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기자가 말하는 내 인생 가장 기억에 남는 신문기사 (2)

2012. 4. 27. 10:49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아기는 단 세 시간을 같이 있었던 복지사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쓸쓸했구나, 아기를 안았더니 뒤로 쓰러지며 울었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여도 그치지 않았다. 명자씨의 마른 가슴이라도 내주고 싶었다. 


 2009년 3월 중앙일보에 실린 <영월 배제비골 부부 윤익상ㆍ이명자 부부> 중의 한토막입니다. 흔히 보는 신문 기사와는 조금 다르다, 는 느낌이 있으실 겁니다. 꼭 이야기책에서 꺼내온 문장 같지요. 요 몇년 많은 신문들이 화두로 삼고 있는 ‘내러티브 저널리즘(Narrative Journalism)’입니다. 우리 말로 쉽게 ‘이야기처럼 기사쓰기’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이 기사가 마음에 남는 건 이 기사가 어떻게 탄생됐는지를 알고 있어서입니다. 기사를 쓴 강인식 기자는 중앙일보 10년차 기자입니다. 저와는 입사 동기이지요. 글을 아름답게 쓰기로 유명했어요. 2009년 사건사회부 경찰팀 회식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쓰는 기사는 너무 답답해. 꼭 기계로 찍어내는 것 같잖아. 그런 것 말고, 뭐랄까… 정말 생생하게 전달되는 문장으로, 읽히는 기사를 쓰고 싶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어요. 한 선배는 기사 쓰기를 ‘포디즘(Fordismㆍ대량생산체제)’에 빗대기도 했지요. 빠르게 정확하게 쓰는 것은 기자의 숙명입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효율적으로 기사를 쓸 수 있는 정형화된 틀이 생겨났지요. 한정된 지면에 더 많은 글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사건 기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서울 ○○경찰서는 ○일 ○○한 혐의로 ○○에 대해 구속 영장을 신청했다….’ 이런 식이지요. 하지만 딱딱한 글 일색인 신문은 어떨까요. 마치 말 잘듣는 모범생들만 모아놓은 교실처럼 밋밋하고 재미없지 않겠어요? 저 역시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터라 크게 공감했답니다.


 이날 기사는 이런 고민 끝에 나온 강 기자의 첫 내러티브 저널리즘 기사입니다. 산골 마을에서 갈 곳 없는 아이들 7명을 키우는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기사는 팍팍한 산골 살림과 아이들의 외로운 처지, 그래서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부부의 마음씨를 잘 담아내었습니다. 지체 장애인 친아빠가 맡겨두고 간 세 자매를 키운 얘기를 이렇게 그려내고 있네요. 


 

자매에겐 머릿니가 있었다. 부부는 무릎에 애들 머리를 누이고 서캐와 이를 발라내 짓이겼다. 자매는 어금니까지 썩어 있었다. 겨우내 치과를 다녔다. 명자씨는 부엌에 화이트보드를 달고 사물의 이름을 가르쳤다. 자매는 이곳에서 창문이 창문임을 알았고, 사과를 사과라고 발음했다.

 

 

기사는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산골 부부들에게는 따뜻한 정성이 이어졌어요. 거동이 불편한 한 남성이 찾아와선 차를 한잔 마시고 15만원을 놓고 갔다고 합니다. 반찬을 부쳐주겠다는 이와 책을 보내주겠다는 연락 등이 잇달았습니다. 물론 산골 부부의 헌신적인 사랑이 독자들을 움직였겠지요. 저는 그 사랑이 강인식 기자의 아름다운 글에 담겼기에 사람들의 마음에 더 깊숙히 가 닿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독자는 회사에 전화해 ‘마음으로 느껴지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기사’라고 칭찬했다고 해요. 온 마음을 담아서 다듬은 기사는 누구나 읽으면 알아챌 수 있는가보다, 하고 저는 생각했지요.
 
 강인식 기자는 이후 본격적으로 다양한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선보였습니다. 러시아의 인종 살인 사건을 다룬 <찢어진 눈의 동양인에 내줄 땅은 없다>(2010년 2월)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필리핀 신부 이자스민의 삶을 전한 <결혼 이민자를 보는 대한민국의 시선>(2010년 6월) 같은 기사입니다. 이 무렵 다른 신문들도 내러티브 저널리즘을 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기자들이 다양한 글쓰기를 고민하고 있으니 기자로서도 독자로서도 참 반갑고 고마운 일입니다.
 
