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들의 뜨거운 바다, 그 때 그 시절
더위를 피하려고 찾아간 바다, 그러나 여름의 바다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운 곳이죠. 한여름의 태양처럼 끓어오르는 열기와 낭만을 주체할 수 없는 청춘들이 모여드는 바다, 그 바다로 달려갑니다.
해수욕장의 상업적 개장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바다에서 물놀이를 즐겼지만, 우리나라에 상업적 개념의 해수욕장이 처음 개장한 시기는 191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1912년 7월 14일 매일신보 「해수욕장개설」
당시 유명했던 해수욕장은 부산의 송도, 인천의 월미도, 함남의 함흥, 강원도 원산의 명사십리나 송도원해수욕장 등이 있었고, 전라도에선 군산해수욕장이 처음으로 개장했는데, 그 때도 지금처럼 여름 해수욕장은 인산인해였습니다.
(왼)1922년 7월 20일 매일신보 「매일 모여드는 원산해수욕장」 (오)1927년 2월 10일 동아일보 「명사십리 해수욕장」
그렇다고 아무나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행경비와 당시의 인식이 사람들의 발길을 무겁게 했죠. 그나마 남녀가 섞여서 해수욕을 하는 것은 풍기문란이라며 여성들만을 위한 부인해수욕장이 부산에 개장하기도 했는데, 여성들이 별로 찾지 않았나봅니다. 이후 별 소식이 없는 걸 보면요.
1927년 6월 2일 동아일보 「부인해수욕장 신설」
그래도 개화 좀 되었다는 젊은 사람들과 돈 좀 있는 사람들은 바다로 임시열차를 타고 달려갔습니다.
해수욕장에 간다구? 햐! 이놈 하이카라로구나. 첨단적인걸!
맘먹고 간 해수욕장은 일상과는 다른 상황이 펼쳐집니다. 괜히 힐끔거리거나, 밤에 어슬렁거리고 다녀도 순사들에게 취체를 받거나 유치장에 갇히지 않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육체미 백퍼센트라는 여성해수욕꾼들의 자태를 맘껏 즐길 수 있는 에로의 낙원. 거기다 흰양복에 백구두, 맥고모자까지 말쑥하게 차려입고, 의례히 첨단적 신여성을 데리고 혹은 모시고 가는 사치까지 곁들이면 그야말로 하이카라의 첨단적인 사람이라며 만인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습니다.
멋을 부리기 위해 흰양복자켓과 맥고모자까지는 구했으나 흰바지를 구하지 못해 그려서라도 들고 다니기라도 해야 할 지경이라는 풍자만화_1934년 6월 25일 매일신보 「이렇게까지 할 게 무엇이 있소!」
여름의 환락경, 해수욕장의 에로로그
가끔 수영복이 찢어질 듯한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면서 슬슬 앞으로 지나가는 여성해수욕꾼 때문에 현기증이 유발되거나, 강한 의지와 수양을 필요로 하기도 해서 인내의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순사에게 잡혀갈만한 행동만 안하면 그야말로 지상낙원이요, 기분 개방의 흥분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 해수욕장이었습니다.
(왼) 1930년대 대천해수욕장의 여성들(사진 : 2014년 7월 연합뉴스) (오) 1934년 6월 15일 동아일보 「바닷가 백사장, 해수욕의 로만쓰」
한 낮의 흥분은 밤까지 이어져 텐트에 누워서 잠을 청해도 좀처럼 잠은 오질 않습니다. 모기와 다투며 뒤척뒤척 거리다가 결국은 텐트에서 나와 주로 일본인들이나 돈 많은 조선인들이 거액을 주고 묵는 방가로 별장 앞으로 엽기의 눈을 하고 지나가 보기도 합니다.
