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5. 3. 16:23ㆍ포럼
EBS 드라마 ‘네가 빠진 세계’ 제작기
written by. 손예은 (EBS PD)
지난해 방영된 EBS 20부작 드라마 <네가 빠진 세계>에는 특별한 매력이 있다.
10대들의 사랑과 우정, 갈등이라는 전형적인 하이틴 드라마의 외피를 썼지만
‘청소년을 위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드라마’라는 제작 의도에서 엿볼 수 있듯,
이 드라마의 진짜 가치는 자칫 지루할 수 있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을 드라마 속에 잘 녹여냈다는 데 있다.
<네가 빠진 세계>를 소개한다.
처음 이 드라마를 기획할 때부터 ‘이 드라마가 디지털 세상의 문제점을 보여주기만 하는 드라마가 되지는 않기’를 바라고 다짐했다. 디지털 세상의 말들이 누군가를 찌르는 비수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처를 보듬어주는 손이 될 수도 있다 말하고 싶었다.
(다음 글은 <네가 빠진 세계>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범한 고등학생인 내가 소설 속 공주가 됐다?’, ‘평소 즐겨 읽던 무협지 주인공에 빙의됐다?’와 같은 설정들은 애써 찾지 않아도 다양한 웹소설, 웹툰 등에서 손쉽게 발견할 수 있는 설정이다. 이런 비슷한 장르의 웹소설이 너무 유행한 나머지 ‘회빙환’1이라는 말이 하나의 장르가 됐을 정도이다. 드라마 <네가 빠진 세계>는 ‘회빙환’ 중 빙의의 설정을 택했다. 주인공인 ‘유제비’가 평소 좋아하던 순정 로맨스 웹소설 세계 속 악녀 캐릭터에 빙의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양한 매력의 남자 주인공들(무려 하빛고 사대천왕!)과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한 무리가 등장하고, 그들의 악행을 극복하고 남주와의 사랑은 물론 자신의 꿈까지 이뤄내는 풋풋한 순정 학원물. 이 전형적인 웹소설 세계 속에 빠진 제비는 시청자들이 학원물에 기대하는 바를 충실히 보여준다. 다만 우리 제작진은 이 이야기 속에 우리만의 작은 변주를 주었다. 평범한 내가 특별한 세계로 들어가는 일반적인 설정 대신, 특별한 내가 평범한 이가 될 수 있도록 말이다.
1) [편집자 주] 회빙환: 회귀, 빙의, 환생의 앞 글자를 합쳐 부른 말. 회귀물, 빙의물, 환생물이란 소재가 웹소설의 기본 공식이 될 정도로 너무나 유행하여 장르소설 작가와 커뮤니티 등지에서 흔히 쓰이게 된 용어다. *출처: 나무위키.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드라마
<네가 빠진 세계>의 주인공 유제비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법한 최정상 솔로 아이돌이다. ‘열다섯에 오디션 프로그램 1위로 연예계에 데뷔해 열여덟에 이미 톱스타의 반열에 오른 모태 아이돌’. 제비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이다. 그런 제비가 평소 좋아하던 로맨스 웹소설 ‘조용히 살고 싶은 나에게 어느 날 사대천왕이 다가왔다!’ 속 악녀 캐릭터로 빙의하게 되면서 드라마 속 이야기는 시작된다. 현생에선 최정상 아이돌이었던 제비는 소설 속 세계에선 평범한 여고생이 된다. 보통의 빙의물에서 평범한 주인공이 특별한 설정의 인물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네가 빠진 세계> 속 유제비는 그 반대의 설정에 빠진 것이다. 물론 ‘악녀’ 캐릭터로 빙의한 탓에 남자 주인공의 미움을 받긴 하지만, 제비는 평범한 고등학생이 됐다는 사실에 더 기뻐한다. 주변인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자기 행동을 제약하는 대신 평소 하고 싶었던 일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숨겨야만 했던 자신만의 생각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제비가 빙의하면서부터 달라진 악녀 캐릭터의 행보에 소설 속 캐릭터들에게도 변화가 찾아온다. 이는 아이돌로서 제비 캐릭터가 가지는 특별함은 가져가되, 그런 제비가 평범한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되어 겪는 상황 역시 보여주며 시청자들이 보다 깊이 이입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세운 설정이다.