 가끔 제가 쓰는 글의 수명을 생각합니다. 신문 기사의 수명은 하루일까요. 신문은 하루가 지나면 쓰레기통으로 던져지지요. 하루살이 글을 쓰는 직업이라니, 이런 생각을 하면 가끔 쓸쓸해지기도 했어요.
 
 기사의 수명을 늘리는 방법 중 하나는 아름다운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사의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단어를 고르고 골라서 독자들에게 내놓으면 독자들은 그 수고로움을 알아준다는 것을, 저는 배제비골 기사를 보면서 배웠어요. 오려 두고 가끔 꺼내보고 싶은 기사, 그런 기사가 될 수 있는 겁니다. 다 알면서도 능력이 닿지 않아 그런 기사를 쓰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지금은 그게 걱정될 뿐입니다. 소중한 교훈을 준 기사를 붙여드립니다. 이야기 읽듯이 감상해보시길 바랍니다.  중앙일보 경제부 임미진 기자 mijin@joongang.co.kr
 

 

 

[강인식 기자의 사람ㆍ풍경]영월 배제비골 윤익상ㆍ이명자 부부

 

 

 

[강인식 기자의 사람ㆍ풍경]영월 배제비골 윤익상ㆍ이명자 부부

강원도 영월군 북면. 연덕리 마을회관엔 ‘Young World 영월’이라 쓰인 푯말이 서 있고, 그 맞은편엔 전교생이 10명인 연덕분교가 있다. 분교에 가장 많은 자녀를 보내는 학부모 윤익상(48)ㆍ이명자(49)씨 부부는 이 마을 배제비골에 산다. 영월 절개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엔 저마다 이름이 있다. 사람이 살기 힘들어선지 짐승과 새가 주로 골짜기의 이름이 됐다. 부부는 갈 곳 없는 7명의 아이들을 키웠다.

 

 

 # 2003년 겨울


 수양부모협회에서 첫 전화가 걸려 왔다. 맡을 아이가 생겼다는 것인데, 10개월 된 남아였다. 부부는 손이 덜 타는 다섯 살 넘은 여아를 원했다. 갈 데 없는 아이를 키우자고 마음은 먹었는데 도시는 비싸니까, 귀농을 선택했었다. 자립할 토대는 만들어야겠다 싶어 손톱이 나가도록 일했다. 그러다 4년이 갔다.


 젖먹이라고 내치면 언제….
 말을 하다, 남편은 손에 박인 굳은살을 뜯어냈다.


 그럼 데려다 키운다고 합시다.
 명자씨는 말라서 더 구부정한 남편의 등을 향해 호기롭게 말했다.
 10월 26일 사회복지사가 영월역으로 영수(가명)를 데려왔다. 아기는 더벅머리였다. 이발을 한 번도 안 한 게 분명했다. 흘러내린 콧물이 양 갈래로 굳어 있었다. 중이염과 비염을 앓고 있다고 했다. 복지사가 건넨 가방에는 기저귀 3개와 분유 반 통이 들어 있었다. 아기 엄마는 미혼모라고 했다. 살 만해지면 찾아갈 거라고 했다.


 아기는 단 세 시간을 같이 있었던 복지사와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쓸쓸했구나, 아기를 안았더니 뒤로 쓰러지며 울었다.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여도 그치지 않았다. 명자씨의 마른 가슴이라도 내주고 싶었다. 아기가 온 지 열흘도 안 된 11월 초, 또 전화가 왔다. 삼형제인데 학교도 못 가고 있다고, 부모가 이혼했는데 아빠가 신용불량자라고 했다. 그렇게 현수(당시 2학년ㆍ가명), 창수(1학년), 철수(6) 삼형제가 왔다. 사내 녀석들은 정신없이 뛰었다. 아기는 울고 삼형제는 뛰었다.


 명자씨는 평범한 주부였다. 남편은 목사다. 경기도 남양주시에서 목회를 했다. 부부는 결혼하면서 삶의 목표를 ‘소외된 사람을 위해 사는 것’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사정이 괜찮아지면’이라는 단서를 달면서 계획은 유예됐다.


1998년 어느 날, 교인 한 명이 기도를 하다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간질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교인 몇이 교회를 떠났다. 누구는 “무섭다”고 했고, 누구는 “꺼림칙하다”고 했다.


결국 방법은 소외된 이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부부는 결론 냈다. 한국의 시골은 늙어 갔다. 젊은이들이 떠나면서 아이들을 남겨놨지만 거두어 주는 이는 없었다. 시골에선 그렇게 결손가정과 조손가정이 늘어 왔다. 부부는 모아놓은 돈으로 배제비골에 땅 2650평을 샀다.

