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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비극 알리며 탐사보도의 전설이 되다



이재경,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



[요약] 베트남전 ‘미라이 학살’을 고발한 세이모어 허시. 작은 통신사를 통해 극히 일부 신문에만 기사가 나갔지만, 1보가 나간 뒤에는 세상이 바뀌었다. 1주일 뒤, 두 번째 기사가 나갈 땐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모든 주요 매체가 허시의 기사를 원했다. 그는 이 기사로 탐사 기자의 전설이 되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10년 차 프리랜서 기자이던 세이모어 허시는 1969년 11월 12일 조지아주 포트베닝 미 육군 기지에서 베트남 전쟁의 방향을 바꾸는 첫 기사를 송고한다. 제목은 ‘육군 중위 109명 민간인 살해 혐의로 기소’였다. ‘미라이(My Lai) 학살’로 알려진 사건을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기사였다.


“윌리엄 캘리 2세는 26세로 ‘러스티’라는 별명을 가진, 부드러운 매너에 소년 같은 얼굴을 한 베트남전 참전 경력이 있는 육군 중위다. 육군은 현재 그가 1968년 3월 ‘핑크빌’로 알려진 베트콩 거점 지역에서 수색과 파괴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 최소한 109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해가고 있다.”


허시가 작성한 미라이 사건 첫 기사의 리드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난한 자유기고가의 특종


이 기사의 배경을 공부하며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하나는 이 기사가 베트남에서 취재된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 그것도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반이 훌쩍 지난 시점에 나왔다는 점이다. 전쟁을 수행하던 당시 미국 정부와 군 당국의 철저한 정보통제를 짐작할 수 있는 정황이다. 두 번째 놀라운 일은 이 기사가 뉴욕타임스나 CBS 등 유력 매체가 그들이 보유한 강력한 취재력을 바탕으로 터뜨린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허시 기자는 잡지 여기저기에 기고하고 그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자유기고가였다. 그가 2013년 인디애나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한 강연을 보면, 1960년대 말 자신의 생활을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허시는 그 강연에서 처음 이 기사를 시사 사진잡지 <라이프>에 제안했다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결국 미라이 기사는 디스패치뉴스서비스라는 작은 통신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허시가 이 통신사에 1보를 보낸 날이 1969년 11월 12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1월 13일 세인트루이스포스트-디스패치, 뉴욕포스트 등 모두 33개 신문이 허시가 작성한 미라이 기사를 대부분 1면 톱기사로 게재했다.


작은 통신사를 통해 극히 일부 신문에만 기사가 나갔지만, 1보가 나간 뒤에는 세상이 바뀌었다. 1주일 뒤 두 번째 기사가 나갈 때는 뉴욕타임스를 포함한 모든 주요 매체가 허시의 기사를 원했다. 허시 기자는 1주일에 1개씩 다섯 주 동안 미라이 관련 기사를 기고한다. 그는 이 기사로 탐사 기자의 전설이 되는 첫발을 내딛게 된다. 이름 없는 자유기고가가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명사로 등장했다.


그는 UPI통신 네브래스카 지사를 거쳐 5년 차쯤에는 수도 워싱턴에 있는 AP통신 지국에 채용된다. 여기서 그가 취재하던 영역이 국방부와 CIA 등 국가 안보와 관련된 분야였다. 그가 2015년 쓴 <뉴요커> 기사를 보면, 당시 AP통신사는 기자가 전쟁에 비판적인 기사를 취재해 오면 에디터들이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허시를 질책하고 취재를 제약하는 에디터가 더 많았다. 그가 세계적인 전파력을 가진 AP를 나와 프리랜서가 된 배경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그에게 미라이 학살의 실상을 처음 알려준 사람은 당시 반전운동에 몸담고 있던 제프리 코원이라는 변호사였다. 워싱턴 지역에서 활동하던 코원은 미국 군인 하나가 광적인 상태에서 수십 명의 베트남 민간인을 살해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인명이나 지명, 발생 시기 등 세부 사실은 전혀 포함되지 않은 내용이었다.


▲ 쾅응아이성 선미마을에 세워진 미라이기념관 조형물.

미라이에서 학살당한 수 많은 민간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미국과 베트남 당국이 함께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연합뉴스, 무단복제 및 무단사용 금지>



#집념으로 이뤄낸 단독 취재


2015년 허시가 쓴 뉴요커 기사에는 당시 정황이 자세히 묘사 돼 있다. 이 정보를 바탕으로 허시는 구체적인 사실의 조각들을 찾아 나선다. 프리랜서가 혼자 하기에는 어려운 취재였지만 AP에서 국방부를 취재하며 사귄 인맥이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그중 한 사람이 한 육군 대령이었다. 이 사람은 베트남에서 한쪽 다리를 잃고 귀국해 당시는 맥나마라 국방장관실에서 근무하는 중이었다. 그는 당시 장군 진급이 내정된 상태였다. 허시 기자는 복도에서 만난 이 사람에게 베트남 민간인 학살 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느냐고 묻는다. 그는 매우 화난 얼굴로 돌아보며 “그 빌어먹을 캘리라는 녀석은 내 허리에도 미치지 못하는 아이들까지 모조리 쏘아버렸다네”라고 말했다. 허시가 처음으로 핵심 인물의 이름을 확보한 순간이었다.


허시 기자의 취재는 이 순간부터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는 곧바로 지역 도서관에 가 캘리 중위와 관련된 기사를 검색한다. 그리고 뉴욕타임스와 스타즈앤드스트라이프 등에 실린 단편적인 기사를 발견하고,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지역, 해당 부대 등을 확인한다. 그러나 사건이 발생한 뒤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조사가 매끄럽게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음 단계로 허시 기자가 탐문을 시도한 영역이 군검찰 쪽이었다. 군 당국이 공식적으로 문제를 인식했다면 당연히 법률적 조치에 착수했을 것이기 때문에 군법무 계통에 무언가 자료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러한 추적의 결과 허시 기자는 마침내 캘리 중위의 변호인을 찾게 되고 유타주 솔트레이크시에 있는 그의 사무실로 찾아간다.


