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투르게라도 '붉은 선'을 그어보자... 그것이 창작이다

2014. 10. 10. 13:09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출처_소설가 김중혁 홈페이지 



신문을 읽다 보면, 갑자기 빨려 들어가서 읽게 되는 기사가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관심으로 기사를 열었다가 기사 속 문체가 가진 흡입력에 끝까지 읽게 되죠. 이렇게 읽고 난 기사는 왠지 혼자만 보기 아까워 SNS를 통해서 공유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싶은 기사가 있으셨나요? 다독다독에서는 함께 공유했으면 하는 기사를 모아 연재코너를 만들었습니다. 그 첫 번째 시간으로 한국일보에서 최근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 김중혁 작가의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창작을 하는 사람이다. 대학교 2학년 때부터 작가가 될 마음을 먹었으니 24년 동안이나 뭔가를 만들어보겠다고 책상 앞에 앉아서 끙끙대고 있는 셈이다. 아무 것도 쓰지 못한 채 흘려버린 밤이 몇 날인지, ‘난 결국 재능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좌절한 새벽이 또 몇 날인지 모른다. 또 어떤 날은 글이 너무 쉽게 잘 써져서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이러다가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쓰는 것은 아닌가, 건방진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새벽과 밤과 환하게 밝아오는 아침과 좌절과 건방들이 모여서 24년이 되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끙끙대고 있는데도 여전히 창작이라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다. 어떻게든 뭔가 만들어내고는 있지만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좀더 쉬운 길은 없는지, 남들은 모두 알고 있는데 나만 모르는 창작의 비밀 같은 게 있지는 않은지,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이 연재를 시작하고 있다.



 얇고 희미한 붉은 줄, 긋는 것과 긋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글을 잘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혹은 “주로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나요?” 같은 궁극적인 질문이거나 “하루에 글은 몇 시간 쓰세요?” “쉴 때는 어떤 일을 하세요?” 같은 생활형 질문들이다. 간단하고 단순하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 느껴지는 질문들이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혹은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와 같은 질문인 셈이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그 질문들에 잘 이야기해주고 싶지만 멋있는 말을, 실용적인 말을, 더 정확한 조언을 해주고 싶지만 말로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답답하다. 그 답답함이 이 연재를 시작하게 만들었다. 말보다는 글이 조금 더 편하다.



대학교 2학년 작문 시간에 쓴 글이다. 다시 읽어보니 유치하기 짝이 없는 글이지만 정성스럽게 쓴 것 같긴 하다. 선생님은 빨간 펜으로 “열심히 정진해서 작가의 길을 꿈꾸어 보세요.”라고 적었고, 나는 작가가 되었다.

출처_한국일보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  



매튜 퀵의 소설 ‘용서해줘, 레너드 피콕’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세상 만사가 모두 마음에 안 드는 18살 불만투성이 주인공 레너드 피콕은 현대 미술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실제로 미술관에서 이보다 더한 걸로, 새하얀 캔버스 위에 가늘고 붉은 줄 하나를 세로로 찍 그어놓은 작품도 봤다. 실버맨 선생님에게 그 붉은 줄 그림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런 건 나도 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안 했잖아.” 


주인공 레너드 피콕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얇고 희미한 붉은 줄 하나일 뿐이지만 그걸 긋는 것과 긋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한 번이라도 소설의 첫 문장을 써본 사람에게 ‘칼의 노래’의 첫 문장은 엄청난 무게감으로 육박해올 것이다. 붉은 선을 한 번 긋고 나면 선에 대한 생각으로 머리가 가득 차고, 어떻게 하면 더 잘 그을 수 있을지, 남들은 어떤 선을 긋는지 살펴보게 된다.



