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간 뉴스]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배추수송작전
아침에 일어나면 으슬으슬,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더위가 물러간지도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말이죠. 요즘은 장롱에서 조금씩 두꺼운 옷을 꺼내면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있는데요. 어릴 적에는 어머님이 김장을 위해 소금에 한아름 절여놓은 배추를 보면서 '아, 이제 곧 겨울이구나.'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은 바로 그 '김장 김치'에 대한 얘기를 가지고 왔습니다.
밥상에 김치가 없으면 얼굴에 코가 없는 거 같고
지금이야 냉장고가 일반화되어 한여름에도 보관에 문제가 없지만, 예전에는 신선한 채소의 영양소를 보존하면서 오랫동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생존에 필수적이었습니다. 이런 연유로 나온 게 우리의 대표 음식인 김치인데요. 겨우내 먹을 김치를 담그는 김장을 '겨울의 반 양식'이라 할 정도로 중시하였고, 김장은 어느 지역 어느 가정이나 입동을 전후해서 치르는 행사로 자리 잡아 왔습니다.
“김치라는것은 우리 조선사람이 밥다음에 김치업시는못견데입니다 만반진수가 잇드라도김치가업스면 얼굴에 코업는것갓고 음식모양이 못될뿐아니라입에도 버릇이되어 김치못먹고는 될수업시 압니다 그러니어찌 소중타아니 하겟습니까"
1931.11.10. 동아일보 4면 - 한창 김장할때 주부의 명심할일
김치는 한국 고유의 음식이 아니다?
대다수가 김치하면 보통 아래와 같이 빨간 고춧가루에 버무린 맛있게 익은 붉은 배추김치를 떠올린 텐데요. 우리는 이런 김치를 언제부터 먹었을까요?
사실 이런 김치를 먹게 된 것은 20세기 이후의 일이라고 합니다. 고작 100여 년 밖에 안된 거죠. 우리가 김치를 담글 때 주로 쓰는 배추는 19세기 말 중국 산둥반도에서 들여온 결구성배추이고, 고추가 우리나라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도 17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생각보다 김치의 역사가 길지는 않죠? 그전까지는 색깔도 하얗고 무를 주로 사용했다는 사실!
또한, 김치라고 하면 한국에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김치와 유사한 채소를 절인 음식은 중국, 일본 등지에서도 흔하게 발견됩니다. 요즘 '양꼬치 앤 칭따오'라는 유행어가 있을 정도로 양꼬치를 드시는 분이 많은데요. 양꼬치 집에 볶음 땅콩과 함께 나오는 짠 채소 무침 같이 생긴 게 '자차이'라고 불리는 중국식 김치입니다. 그리고 일본에는 '쓰케모노'라고 오이, 가지 등을 소금에 절여서 먹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단무지도 대표적인 쓰케모노입니다.
그렇다고 상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선조가 외부에서 전래된 배추와 고추를 접목하여 지금의 김치를 완성했듯, 우리의 김치는 지속적으로 다양하게 발전하며 우리의 대표 음식이 되었으니까요!
남쪽 김치는 젓국과 양념을 많이, 북쪽 김치는 약간만 절여 삼삼하게
김치는 채소를 오래 보관하는 방법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탄생했기에 지역 특산물과 더불어 '기후'가 김치의 특색을 좌우했는데요. 남쪽으로 갈수록 맵고 짜고 북으로 갈수록 싱겁습니다. 다만 제주는 예외적으로 겨울에도 배추가 밭에 있을 정도로 따뜻하기 때문에 김장의 종류가 많지 않고 김장독을 묻지 않는다고 하네요.
“각도마다 그 지방의 특색을살려 김장김치를 담그는데 남쪽은 따뜻하여 배추를 푹 절이지않으면 안되므로 젓국과 양념을 많이하여 맴고짜게 하고 북쪽은 기후가 추운관계로 잘익지 않으므로 약간 절여서 배추의 단맛이잃지 않게 삼삼하게 양념하는 것입니다 그 지방 생산물과 기후에 적합하게 담가서 한겨울동안 저장해두었다먹는 김장이니만큼 양념의 분량과 간은 배추와 무우 그리고 해마다 기후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지는것입니다"
1958.11.11. 경향신문 4면 - 각지방의 김장과 특색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배추수송작전
김장철이 되면 갑자기 수요가 몰리기 때문에 도농이 분리되어 발전한 근대로 들어오면서 배추 같은 김장재료를 산지에서 도시로 실어나르는 게 국가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정부부처와 철도청이 나서서 임시 열차를 편성하는 등 '김장수송대책'을 세우고, 야간통행이 자유롭지 않던 60년대에도 치안국장이 나서서 김장 트럭의 통금시간 운행을 돕기도 했습니다. 가히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죠?
1962.10.22 동아일보 7면 - 김장列車運行(열차운행) / 1965.11.24 경향신문 7면 - 김장트럭등 團束(단속)을緩和(완화)
김장조차 사치인 사람들
김장 김치에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겨있습니다. 우리 밥상을 풍성하게 해주는 김치이지만, 11월 이미 추워진 날씨에 아낙네들이 둘러앉아 온 가족의 겨우내 밥상을 준비하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겠지요. 더구나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이런 김장조차도 사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우리조선사람형편으로는 쌀이업서 밥을짓지못하는데 어느하가에 김치생각을하겟슴닛가?먹을줄모르는것은아니나 배추갑은 날마다올라서끗을모른다함니다 배추 한통에조치도못한데다 사전식이고 무한포대에 이원가량인데도 근원이넉넉지못하니 이를 엇지함닛가? 돈푼이나잇는사람들은 김장바리를 저들이느라고 분주한데이것저것할수업는사람에게는그것이큰걱정꺼리며 탄식거리임니다"
1926.11.12 동아일보 3면 – 김장때를맛난 가난한사람의고통
알면 알수록 풍성해지는 우리 밥상
한국전쟁이 발발한 50년의 겨울 기사에는 '내년에는 올해 못 담근 김장을 담자'라는 문구가 눈에 띄더군요. 사소한 한 줄에서 참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다양한 음식 문화의 발달과 보관 수단의 등장으로 김치가 차지하는 비중도, 김장의 중요성도 예전과 같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문득 어머님이 김장 날 해주시던 수육이 참 그리워지네요.
오늘은 광복 전후에 신문에 비친 김장 풍경을 중심으로 살펴봤습니다. 유심히 보면 우리 밥상에는 김치 말고도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알면 알수록 더 풍성해지는 우리 밥상! 오늘은 밥상에 어떤 음식이 올려져 있나 매의 눈으로 살펴보는 날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