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변하는 과학기술 과학 보도 전문성도 진화해야
이투데이 김윤경 기획취재팀장의 글입니다.
요즘은 영화도 그냥 즐기기가 쉽잖다. 우주 조난을 다룬 영화 ‘그래비티’까지야 인간이 우주에서 느낄 고립감에 대해 상상하면 되지만, ‘인터스텔라’에 이르면 차원이 달라진다. 웜홀과 블랙홀 같은 물리학과 천문학 아이템이 거론되고 그야말로 5차원이라는 개념까지 등장하니 말이다.
과학 저널리즘이 필요한 이유
사람들의 이런 의문에 답을 주어야 하는 주체는 누구일까. 과학자?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자의 말을 효율적으로 거르거나 가공해 들려줄 저널리스트들이 아마도 더 많은 책임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널리즘의 세계에도 불안이 가득하다. 하루가 다르게 과학은 발전하고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알파고도 잘 모르겠는데 1딥마인드는 무엇이며 2딥러닝과는 또 뭐가 다른가. 차라리 광우병이나 구제역, 조류독감은 듣기에 낯설지나 않다. 생경한 이름의 바이러스들이 계속해서 출현, 우리 삶을 위협한다. 바이오 신약의 개발과 승인을 재료로 해당 기업의 주가는 천당과 지옥을 오가기도 하고 쓰나미에 쓰러진 원자력 발전소가 우리에게 미칠 피해, 과연 끝나긴 할 것인지 궁금한데 또 어딘가에선 대규모 자연재해가 벌어지고 있다.
과학 저널리즘의 존재는 여기서 발아한다. 과학저널리즘은 다양한 과학적 전문성을 요구하는 보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기후변화와 전염병 감염, 에너지 문제, 자연재해에 대한 보호 등까지를 포괄하는 3광의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게다가 기술의 발전, 변화는 4미디어 진화(media revolution)2까지 가져오고 있다. 필립 M. 나폴리에 따르면 미디어 진화란 본질적으로 미디어산업이 환경적 조건들에 반응하면서 시간의 진행과 함께 본질적으로 진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기술의 변화, 특히 이용 가능한 미디어 기술의 변화는 미디어를 전문화 단계로 변화하도록 한다.
5테오도르 그로스에 따르면 현대 과학 저널리즘의 전제는 단지 과학 용어를 일반인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 분야의 특수 담론을 일반 담론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하며, 취재원을 다양하게 확보해 특정한 프레임으로 과학 보도가 전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자신이 잘 알아서 소화한 과학 지식과 정보를 독자들에게 알맞게 재가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과학 뉴스의 몸부림과 오보
그러나 현실에서는 단순한 과학 보도도 쉽지 않다. 노벨상, 그것도 의학, 화학, 물리학 등의 분야 수상자가 결정되면 이 사실을 일단 긴급 보도로 알려야하며, 또한 깊이 있는 분석 기사에서도 수많은 미디어들이 보도 경쟁을 벌인다. 누군가는 속보에 특화하고 다른 쪽에선 깊은 분석을 하는 식의 미디어 간 구분이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 지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단순 번역만 하거나, 혹은 비윤리적이지만 이것저것 검색 결과를 짜 맞춰서 보도하기 쉽다. 그러나 전문적 지식의 획득과 보완 없이 이뤄진 보도는 금세 오보로 판명나기도 하고 오보를 받아쓴 미디어들까지 줄줄이 오보의 행진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도 너무 많은 ‘비슷비슷한 뉴스’속에서 진짜 뉴스가 무엇인지 선별하기란 뉴스의 소비자뿐 아니라 생산자들도 어렵다. 내용이 어려운 과학 뉴스는 더욱 그렇다.
미디어가 과학을 다루는 방식은 실제보다 많이 부풀려져 있거나 혹은 틀리기도 한다. 문제는 대중이 과학을 수용할 때는 6즉각적 응용에 대한 기대를 갖는다는 데서 더 커진다. ‘전지전능한 치료약이 개발됐다’거나 ‘장수에 이르는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표현이 쓰이지 않으면 기사가 되지 않는 듯하다. 반대로 병에 대한 과도한 우려도 미디어가 키운다.
