어버리고는 그중 가장 큰 땅콩을 물고 휘익- 날아갑니다. 하하... 영리한 녀석!


겨울을 견디는 마음


사실 겨울은 야생동물들에게 혹독한 계절이에요. 그 중에서도 그토록 작은 새들이 영하의 추위 속에서 생존을 유지하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해요. <동물들의 겨울나기>는 버몬트 대학 생물학과 교수인 저자가 메인 주의 통나무집에 살면서 동물들의 겨울 생존법에 대해 관찰하고 기록한 책이에요. 우리나라의 자연환경과는 좀 다르고 서식하는 동물 종류에도 차이가 있지만, 스스로 체온을 10도 이상 낮추고, 무리를 불러 모아 몸을 맞대고, 동면에 가까운 휴면 상태로 들어가 영하 20~30도의 혹독한 추위를 견디는 작은 새들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내 주변의 새들이 새삼 대단해 보이더군요. 


상모솔새는 자신의 생존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모른다. 짐작컨대 이들은 자신의 운명을 성찰할 수 없고 실수를 후회할 수도 없으며, 부당함이나 잃어버린 기회를 놓고 애를 태울 수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미래에 대해, 또는 삶과 죽음에 대해 걱정하지 않는다. (...) 이 겨울 세계는 눈보라며 영하의 밤, 바람, 부족한 먹이까지 모든 것이 운에 좌우되는 곳이다. 중요한 것은 아마 꺾이지 않는 열정과 거침없는 추진력일 것이다. 

- 베른트 하인리히, <동물들의 겨울나기>(에코리브르) 중에서


봄이 되자, 우체통 안에 박새 부부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당분간 우편물은 다른 바구니에 받기로 했는데, 어쩌다 우체부의 실수로 우체통이 열려버렸어요. 인기척을 느낀 아기새들이 어미새가 온 줄 알고 앞다퉈 입을 쩍쩍 벌렸습니다.


봄 여름 가을 동안 내가 만났던 멧새, 박새, 딱새, 곤줄박이들도 이 긴 겨울을 필사적으로 견딘 끝에 더러는 죽고 더러는 살아 내년 봄을 맞이하겠지요. 따뜻한 봄날, 산과 들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이끼와 깃털로 지은 따뜻한 새 둥지, 그 둥지에서 깨어난 어린 아기새들의 파득거리는 몸짓들... 이 모든 것들도 모진 겨울을 통과해서야 만날 수 있는 봄의 풍경이겠고요. 삶과 죽음을 걱정하지 않고, 미래를 예단하지 않고, 혹한과 눈보라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열정... 연약하나 강인한 작은 새들을 생각하면, 사람으로서 견뎌야 하는 겨울의 무게도 담담하게 짊어질 용기가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