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 긋는 시민 기획위원] 연관성 위기에서 연관성 초위기로 : 정체성 강요와 공동체의 위기
「초연결 사회와 소셜미디어 성장의 역설」을 바탕으로
written by. 한지유 (계간 ≪미디어리터러시≫ 시민 기획위원)
《미디어리터러시》 2023년 여름호(통권 제25호)에는
초연결 사회와 소셜미디어 성장의 역설을 주제로
‘포스트매스미디어 : 연관성 위기에서 초위기로’ 신간 소개가 실렸다.
그 뒤를 이어 이번 <밑줄 긋는 시민 기획위원>에서는
해당 도서에서 다루고 있는 연관성(relevance) 개념과
촉발된 위기를 중점적으로 정리해 설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책에서 “과연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과 지금, 여기에 연관된 것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고, 행동하는 삶을 사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다르게 말하면, 나, 지금, 여기라는 나와 매우 밀접한 연관 요인들에 관심이 있냐는 말이 된다. 정답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자신과 연관 없는 것에 많은 관심을 쏟아왔고 지금의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너무나도 ‘자신’에 심취해 자기중심적인 면모를 보인다고 말한다.
소박한 ‘나’보단 거대한 ‘국민’이 되다
: 매스미디어 시대 속 연관성 위기
사람이라면 일반적으로 자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것들에 더 많은 관심과 애착을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TV와 라디오로 표상되는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도리어 나와 같이 밀접한 것들을 사소하고 하찮게 여기면서 그것들과 먼 것들을 중요하게 인식했다. 많은 나라들은 정치 영역에서 매스미디어를 활용해 작고 소박한 ‘나’의 정체성은 내려놓고, 국가와 국민, 민족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도록 유도했다는 것이다.
매스미디어 시대의 메시지 전송(massage transmission)은 외부에서 내부, 중앙에서 주변부, 평균적인 것에서 구체적인 것, 국가에서 개인으로 이어졌다. 개개인이 일상적 정체성을 잃고, ‘국민’의 정체성을 짊어지고 있었던 이유다.
우리나라의 사례로는 ‘통일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는 과거에 북한과 한민족이라는 측면에서 통일해야 할 당위성을 주창해왔다. 그런데, 다시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나라 사람들 간에 ‘민족’이라고 하는 거대한 정체성이 먼저 형성돼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이후에 북한 사람들과 우리가 한민족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는 나와 내 주변의 문제에 집중하기보다도 거대한 정체성의 문제를 주로 살펴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체성의 흐름을 두고 저자는 연관성 위기(the crisis of relevance)라고 부른다. 자신과 연관되지 않은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것들을 더 중요하게 인식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연관성 위기를 한 문장으로 요약해 제시하기도 한다.
“오히려 중앙 집중, 세계화, 표준화, 일반화 등이 가리키는 방향의 변화에서 개인은 자신의 문제, 지금, 여기의 문제로부터 소외되고, 대신 자신과 직접 관련 없는, 지금, 여기의 문제와는 동떨어진 이슈, 쟁점, 이야기들에 끌려다닐 뿐이었다.”
과잉된 ‘나’의 정체성이 시야마저 좁게 만든다
: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 속 연관성 초위기
매스미디어 시대에는 개인이 자기 정체성보다 더 크고 거대한 국민, 민족 등의 정체성을 부여받고 그렇게 살 것을 강요받았다면,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의 개인은 오직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를 대표한 것은 SNS이다. 우리 주변에는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유튜브 등과 같은 디지털화된 사회관계망이 퍼져 있다. 이 관계망을 통해 우리는 각자 자신의 이야기에 심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의 미디어 중독이 매스미디어 시대가 강요했던 나, 우리, 지금, 여기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중독이 아닌, 오히려 그 요인에 대한 과잉을 만들어내 객관적 시점에서의 나, 우리, 지금, 여기를 살펴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역사적 통찰을 못하고 넓은 시야로 다양한 주체들 간의 위치와 공간을 상상하지 못하며 ‘지금’, ‘여기’라는 공간에만 몰두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배타성과 편협성, 그리고 시공간적 근시를 촉발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저자는 연관성 초위기(the super-crisis of relevance)라고 한다. 그런데, 연관성 초위기는 자기중심적 행태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도 함께 가지고 있다. 바로, 각 개인들이 생산한 이야기의 가치를 플랫폼 기업 등과 같은 제3자들이 가져간다는 것이다.