 

 

# 1999년 여름


 외동딸을 제대로 교육시키지 못할 것 같아 명자씨는 귀농이 내키지 않았다. 중2였던 딸에게 “고추장에 밥만 비벼 먹어도 괜찮겠느냐”고 했는데, 군말이 없었다. 그래서 명자씨도 싫다고 하지 못했다.
 7월 19일. 배제비골에 내려오니 아무것도 없었다. 8평짜리 비닐하우스를 치고 잤다. 맑고 컴컴한 그곳의 밤엔 별뿐이었다. 하우스 앞 개천에서 빨래를 하는데 뱀이 나와서 명자씨는 울어버렸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촛불을 켜고 숙제하는 딸을 보며 또 울었다.
 어느 날인가 비가 많이 내려 개천이 불었다. 개천을 건너야 딸애가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발목까지 오던 물이 허리까지 찼다. 명자씨는 딸의 속옷과 교복을 비닐에 싸 머리에 이었다. 모녀는 그렇게 개천을 건넜다. 수건으로 딸을 닦아 주고 옷을 갈아입혔다. 딸은 군소리 없이 학교로 갔다. 딸의 뒷모습을 보며 명자씨는 다시 울었다.
 전기는 10월에나 들어왔다. 방 네 개짜리 집이 세워진 것은 겨울이었다. 밤엔 영농기술책으로 공부하고 낮엔 밭에서 일했다. 여름엔 농사를 지었다. 일감이 없는 겨울이면 뻥튀기 장사를 했다. 강릉 도매시장에서 떼다 팔았다. 부부는 진부ㆍ대화ㆍ제천ㆍ단양ㆍ평창의 5일장을 돌아다녔다. 허생원(소설 ‘메밀꽃 필 무렵’) 같지 않아? 똑같은 데 돌아다니네. 명자씨는 소녀처럼 말하곤 했다.

 

 

 # 2008년 가을


 지난해 가을, 삼 형제의 아빠라는 사람이 찾아왔다. 직업도 얻고 재혼을 해 이젠 형제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맏아들 현수는 착했다. 엄마의 무거운 짐을 뺏어 들었고, 밭에도 나갔다. 둘째 창수는 똑똑했다. 고무동력기 날리기 도대표였고, 원주의 방과후학교에서 ‘맞춤법 1등’을 했다. 셋째 철수는 엄마에게 릴레이 달리기를 시켰다. 엄마는 가을 운동회에서 철수와 함께 릴레이를 했다. 명자씨는 분교의 최고령 엄마였다. 형제는 엄마 생일엔 에이스크래커를, 아빠 때는 빠다코코넛을 선물했다. 그런 형제가 떠났다. 9월 27일이었다.
 그날 저녁 세 자매가 왔다. 11살, 9살, 6살이었다. 친아빠는 명자씨에게 “10년만 키워 주십시오”라고 했다. 첫째와 둘째는 태어날 때부터 혀가 입안에 붙는 질병이 있었다. 정선의 자선단체 도움으로 수술을 받았다고 했다. 지체장애의 아빠는 애들을 수시로 때렸고, 알코올중독이던 엄마는 2007년 집을 나갔다. 자매는 말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허리를 허이로, 사과를 하과로 발음했다.
 자매에겐 머릿니가 있었다. 부부는 무릎에 애들 머리를 누이고 서캐와 이를 발라내 짓이겼다. 자매는 어금니까지 썩어 있었다. 겨우내 치과를 다녔다. 명자씨는 부엌에 화이트보드를 달고 사물의 이름을 가르쳤다. 자매는 이곳에서 창문이 창문임을 알았고, 사과를 사과라고 발음했다.

 

 

# 2009년 봄


 10개월 된 아기였던 영수가 입학했다. 한 손으로 영수를 업고, 한 손으로 고추 모종을 키웠었다.
 딸 희진이는 경기도 안산에 취직했다. 사회복지사가 됐다(실은 명자씨도 지난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키우던 고양이를 영월 집에 맡기러 온 딸에게 명자씨는 물었다.
 “너도 어려운 사람들이랑 살라구?”
 “아니, 난 엄마처럼 못 살아. 출퇴근하면서 도우면 되지.”
 그렇게 말하는 딸의 머리를 명자씨가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남편이 바라보고 있었다. 남편의 무릎엔 영수가 잠들어 있었다. 그 앞에서 세 자매가 요즘 꼬마들에게 인기 최고라는 ‘유희왕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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