우울증 치료제 ‘프로작’을 대스타로 만든 건 미디어이다. 녹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캡슐약 프로작은 1990년 3월 26일자 뉴스위크 표지에 실리며 커버스토리로 다뤄졌다. ‘프로작의 약속’이란 제목의 이 기사가 큰 파장을 일으키자 다른 미디어에서도 프로작을 마치 ‘행복을 가져다주는 약’으로 묘사하는 보도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이 약이 오히려 자살과 폭력적 행동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자 프로작은 단숨에 미디어를 통해 ‘당신을 죽이는 약’으로 전락했다. 불과 몇 개월 새에 벌어진 일이다. 1994년 뉴스위크는 프로작을 또 한 번 커버스토리로 다룬다. ‘프로작을 넘어서’란 기사에는 “프로작이 이제는 크리넥스처럼 익숙해졌고 생수와 동등한 사회적 지위를 갖게 됐다”고 했다. 7 ‘프로작 문화’라는 기사도 나왔다. 다시 프로작 매출은 급증했고 선택 약제로 급부상하게 됐다.
이렇게 선정성과 속보성에 매달리는 것은 과학뉴스가 ‘킬(뉴스 아이템으로 발제됐으나 선택되지 못하는 것을 일컫는 미디어 용어)’되지 않기 위해 부지불식간에 택하게 된 강박일 수도 있다. 신문의 고정 과학면이 거의 없어진 지 오래이고, 과학 전문 케이블 방송과 소수의 전문 잡지 빼고는 맥락성을 중시하는 과학 아이템이 뉴스가 되긴 쉽지 않으니 말이다.
과학자와 대중 소통 돕는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
과학의 벽은 생각보다 대중에게 높다. 저널리스트들의 노력이 그래서 필요하지만 과학자와 대중 간직접 소통이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다. 과학자가 학계의 언어로만 얘기할 때 대중은 점점 더 과학과 멀어질 수 있다. 과학 다큐멘터리의 명작<코스모스>는 책으로도 나와 우리 존재의 의미를 우주적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예일대 교수였던 칼 세이건의 노력은 당시 학계에선 홀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도 ‘사이언스 커뮤니케이터(Science Communicator)’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서대문자연사박물관을 이끌어온 이정모 관장이 대표적 인물이다.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인 이정모 관장은 과학자들의 노력만큼이나 8 ‘대중의 과학화’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정치 논리에서 자유로워야
과학 저널리즘이 갖춰야 할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정치 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이 정확한 연구 결과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면 어쩌면 집단과의 이해가 얽혀서이거나 정치세력의 눈치를 보고 있어서 일 수 있다.
지구온난화를 막자는 ‘교토의정서’를 놓고 미국은 판단을 번복했고 결국 탈퇴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교토의정서에 서명하면 미국이 파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둘 행동에 나섰다.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는 ‘윈프리 쇼’에서 처음으로 환경 문제를 다뤘고 이 문제에 뜻을 함께 하는 마이크 오펜하이머 미 스탠퍼드대 교수, 배우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등이 출연했다. 디카프리오는 최근 아카데미상 수상 소감에서도 이 문제를 거론해 화제가 됐다. 앨버트 고어 전 부통령과 함께 2007년 노벨 평화상을 공동수상했던 기후학자 고(故) 스티븐 슈나이더는 부시 전 대통령이 교토의정서 탈퇴를 위해 내세웠던 비과학적인 주장들에 대해 과학자나 미디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9사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과학 저널리스트는 이런 상황을 감시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과학자, 그리고 정부는 대개 과학적 업적을 중시하고 이것이 세상을 발전시킬 것이란 10도그마에 빠져 있기 쉽다. 앵무새처럼 휘둘렸다가는 ‘제2의 황우석 사태’가 나오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참고자료]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5월호, 특집 <AI와 과학 저널리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