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에 펼쳐보는 독립 신문! 응답하라 1919

2013. 2. 28. 13:30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내일은 역사적인 함성이 되살아나는 3.1절입니다. 3월 1일은 1919년 수많은 열사들이 독립을 위한 열망으로 온 마음과 몸을 던지며 아우내 장터로 나섰던 날입니다. 그 후에도 6.10만세 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이 지속되었지요.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이 아우내 장터 한 곳으로 모일 수 있었을까요? 전화기도 없던 그 시대에 말이죠. 그 비결은 바로 ‘신문’에 있습니다. <격고문>이라는 신문에 기고된 글을 보고 사람들은 3.1운동이후 지속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정보를 알고 모이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민중들의 힘을 필요로 했던 여러 독립운동 힘의 원천은 바로 신문에 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은 돌아오는 3.1운동맞이 일제 치하 속에서 신문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행보를 겪었는지 한 번 살펴볼까합니다. 

 

 

[출처-서울신문] ▲유관순 열사

 

 


3.1운동, 조선의 신문발행에 불을 지피다.

 

3.1운동은 신문사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 사건 중 하나입니다. 3.1운동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기 때문이지요. 3.1운동 당시,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전국적으로 거리에 나온 조선의 국민들을 보며 일본은 많은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때 일본은 무자비한 무단 통치 보다는 우회적으로 조선인들을 구슬리는 문화통치가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 예상하며 통치 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출처-yes24] ▲조선의 식민통치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책들

 

 

문화통치를 시행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억압을 완화시키게 됩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바로 언론규제가 완화 되었다는 점이지요. 문화통치가 시작된 1920년 이전에는 조선인이 운영하는 조선어 민간신문을 모두 폐간 시키며 강압적인 언론탄압을 시행했다면, 문화통치가 시행되면서 조선어 민간신문을 허용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발행되었고 더불어 <시사신문>의 발행을 허락하였지요. 이 세 신문은 1920년, 당대를 대표하던 조선어 민간신문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총독부 제2인자이던 미즈노 렌타로 정무총감은 “불을 때는데 굴뚝이 없으면 솥이 파열 한다”라고 민간신문 발행을 허용한 이유를 설명했다. 식민지 국민에게 ‘언론’이라는 불만 배출구를 제공함으로써 식민지 통치를 원활히 하겠다는 것이다.(후략) 
                                                                    [한겨레 프리즘] 굴뚝과 언론 / 최상원-한겨례,2012.11.20

 

 

 

일본의 이중성이 투영된 1920년대의 신문규제

 

일본은 문화통치를 통해 언론의 규제를 완화시킨 것 같지만, 모두 알다시피 문화 통치는 빛 좋은 개살구였습니다. 일본은 언론의 규제 완화를 외쳤지만, 무단 통치 때보다도 더 교묘하고 강압적인 언론 검열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이런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많은 신문들이 언론의 자유를 외쳤습니다. 특히 사설을 통해 언론 자유에 대한 중요성을 외쳤지요.

 

 

●어떤 사회에서건 ‘발달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에게 언론이 없을 수 없으며, 언론을 무시, 압박하는 것은 전제정치와 마찬가지다.(후략)
                                                                          《동아일보》 1925년 8월 4일 <사회의 동정과 언론기관>

 

●합리적인 사회생활과 사회생활의 진보, 향상을 위해 언론의 자유가 필요함을 주장한다.(후략)
                                                                         《조선일보》, 1925년 6월 14일 <신문지법개정에 대하여>

 

                               <1920년대 민간신문, 잡지 글 통해서 본 언론상황> 참고, 이민주, 동서대학교일본연구센터

 


하지만 이런 외침은 아무 소용없었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말하던 일본은 사전통제와 사후통제를 통해 3.1운동 이 전보다도 꼼꼼하게 검열을 했기 때문이지요. 특히 식민통치에 위배되는 주제의 기사가 써졌을 경우에는 기사 삭제를 요구하는 사후통제가 남발 되었습니다. 이때 신문사들은 기사가 있던 자리 자체를 공백 처리를 하면서 그 자리를 비워 두었고 삭제된 기사들이 많아지면서 아예 한 면이 공백처리가 되어 있는 신문들을 일명 벽돌신문이라 불렀습니다. 앞에서는 언론의 자유 완화를 외치던 일본은 뒤에서는 언론탄압을 하는 이중적인 자신들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이런 벽돌신문들을 발행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시대에 빛을 잃어버린 민간신문들

