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자살 보도가 생명 구한다

2011. 6. 8. 09:06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대표적인 고전 문학으로 일컬어지는 <파우스트>를 남긴 독일의 문학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장장 60년이 걸려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괴테가 세상을 떠난 후 ‘대작’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하지만 <파우스트>가 유명해진 것은 괴테 사후의 일로, 사실 괴테는 생전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청춘 소설로 더욱 큰 인기를 얻었답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독일의 대문호 괴테. 이미지출처:위키피디아>

1774년에 간행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했던 괴테 자신의 체험이 어우러진 자전적인 소설로, 끝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해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극적인 청춘의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은 비슷한 연령대의 젊은이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는데요. 작품 속 주인공 베르테르의 아픔에 공감한 많은 젊은이들이 모방자살을 해 당시 사회적인 파장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이후로 유명인이나 자신이 모델로 삼고 있던 사람 등이 자살할 경우, 그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해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베르테르 효과’라고 부르게 되었는데요. 이런 모방자살은 과거와 현재를 가리지 않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연예인 자살 보도 실리면 후속자살 14배 늘어나

약 200년 전, 문학작품 하나로 인해 생긴 모방자살 현상은 오늘날 언론 보도를 통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때보다 더욱 상세하고 과격하게 묘사하고 있는데요. “동맥을 칼로 긋고 다량의 수면제를 먹었다”는 식으로 자살방법을 세세하게 묘사하거나, “영원히 함께 있기 위해 자살했다” 등의 낭만적인 묘사, 또는 “그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다 써보았다” 등의 문제해결을 위한 수단으로써 자살을 묘사하는 등 오히려 자살을 부추기는 듯한 뉘앙스를 주는 기사도 많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언론의 대대적인 유명인 자살보도(장국영•이은주•최진실씨 등)가 일반인의 후속자살을 최대 14.3배나 높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의 발표에 따르면 2005년 영화배우 이은주씨 자살 후 자살건수는 당초 2월 7백명에서 3월 1천3백명으로, 동일한 자살방법도 2월 3백건에서 3월 7백50건으로 2배 이상 급증한 사례가 있습니다.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중 한 장면>

결국 언론보도에 따른 ‘베르테르 효과’가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말인데요. 이렇게 언론의 자살보도가 실제 모방자살을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학계에선 이를 두고 ‘방아쇠 효과’라고 합니다. 자살을 하려던 사람이 보도에 자극을 받아 자살을 실행하거나, 심각한 위기에 빠진 사람들이 그 해결책으로 언론의 자살 보도를 참고한다는 이론인데요. 결국 언론이 자살을 망설이는 사람에게 ‘자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방아쇠를 당기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살방법 상세 묘사가 모방자살 낳아

우리나라의 자살은 크게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일례로 1992년 주요사망원인 중 자살은 10위를 차지했으나 1998년 7위, 2007년엔 4위로 상승한 바 있습니다. 이는 교통사고 사망률보다 훨씬 높은 수치인데요. 또한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 한국자살예방협회에서는 “언론이 자살보도준칙을 적극적으로 검토, 준수한다면 자살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며 “한 사람의 생명이 자신이 쓴 기사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 달라”고 했는데요. 


실제로 국내 신문•방송 자살기사 모니터링(2006년 1월~2008년 8월) 결과 신문은 72%(적절 27.9% 부적절 49.1% 매우 부적절 22.9%), 방송은  80.6%(적절 19.3% 부적절 39.6% 매우 부적절 41%)가 부적절하게 자살을 보도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 점에서 1987년 오스트리아의 자살보도 실험은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점이 많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서는 언론에 대해 ‘자살보도지침’을 배포하고 언론이 이를 적극적으로 준수했는데요. 그 결과 1988년 오스트리아의 자살률은 급격하게 감소했습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배포된 자살보도지침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살 보도를 하되 △자살 외의 대안 제시 △남겨진 유가족들의 고통 △자살의 원인과 배경, 자살 징후 표기 △자살하지 않고 다른 해법을 찾은 사람들의 사례 등이었는데요. 결과적으로 선정적인 기사에서 벗어나 자살에 대해 다각도로 조명할 경우 자살률을 크게 낮출 수 있다고 합니다.


최근 자성하는 보도 분위기 눈에 띄어

이런 가운데 얼마 전 주목할 만한 사례가 있어 눈길을 끕니다. 올해 5월 말, 자살로 생을 마감한 故채동하씨의 빈소에 모인 사진기자들은 “모든 매체 사진기자들에게 공지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보도협정을 맺었는데요. 빈소 내 스케치는 전체 사진기자 풀(POOL)로 빈소가 차려진 첫째날만 진행하고, 모든 매체 사진기자는 빈소 풀취재를 제외한 유가족, 조문객 취재를 하지 않기로 한 것입니다. 

<故채동하씨의 장례모습>

기자들은 이 같은 협정이 일회성이 아닌 차후의 빈소 취재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공지대로 취재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밝혔는데요. 그동안 ‘독자들의 알 권리’라는 미명 하에 과도하게 고인의 빈소를 촬영하고, 슬픔에 잠긴 유가족과 조문객에 대해 사진세례를 날리던 취재 행태가 개선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직접적으로 자살 보도와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작은 변화를 계기로 ‘선정적인 기사’가 아닌 예의를 갖추고 애도를 표하는 성숙한 보도가 자리잡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대부분의 언론들이 유명인의 자살 보도를 앞다투어 싣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런 흥미성 기사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들은 해당 유명인이 왜 죽었는지에 대한 관심보다는, 많은 어려움 속에도 꿋꿋하게 삶을 이어가는 ‘희망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사회적 파급력이 높은 언론 보도가 이왕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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