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보사 편집국장이 말하는 대학 신문 문화

2013. 4. 24. 10:21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들 한다. 그렇지만 요즘, 대학생들이 사는 방식은 10년에 한 번이 아니라 1년에 한 번 꼴로 바뀐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 대학생들이 만들어 가는 학교 신문, 학보사의 문화도 그만큼 급변한다. 




더 이상 우리에게 학보사는 전부가 아니다


학보사가 한 때는 학창시절의 전부였다. ‘연세춘추’를 만든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적게는 3학기, 길게는 5학기까지 보낸 경험은 학보사 선배들에게는 거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친구도, 선배도, 후배도 모두 학보사에서 만났으며, 심지어 연애도(!) 학보사에서 해결했다. 주머니가 가벼우면 학보사에서 주는 두둑한 장학금이 있었다. 



그리고 하강 곡선을 그리고 있는 학점을 보면서 미래가 어두운 것 같으면,이 역시도 어느 정도 ‘춘추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커버가 가능했다. 이렇게 춘추는 때로는 선, 후배, 동기와의 돈독한 우정을 다질 수 있는 곳으로, 때로는 밤샘 시험공부가 가능한 나만의 중앙도서관으로, 때로는 나의 연애와 커리어를 보장해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기능하고는 했다(고 한다). 과연, 학창시절의 전부라고 할 만 하다.



하지만 이제, 지금 학보사를 하고 있는 기자들에게 학보사는 더 이상 전부가 아니다. 예전처럼 학보사를 하며 나온 장학금으로 친구들에게 거하게 술을 쏘는 건 그야말로 전설일 뿐, 시급으로 계산하면 천 원 꼴이라는 신문사 장학금은 통장을 스쳐 지나간다고들 표현한다. 빨리 기사 마감을 하고 가려는 기자들이 많아져, 선, 후배가 마주 앉아 밤을 새우며 얘기하는 풍경은 그렇게 흔한 일은 아니게 됐다. 




학보사는 당신의 스펙 경쟁에서 스쳐 지나가는 한 줄의 경력



 ▲ 그러니까 이제, 학보사는 이 넓은 이력서를 채울 수 있는 단 한 줄이 되는 셈이다



날로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기를 바라는 사회의 압박 때문일까, 혹은 끝이 보이지 않는 스펙 경쟁 때문일지는 몰라도 춘추는 이제 학창시절의 전부라기보다는 스쳐 지나가는 한 줄의 경력이 돼 버렸다. 얼른, 학보사를 나가서 다른 것을 이것저것 해야 하기 때문이다.



영어도, 대외활동도, 봉사도 한두 개씩. 그 모든 것을 ‘춘추를 했다’는 말로, 이제는 대신할 수 없다. ‘스마트’하게, 자신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춘추를 하면서도 다른 일을 하는 게 요즘 우리 신문사에서는 유행에 가깝다. 어쿠스틱 기타 동아리가 됐든, 취업 스터디가 됐든, 토익 혹은 토플 학원이 됐든, 모두들 춘추와 또 다른 무언가를 한, 두개 씩 더 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기자들은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에 휩싸이고는 한다. 



춘추가 요구하는 시간적인 노력은 이제 ‘내 시간을 뺏기는 거’라고 자주 표현된다. 때론 공공연하게 얘기되기도 한다. “아, 진짜 얻어가는 것도 없고, 나 학점도 챙겨야 되고, 학회도 하나 하고 있는데 춘추 때문에 맨날 되는 게 없는 것 같아...ㅠㅠ” 이런 말은, 정말 아주 흔한, 요즘의 춘추 기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뇌까려봤을 만한 말이다. 그러니까 이제 학보사를 한다는 건, 학창시절의 전부가 아니라 아주 잠깐 발을 담그는, 당신 인생의 한 줄 이상의 의미가 되기 힘들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당신에게 전부였는가



 ▲마치 직장같이 생긴 춘추 편집국. ‘직장문화’라는게 존재한다면, 춘추에도 그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 당신이 학보사에서 얻어가는 전부였는가. 나는 가끔 되묻고는 한다. 겨우 스펙 한 줄로 남을 학보사라고만, 그렇게 생각해야 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게 정말로 맞다면, 나는 여기서 5학기 동안 도대체 무슨 뻘짓을 하고 있는 셈이 되나.) 



학보사는 엄연한 ‘직장’이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학생들이 비록 근무하고, 근무시간이 일정하지는 않고, 경제적 보상도 매우 짜다고 할 수 있지만 직급 체계가 있고 보상, 처벌 체계가 있는 하나의 회사다. 그리고 그런 회사의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곳 중의 하나다. 



우리대학교 학생 중 과연 누가, 학보사를 하지 않은 누가 상사의 눈치를 읽고, 팀원들과 협상하고, 업무과중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는지를 경험하고,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예의를 부딪혀나가면서 배워볼 기회가 있었을까. 과연 누가, 비품 목록을 작성하면서 겪는 짜증과 인수인계의 어려움, 전략적인 미팅을 주최하는 것의 버거움을 학교를 다니면서 경험해 봤을까.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학보사는 스펙 한 줄 이상으로 당신에게 주는 것이 많다는 게 나의 요지다. 



단지 요즘 학보사를 다니는 기자들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점, 그리고 그러한 무언가를 얻을 때까지 걸리는 시간과 노력에 쉽게 지치는 점이 이를 가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학보사가 겨우 한 줄 스펙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학보사 활동에 스스로를 불태워 봤나? 시간이 가는 것도 모르면서 기사를 쓰고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고, 주간교수와 한 판 거하게 싸워 봤나? 그런 ‘고됨’이 단지 싫기 때문에 피하고, ‘스마트’하게 학보사를 다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보다 더 안타까울 수 없다. 



그놈의 ‘스마트함’이 학보사에 퍼지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가 됐다는 것이 나는 개인적으로 슬프다. 스마트폰이 멀리 있는 외국 친구와의 소통은 하게 해 주면서 당장 옆에 있는 가족들 하나 챙기지 못하게 만드는 것처럼, ‘스마트하게 학보사를 다니는 문화’는 자신이 학보사를 다님으로서 잃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해야 하는 것만을 보게 하고 당장 옆에 있는 ‘춘추가 학창시절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유’를 놓치게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스마트하지 않았던, 때로는 무식하던, 때로는 우직하던 때가 그립고 학보사들이 전반적으로 보이고 있는 이 ‘스마트 문화’가 마냥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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