 

문화통치시기 많은 민간신문들이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많은 규탄의 기사들을 실었지만, 점차 많은 신문들이 이런 일본의 통치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문화통치를 시작할 당시엔 비참한 조선 현실을 전달하고 국민 계몽을 위해 힘쓰던 신문들이 점차 변절하게 된 것입니다. 문화통치 초에는 일본의 검열을 통해 삭제되던 기사 수가 한 해 304, 332건에 달했지만, 문화통치 말기엔 한해 89,82건으로 줄었습니다. 삭제된 기사 수가 줄었다는 의미는 그만큼 신문사 자체에서 일본 정부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주를 이뤄 작성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출처-서울신문]

 

 

베를린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손기정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삭제하고 기사를 발행한 일명 ‘일장기말소사건’의 이길용 기자를 가장 먼저 벌한 것은 일본정부측도 아닌 기자가 속한 신문사였습니다. 심지어 신문사 측은 일본의 눈치를 보며 바로 쫓아낸 후 바로 본 기사와 신문사 측의 입장은 다름을 인정하는 정정기사를 내는 등의 만행을 보여줬습니다. 이와 함께 다른 신문에서도 일본 황실을 찬양하는 사설들이 난무하면서 초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기(祈) 황군무운장구(皇軍武運長久)’(1937.10.13.)/ ‘축(祝) 남경함락(南京陷落)’(1937.12.22.)/ ‘봉축(奉祝) 명치절(明治節)’(1939.11.3.)/ ‘축(祝) 지나신정권성립(支那新政權成立)’(1940.4.18)

▲한 국내신문에 실린 광고 선전 문구들. 기사보다도 훨씬 노골적으로 친일성향을 보여준다.

 

 


캄캄한 시대의 별똥별이 되어버린 조선의 신문

 

비록 많은 신문들이 일본 정부에 빛을 잃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신문들이 민중계몽과 개화 그리고 독립을 위해 투쟁했습니다. 문화통치 말 조선어 신문들이 변절하게 되고 민족말살정책이 시작되면서 조선의 언론은 암흑기에 들어섰지만 문화통치 초반까지는 많은 신문들이 언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했었습니다.

 

 

[출처-서울신문]  ▲1897~1953년 사이에 발행 됬던 월간지와 신문들

 

 

1883년 최초 근대 신문인 <한성순보>는 국민계몽과 정부의 근대화를 위해 외교관 역할을 다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강대국 사이에서 약소국이었던 조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독립국가로서 선진문명을 가지는 것이었는데요, <한성순보>는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후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이 직접 새운 <독립신문>이 창간됩니다. 국민 계몽과 함께 정세를 정부에게 알리고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 민간신문이었죠.<독립신문>은 후에 <독립협회>창설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요, 이때부터 독립운동을 위해 일제와 대립하는 신문들이 연이어 등장하게 됩니다.

 

 

독립운동을 지원한 신문 중 대표적으로 <황성신문>을 들 수 있습니다. 황성신문은 국민계몽에 큰 기여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저항언론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초기에 대외중립을 선언한 한국을 일본 편으로 끌어들여 전쟁을 유리하게 진행시키고 한국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강제로 한일의정서를 체결하였는데, 이를 신문이 보도하였다가 기사를 삭제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저항정신을 살리고 국민에게 일본의 탄압상을 간접적으로 전하기 위해 활자를 거꾸로 인쇄한 앞서 말했던 ‘벽돌신문’을 발행하기도 했지요. 또한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보안회’를 홍보하고 지지하며 애국 사상을 고취시키기도 했으며. 그 유명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린 신문 또한 바로 <황성신문>이었습니다.



<황성신문>은 이 사설로 인해 집행진 모두가 체포당하며 정간 당했지만 그 후에도 <황성신문>의 여파는 계속 남으며 국민들에게 일제 통치 기간 동안 민족의식 고취와 대일 비판 자세를 지키는데 원동력이 됐습니다.

 

 

어떠신가요. 현재가 있기 까지는 과거, 무수한 투쟁들이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삼일절을 맞이하여 암울한 시대에서도 별처럼 빛났던 그들을 기리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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