결정적인 자료는 변호사가 들고 있는 기소장이었다. 그 기소장에는 미라이 사건의 첫 기사에 포함된 내용 대부분이 기술돼 있었다. 허시는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기소장을 변호사가 잠시 자리를 뜬 사이 책상에 펼쳐진 문서를 반대편에서 거꾸로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읽어서 기록해 나왔다고 말했다. 문서를 훔치거나 복사 장비로 복사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법에 저촉되지 않게 사건의 내용을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는 것이 허시 기자의 설명이다.


다음 단계는 캘리 중위를 찾아내 본인의 이야기를 듣고 사건 당시의 정황을 확인하는 일이었다. 미 육군은 당시 캘리 중위를 귀국시켜 아무도 찾을 수 없는 장소에 숨겨두고 있었다. 허시 기자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그가 조지아주 포트베닝 기지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현지로 달려가 깊숙이 숨겨져 있는 그의 거처를 찾을 수 있었다. 캘리 중위는 어렵지 않게 입을 열었다. 그의 주장은 핑크빌의 학살이 상부의 명령에 따른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자신의 부대에서만 있었던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캘리 중위를 인터뷰하며 허시 기자는 기사를 쓰는 데 근거가 되는 기초적인 사실을 대부분 확보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건 현장에 대한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할 내용이 많이 남아 있었다. 학살의 규모는 정확히 어느 정도였는지, 민간인 상대로 총격을 가한 병사들은 누구였는지, 사건 이후 은폐의 시도가 있었다면 어느 선에서 그러한 조치들이 취해졌는지 등에 대해 더 정확하게 확인해야 했다. 문제는 당시 현장에 있던 소대원들이 모두 귀국해 다른 부대로 전속됐거나, 제대 후 귀가한 상황이라는 점이었다. 다른 부대원들에 대한 추가 취재가 진행됐다. 그 과정에서 허시 기자가 찾아낸 사람이 폴 미들로 일병이었다. 미들로 일병은 소대장의 강압적인 지시에 따라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한 뒤 극심한 정신적 충격에 빠지게 됐다. 인디애나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군에 입대해 베트남으로 간 그는 미라이 사건 며칠 뒤 지뢰를 밟아 한쪽 다리를 잃은 뒤 전역해 고향에 돌아가 있었다. 사건 발생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던 미들로 일병은 그 사건 이후 극심한 트라우마 상태에 빠져 있었다. 허시 기자는 그를 취재하기 위해 인디애나를 찾아갔다. 허시의 2015년 뉴요커 기사를 보면, 미들로 일병의 모친은 그를 보자 “우리는 착한 아들을 군에 보냈는데 그들은 살인자를 돌려보냈다”며 한탄했다고 기록돼 있다. 미라이 사건이 가난한 인디애나 시골 청년과 그의 가족에게 어떠한 상처를 입혔는지를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었다는 것이 허시의 설명이다.



#"문제는 발행인과 에디터야"


미라이 기사의 파장은 컸다. 개인적으로 허시 기자는 1970년 퓰리처상 국제보도 부문 상을 수상하고, 1972년에는 뉴욕타임스에 스카우트돼 당시 막 달아오르던 워터게이트 사건 취재에 투입된다. 베트남 전쟁과 관련해서는 이 기사가 당시 전쟁을 주도 하던 닉슨 행정부와 맥나마라 국방장관의 도덕성과 신뢰도를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기사는 점차 확산되던 미국 사회의 반전 여론에 불을 붙이고, 국제 여론도 급격히 반미국, 반전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협상을 주도하던 베트남 외교관, 구앤 티 빈 여사는 “미라이 사건으로 미국은 도덕성을 상실하게 됐고, 국제 지지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해 결과적으로 월맹군이 전쟁에 승리할 수 있는 전기를 제공했다”고 2002년 베트남을 방문한 허시를 만나 얘기했다.

2015년 허시 기자의 뉴요커 글에 보면 미라이 지역에는 1968년 학살 사건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그곳에 기록된 공식 자료를 보면 사건 당시 학살된 베트남 민간인은 모두 504명이었다. 가족 단위로 보면 247가족이 피해를 보았고, 그 가운데 24가족은 일족 3대가 몰살당한 것으로 조사됐다. 사망자에는 유아 56명과 여성 182명도 포함돼 있었다. 세이모어 허시 기자는 1970년대 후반 뉴욕타임스를 나와 다시 자유기고가가 된다. 그러고는 주로 뉴요커에 굵직한 탐사 기사를 게재하며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역동적인 취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라크 아브그라이브 포로수용소에서 벌어진 학대 행위 고발, 오사마 빈라덴 사살 사건에 대한 의혹 제기 등 그가 다룬 사건 기사의 파괴력은 엄청났고 대부분 세계 여론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다. 마빈 칼브가 진행하는 ‘칼브 리포트’에 나온 허쉬는 에디터와 발행인의 문제를 따갑게 지적했다. 그는 모든 기사는 탐사보도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그리고 돈이 투입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문제는 그런 생각을 하는 언론사 소유주가 거의 없는 현실이다. 또 허시에 따르면 현재 에디터의 70%는 취재에 도움이 되기보다 방해가 되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허시는 이러한 에디터들이 사라져야 언론이 제대로 기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이모어 허시가 지난 40년을 프리랜서로 일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활용 자료]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6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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