“... 집이 방가로식이니까 평옥으로 지어 놓았고, 해방적 기분을 존중이 여기는 만치 문단속도 하지 않고 그냥 열어젖힌 채 잠을 잔다. 그래서 첫새벽 이상스러운 산보객에게는 그다지 보기 쉽지 않은 광경도 눈에 뜨인다. 엷은 모기장 속에 털 난 다리들과 흰 다리들도 보이기가 일쑤고 하이카라한 남자의 머리와 속발한 여자의 두 머리가 가지런히 보이기도하고 이것을 말로 하면 그다지 신기하지는 않은 것 같겠지만 무엇이 보이나 하고 기웃거리며 다니는 사람에게는 상당한 만족의 재료가 되어서 저 모기장 속에서 무슨 동작이나 일어나지 않나하고 지내가던 발을 잠깐 멈추고 기미를 엿보는 수도 없지 않다...”
-1932년 7월 1일 별건곤 53호 「여름의 歡樂境, 海水浴場의 에로그로」
해수욕복을 입은 쪽진 여인과 양산을 쓰고 해수욕을 하는 여인....비격식의 용납?
해수욕장의 진풍경은 해수욕꾼들의 각양각색의 모습입니다. 육감적 뚱뚱보에 대비하는 골감적 말라깽이는 천고(天高)의 키다리와 마비(馬肥)의 땅달보로 보면 될 뿐이요, 쪽지고 해수욕복을 입은 여자는 해수욕복이란게 원래 우리의 유물이 아닌 것이니 그리 이해하면 될 일이요, 해변에서 화장을 하거나 양산을 쓰고 물속에 들어가는 여자, 아기에게 젖을 먹이며 물속에 드나드는 여자.. 모두 격에 맞지 않지만 이는 풍치만 즐기는 풍류객의 허튼 소리일 뿐이고, 건강을 위한 해수욕이라면 이 모든 비격(非格)은 모두 용납이 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격은 시들은 장미처럼 향내가 없는 꽃과 같다고 은근히 지적을 하기도 했습니다.
1936년 8월 6일 동아일보 「해수욕장 풍경」
여름의 바다, 잊지 못할 로맨스
그때나 지금이나 해수욕장을 찾는 젊은 청춘들은 영화 같은 로맨스를 기대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립니다. 그러다보니 온갖 수작들이 난무합니다. 1935년 발행된 삼천리에선 <해수욕장의 유혹술> 이란 글을 통해 이런 할 일 없는 사나이들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해수욕장에서의 만남과 이별이 평생을 간직하는 추억이 되기도 했습니다. 20살의 교사 송금숙은 수영을 하고 바다에서 나오는 한 남자를 본 후 말 한마디 건네지도 못했지만, 십년이 지나서도 잊지 못하고 마음 한 켠에 간직하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1936년 8월 1일 삼천리 「海水浴場서 맛난 그 處子-明沙十里의 精魂」
남자의 해수욕복을 금하라
일제의 수탈이 극심해지기 시작한 1939년에 총독부는 수천종의 생필품의 가격을 억제하거나 생산을 금지하여 201가지 종류만 생산을 허용했습니다. 특히 남자용품에 대한 제한은 더 심했는데, 그중에서도 남자들의 해수욕복은 금지하고, 빤스만은 용서(?)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여성해수욕복은 할 수 없이 허락해 줬으니 고맙다고 해야 할 지경이었습니다.
1939년 10월 10일 매일신보 「해수욕복, 사루마다 제조금지」
해수욕장 100년 풍속도
1910년대에 개장을 한 해수욕장은 바다의 풍경도, 사람들의 풍경도 그다지 변한 게 없습니다.
1936년 8월 동아일보 연재 「해수욕장 풍경」
1958년 8월 동아일보 연재 「바다의 點描」
1930년대와 1950년대의 해수욕장 풍속도를 연재한 동아일보의 칼럼를 보면, 지금의 기사라고 해도 별반 이상할 게 없습니다. 모든 게 다 변해도 해수욕장의 모습은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참 희안하면서도 재밌는 일이죠. 아~ 청춘은 아니지만, 저도 변함없는 여름바다에 가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