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유품 중 가장 정리하기 힘들었던 것

2012. 8. 24. 09:43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갑자기 돌아가신 친정아빠의 유품 중 가장 정리하기 힘든 것은 신문 스크랩 파일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인생의 황금기를 군인으로 보내셨지만, 글쓰기를 즐겨 하셔 결국 책까지 출간하셨던 노년 시절 아빠의 유일한 취미는 하루 8시간 글쓰기와 신문 탐독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시작했던 직장 생활과 연이은 결혼으로 아빠의 노년 생활을 곁에서 상세히 지켜보진 못했지만, 종로까지 나가셔서 A4 용지와 문구 용품들을 잔뜩 안고 행복하게 오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서재의 책장을 살펴보다가 언제부터인가 도서보다 더 많은 칸을 차지하기 시작하던 신문 스크랩 파일을 한 권씩 꺼내 보며 아빠의 깊은 애정과 기억들을 붙잡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연도별, 주제별, 4남매별, 손자손녀별. 분류해서 스크랩한 내용의 다양성은 평소 아빠의 과묵함을 대신한, 한 장 한 장 끝없는 가르침의 목소리였다.






아빠는 군인 출신답게 항상 신문의 4귀를 정확히 맞추어 쌓아 놓으셨다. 신문들도 이제는 생활지로 모두 소비하고 남은 게 없지만, 신문 배달하던 분들까지 조의금을 전달하러 올 정도로 아빠의 신문 사랑은 외곬적 애정이었던 것 같다.

조금은 늦게 찾아온 사춘기로 방황하던 때도, 불확실한 진로에 갈등하고 있었을 때도, 1970년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전공과 학교 선택에 대한 정보가 없어 힘들었을 때도, 항상 말없이 내 곁에서 방향을 잡아 주고 길과 희망을 던져 준 것도 아마 아빠의 신문 스크랩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난 아빠의 스크랩하는 그 가위 소리가 참 듣기 싫었다. 자르고, 붙이고 메모하고, 색 사인펜으로 줄긋고 하는 아빠의 그 작업이 왜 그렇게 청승스러워 보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결혼 후 마치 한풀이하듯이 신문을 보고서는 휙 던져 놓아 보기도 하고, 스크랩 따위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며 서너 번 눈길이 가는 기사도 애써 외면해 버리곤 하였다.

하지만 내 아이들이 커 가면서 나와 아이들의 소통의 물꼬를 터 준 것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신문이었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기질이 남달랐던 큰아이와 서툴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첨예하게 대립만 지속하던 나의 관계를 회복시켜 준 것도, 예술을 전공하는 아이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 준 것도, 정치적 견해 차이를 해소시켜 준 것도 신문 스크랩이었다. 그 이후 난 아빠와 똑같은 모습으로 매일 신문을 탐독하고, 기사를 스크랩하고, 우리 아이들과 내 주변을 위해 나누고, 복음 전하듯이 권하며 스스로 스크랩 행복 전도사라고 지칭한다.


서정주 시인을 키운 8할이 바람이었다면 나를 성장시켜 준 8할은 바로 신문 스크랩이 아니었을까.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내 신문 스크랩을 먹으며 더 많이 성장할 것이다. 난 아빠의 스크랩들이 그러했듯이 아이들에게 신문 스크랩하는 유산을 물려주게 되리라는 확신이 든다. 지금 내 모습을 아이들이 어떻게 평가하든 말이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2년 신문논술대회 수상작 모음집>중 일반부 장려상 수상작 김현주 님의 ‘아빠의 유산’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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