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공유, 2012년 종이신문이 다시 뜨려면?

2011. 12. 6. 11:17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종이 ‘신문’, 2012년 다시 뜨려면 ‘참여와 신뢰’가 본질이다

이상돈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지난해 말 한국기자협회보에 ‘올드 미디어의 신뢰추락’이란 제목의 기고문을 통해 미디어의 신뢰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했습니다. ‘당신들은 알 권리가 있고, 우리는 진실을 말할 의무가 있다(You have right to know, we have duty to tell the truth)’라는 말로 끝맺는 한 해외 방송국의 시사 프로그램은 미디어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뉴미디어와 올드미디어의 빅뱅은 굉장히 단순한 이유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콘텐츠를 담을 그릇,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의 계속 쏟아지고 있는데, 이를 사람들은 뉴미디어라고 부르지요. 신문이나 방송 등 전통적인 미디어 플랫폼은 새로운 독자들의 만족을 높여주지 못했습니다. 이런 불만이 결국 미디어를 즐기는 방식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불만은 과연 기능적인 이유였을 뿐일까요. 쌀밥(콘텐츠)은 변하지 않습니다. 물론 와인처럼 어떤 디자인의 잔에 담겨 있는가에 따라서 그 풍미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체로 쌀밥이라는 고유의 맛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그릇(플랫폼)을 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이 조금 이상하게 생겼더라도, 색다른 디자인으로 숟가락질을 하기 힘든 형태라도 결국에는 새롭게 변하는 과정에 다름 아닙니다. 사람들이 쌀밥을 다시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요즘 대기업이 생산하는 쌀밥 자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었던 쌀밥인데, 어째 다른 곡물보다 더 믿을 수 없게 된다면 쌀밥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무너지겠지요.

최근 유명 블로그를 운영하는 네티즌, 소위 파워블로거라는 사람들 일부가 공정위로부터 전자상거래법 위반으로 과태료 처분을 받은 사실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습니다. 물건을 팔고 수익을 남기는 영리행위를 함에도 불구하고, 방문자들에게는 “비영리 공동구매”라고 기만했기 때문에 전자상거래법 위반이라는 설명입니다. 
또한, ‘반값 할인’이라는 모토로 전자상거래 시장에서 열풍을 이어가고 있는 소셜커머스 업체들 역시 공정위의 철퇴를 맞았습니다. 내부 직원이 직접 구매를 한 것처럼 상품 후기를 허위로 올리거나, 상품 판매 개수를 조작해 많이 팔린 것처럼 조작하는 수법으로 쇼핑몰 구매자들을 속였다는 사실이 확인됐기 때문입니다. 일부 유명 소셜커머스는 가짜 상품을 값싸게 판다고 홍보를 하다 덜미를 잡히기도 했습니다. 

파워블로거나 소셜커머스 등 일부 뉴미디어들의 이러한 기만행위는 밝혀진 것만 이 정도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방문자의 신뢰를 흔들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은 어느 쪽이 구체적으로 지적하지 않아도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결국 미디어가 방문자의 신뢰를 잃게 되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자명해집니다.




신문이 그러했습니다. 신문과 독자들 사이에 쌓아 온 수년~수십년 동안의 신뢰는 최근 급격히 무너지는 추세입니다. 신문의 콘텐츠 경쟁력과 제작능력을 의심하는 것을 넘어 신문 자체가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편향성을 넘어 왜곡된 정보를 제공하는 이상한 편집정책, 만 24시간 만에 정기적으로 제공되는 콘텐츠임에도 취약한 완성도, 전문적 식견이나 감성 없이 찍어내듯 양산하는 내용들은 뉴미디어로 자연스럽게 관심을 돌리게 하는 이유가 됐습니다. 요즘 뉴미디어는 콘텐츠의 소비만 강요하지 않습니다. 콘텐츠 생산과 유통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하여 독자들에게 신세계가 존재할 수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문 속에 담겨 있는 수많은 콘텐츠들을 그냥 포기해야 할까요. 저질 콘텐츠가 경쟁력을 가지는 일부 분위기에서 마냥 신문사의 부족한 능력 탓으로만 돌려야 할까요. 비록 온라인에서 선택받지 못했지만 좋은 콘텐츠에 과감히 추천하고 공유하는 행위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해서 신문 속에 콘텐츠 옥석을 가려내는 행위가 계속된다면 신문 콘텐츠의 미래 경쟁력은 훨씬 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문사 스스로 바뀌기 쉽지 않다면 독자가 신문에 요구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의미입니다.

“선거 때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지 않으면 정치 비판할 자격이 없는 거예요. 경찰 출동 안하고 쇠고랑도 안 차지만 이렇게 딱 정한 겁니다”라는 농담은 이제 신문 독자들에게도 반드시 적용돼야 할 몫이 됐습니다. 신문 미디어에 대해 뒷담화에만 집중하면서 변화를 요구한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 정도와 속도만 차이가 있을 뿐, 무엇이든 ‘참여’로 반드시 바뀔 수 있는 세상입니다. 생각보다 종이신문을 운영하는 신문사의 편집구조나 방향, 운영방식은 단순해서 독자들의 격한 반응에 귀 막고 눈 가리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올해 초 저는 언론재단 블로그 기고문을 통해 “편집을 알아야 신문을 제대로 읽는 것”(관련글 바로가기)이라고 했습니다. 편집을 안다는 것은 신문을 비판적으로 볼 줄 안다는 뜻이고, 이는 어떤 방식으로든 ‘참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내가 제대로 된 신문 콘텐츠를 종이든 인터넷 웹사이트든 계속 읽을 수 있으려면, 이리한 노력 정도는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요.

콘텐츠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문은 독자들과의 신뢰회복만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새로운 콘텐츠 유통 활로를 고민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독자들이 콘텐츠를 알고 찾아오는 구조, 즉 가리키지 않고(서브스크립션), 가리킴을 당하는 것(링크)이 경쟁력 있는 미디어의 기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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