초국가 IT 기업은 데이터 자원을 바탕으로 초합리적 알고리즘을 통해 각 개인에게 연관성의 경험을 제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 개인의 삶이 무엇에 연관됐고, 무엇을 중요하게 여겼고, 무엇에 주목했는지를 데이터로 분석한다.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 생산 과정에서 그 주인공인 개인과 공동체 스스로는 접근할 수 없고 수정조차 할 수 없다는 점이 연관성 초위기의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연결하고 의미를 뽑아내는 것은 모조리 이야기의 주체인 ‘나’의 영역이 아닌, 플랫폼 기업 안에서 이뤄진다. 연관성의 가장 핵심 준거인 ‘나’는 과잉 제시되지만, 그 가치조차 얻지 못한 채 의미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는 연관성 초위기 현상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미디어가 ‘공동 경험’의 위기를 초래한다
: 연관성 위기와 초위기가 가진 공통점
매스미디어 시대와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는 매우 다르다. 두 위기는 거대한 정체성을 강요하거나 좁은 ‘나’의 정체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사뭇 다르게 여겨질 수 있지만, 종국에는 우리 공동체에 대한 논의를 잃어버리게 한다는 점에서 주는 시사점이 크다.
연관성 위기는 나와 내 주위의 연관된 것들에 대한 가치를 낮게 평가함으로써 연관된 공동체의 사회적 자본을 감소하게 했고, 연관성 초위기는 연관된 것들 가운데 ‘나’에 지나친 초점을 맞춰 도리어 자신과 공동체의 차이를 선명하게 부각하고 있다.
연관성 위기 속 ‘약한 공동체’의 상실은 다른 가족과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가족 일원이 아닌 가족 밖 누군가와 매우 친밀한 준사회관계를 만드는 것에서 시작한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들과 의미 있는 소통과 유대는 줄어들고, 정작 라디오 프로그램 호스트와 일명 ‘내적 친밀감’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된다. 사회적 자본을 강조하는 퍼트넘(Putnam)은 ‘나 홀로 볼링’이라는 저서에서 TV가 사람들을 집에 머물게 하면서 같은 지역 거주민과 지역 현안을 논의하거나 지역 모임을 갖고 단체 활동을 하며 스포츠 리그를 보는 등 사회적 유대 관계를 맺고 사회적 자본을 축적할 기회를 빼앗았다고 본다. 친밀성을 기반으로 하는 강한 유대는 더 강화되고 사회적 자본의 기반이 되는 약한 유대는 더 약화되는 현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연관성 초위기 속에서도 공동 경험의 축소나 상실은 일어난다. 저자는 “개인은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확장하며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과만 연결될 뿐 이질적인 타자, 이질적인 시간과 공간이 함께 어우러지는 공동체로부터 멀어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욱이나 이런 식의 연결은 권력 강화나 이윤 추구를 위해 이용될 뿐, 나와 우리 그리고 타자가 함께 만드는 공동체를 위해 연결망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한다.
자신과 다른 누군가와 접촉해 공동 번영을 위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미디어의 발전으로 더더욱 사라져갈지도 모른다. 특히나 자신과 친밀하고 비슷한 수준에 있는 사람과 접하는 행위는 매우 다양한 수준의 구성원으로 이뤄진 공동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식으로 그 와해 속도를 더 빠르게 만들 수도 있다.
저자는 이 파편화의 해결책으로 ‘번역’을 제시한다. 포스트 매스미디어 시대에서는 서로 다른 상황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이 서로 번역 과정을 거쳐 묶이고 더 크고 완결된 줄거리(narrative)가 완성된다고 강조한다. 특히, 다른 지역 사례와 우리 지역 사례가 비슷하다고 연결 짓는 수평 번역 그리고, 특정 지역의 이야기가 모두에게 해당하는 보편적 이야기로 바뀌거나 보편적 이야기가 특정 지역과 연관 있는 이야기로 서로 바뀌는 수직 번역을 그 예시로 든다.
저자가 소개하는 연관성 위기와 초위기는 미디어의 흐름이 바뀌어가면서 그 위협이 점차 우리를 어떻게 잠식해나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더욱이 이러한 위기에 대응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를 앞으로 어떻게 발전으로 이끌어나갈 것인가에 집중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