20매 분량의 짧은 에세이를 쓴다고 해보자. 시작은 늘 힘들다. 원고지 20매가 아득해 보이고 과연 살아서 저 황무지 같은 빈칸들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 걱정되기 시작한다.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감탄사 같은 것으로 시작해볼까. 아니면 무덤덤한 단문으로 시작해볼까. 소설처럼 가상의 주인공으로 시작해볼까. 고민 끝에 결정을 내린 다음 일단 시작하고 원고지 10매가 넘어갈 때쯤이면 몸 어디에선가 이상한 물질이 분비되기 시작한다. 정말 묘한 기분이다. 내 손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느낌보다 글이 나를 통과해서 나오는 것 같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단어들이 좁은 통로를 비집고 나오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고, 나를 통과한 문자들이 컴퓨터로 쏟아져 나온다. 이런 쾌감은 쉽게 잊을 수 없다. 글쓰기는 고통스럽다. 하지만 고통을 넘어서면 엄청난 쾌감이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글쓰기뿐 아니라 모든 창작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뭔가 창작하는 걸 어렵게 생각한다. 창작하는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다고 생각한다. 한번도 붉은 줄을 그어보지 않은 사람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붉은 줄을 그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할 것이다. 과연 이 줄을 내가 그어도 되는 것인지 스스로를 의심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어보면 일단 재미있다. 누구나 붉은 줄을 그을 수 있다.



출처_한국일보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서투르게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어릴 때의 미술 시간이 생각난다. 선생님이 나무를 그리라고 했다. 나는 열심히 나뭇가지를 그렸고, 나뭇잎을 그렸다. 꼼꼼하게 그렸다. 새들이 날아와서 부딪치는 나무를 그리고 싶었지만, 결과물은 도화지에 모이를 던져놓아도 더럽다며 새들이 도망갈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선생님은 다음날까지 그려오라고 숙제를 내주셨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형이 미대에 다니고 있었다. 그날 저녁 형은 수채화 물감과 붓을 들고 와서 내 그림에 생명을 불어 넣었다. 묽은 물감을 묻힌 수채화 붓으로 나뭇가지 사이를 툭툭 건드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녹색의 이파리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빈틈없이 녹색을 칠해 넣던 나의 노력이 어이없을 정도로 나무는 아름다워졌다. 다음날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고, (칭찬하던 선생님이 무안해질까봐 형이 도와줬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림에 대해서 뭔가 좀 알 것 같았다. 


지금도 그림에 대해서는 쥐뿔도 모르지만 창작에 대해서는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무조건 열심히 빼곡하게 채워 넣는다고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는 게 꼭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됐다. 창작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상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예전에는 “작가님은 하루에 몇 시간 동안 책상에 앉아 있어요?”라는 질문이 어처구니없게 들릴 때도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나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묻는다. 그 막막함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어이없는 질문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한 질문도 할 수 있다. 음, 예를 들면, “노트는 줄이 있는 걸로 쓰나요, 아니면 줄이 없는 걸로?” 혹은 “손톱을 깎을 때 왼손부터 깎나요, 오른손부터 깎나요?” 혹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깨가 많이 아플 텐데 안마기 같은 것도 사용하시나요? 어느 회사 제품이 좋아요?” 이런 질문도 할 수 있다.



출처_한국일보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  



창작의 비밀에 대해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어쩐지 절대반지를 찾으러 떠나는 기분이다.) 사람을 만나서 인터뷰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디선가 주워 들은 이야기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뮤지션을 만날 때도 있을 것이고, 무용수나 화가나 소설가나 시인을 만날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창작이란, 장르를 불문하고 모두 통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예술가들은 평생 창의성을 연구하고 있으니 그들에게 듣는 이야기가 새로운 자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말로 연재의 프롤로그를 마치고 싶다. G.K.체스터튼의 말이다. “내가 꼭 하고 싶은 일이라면, 서투르게라도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다.”


우리는 서로 서로 천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나도 당신도 천재는 아니다. 천재 같은 것은 어쩌면 없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가 만든 창작물은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조차 놀라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면 어떤가. 우리는 만드는 사람이고, 창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의 그 어느 조직보다도 끈끈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지금 무엇인가를 만들기로 작정한, 창작의 세계로 뛰어들기로 마음먹은 당신을 존중한다. 하찮다고 느껴지는 걸 만들었더라도, 생각과는 달리 어이없는 작품이 나왔더라도, 맞춤법이 몇 번 틀렸더라도, 그림 속 사물들의 비율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노래의 멜로디가 이상하더라도, 나는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건투를 빈다. 



위 내용은 한국일보에 연재 중인 김중혁 작가의 <김중혁이 캐는 창작의 비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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