<네가 빠진 세계>는 처음 기획부터 ‘청소년을 위한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 드라마’를 지향했다. 현생에선 유명 아이돌, 소설 속에선 평범한 고등학생이 될 수 있었던 ‘유제비’ 캐릭터는 우리의 이런 기획 의도에 그림처럼 들어맞는 인물이었다. 첫 번째 이유는 아이돌이기에 견뎌야 하는 디지털 세상의 날선 말과 거짓 소문, 괴로운 합성 사진이나 영상 등과 같은 주제를 극적으로 다룰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그런 이야기를 평범한 10대의 세계 속에서 펼쳐 나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고등학교인 하빛고에서도 디지털 세상과 관련된 다양한 문제가 일어난다. 학내 인기 있는 친구들을 향한 가짜뉴스가 퍼지기도 하고, SNS를 이용한 스토킹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문제와 마주한 제비는 아이돌이었던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대입해 친구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한다.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걔들한테 변명할 필욘 없어. 그 대신, 저번에도 말했지? 애들이 괴롭히면 꼭, 싫다고, 하지 말라고 말하라고. 네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은 네가 어떤 마음인지, 얼마나 힘든지… 절대 몰라.”
“옛날에… 내가 진짜 유명했던 적이 있거든? 사람들이 내 사진 보면서 사진발이다, 실제론 못생겼다, 별 말을 다 하는데 처음에는 기분도 나쁘고 화도 나고… 진짜 속상하더라. (…) 그러니까 내 말은! 애들이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니니까 너무 상처 받지 말라구. (…) 남들이 보는 네가 아니라, 네가 아는 네 모습이 진짜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 말에 휘둘려서 네 진짜 모습을 잊지마! 난… 그걸 잘 못 했지만….”
어려움을 겪고 있는 친구들을 향한 제비의 이런 대사는 유명인이었던 자신의 경험을 되살려 진심을 전한, 오직 제비만이 할 수 있는 대사였다. 선생님이 할 법한 교훈적인 이야기도 제비의 입을 통하면 그녀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실된 이야기가 됐다. 시청자를 가르친다는 느낌이 들지 않게 교육적인 주제 의식을 전달하는 것이 제작진의 목표였기 때문에, 우리가 제비라는 캐릭터를 만난 것은 운명이었다고 생각한다. 제비가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자신의 지혜로 힘을 주고, 또 그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소설 밖 세계로 돌아왔을 때 현실을 살아낼 힘을 얻는다는 드라마의 전체 설계 역시 제비라는 캐릭터의 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표현할 수 있는 용기
처음 이 드라마를 기획할 때부터 ‘이 드라마가 디지털 세상의 문제점을 보여주기만 하는 드라마가 되지는 않기’를 바라고 다짐했다. 디지털 세상의 말들이 누군가를 찌르는 비수가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처를 보듬어주는 손이 될 수도 있다 말하고 싶었다. 보다 딱딱하게 말하자면 디지털로 가득 찬 세상의 폐해와 각종 문제점에 대해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어차피 아무리 ‘디지털 디톡스’를 시도한다 해도 결국엔 각종 SNS와 인터넷 세상에서 벗어나서 살 수는 없고, 결국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은 이런 세상 속에서 그런 문제에 지지 않고 잘 살아가는 방법이다.
이를 위해선 등장인물들이 디지털 세상에 상처받고 괴로워하는 모습뿐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또 세상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활용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 중요했다. 극 초반에 아이돌인 자신을 향한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오해와 억측들로 괴로워하기만 하던 제비는 하빛고 생활 속에서 차츰 성장해 가며 자신이 원하는 것과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된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주변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제비는 더 이상 숨지 않고 사람들 앞에 나서서 이야기하는 것을 택한다.
“단순히 참기만 하는 건 절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 저도 안 좋은 말을 들으면 힘들고 아파요. 속상하고요. 때론 너무 억울해서 화가 나기도 해요. 그래서 이제 말해보려 합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제가 먼저 말 할게요. 그러지 마세요. 저에게 상처주지 마세요. (…) 그러니까 저를 향한, 또 제 친구를 향한 나쁜 이야기들을 그만 멈춰주세요.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제비는 자신의 방에서 편한 차림으로 라이브 방송을 켜고, 위와 같은 이야기를 전한다. 제비의 진솔한 이야기는 대중의 마음에도 파동을 일으킨다. 모두 스마트폰을 켜고 제비의 방송에 반응을 쏟아낸다.
“솔직히 맨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욕먹는 거 진짜 불쌍했음. 먼저 용기 낸 유제비 응원합니다. #TO_ZEVVI”
“나도 유제비 욕한 적 있었는데 그냥 남들이 나쁘다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따라한 거였음. 진심으로 반성합니다. #TO_ZEVVI”
“마녀 사냥 그만. 상처받지 말아요. #TO_ZEVVI”
“누나 노래 너무 좋아요. 노래 계속 해주세요. #TO_ZEVVI”
제비를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은 차츰 디지털 세상의 나쁘고 불쾌한 이야기를 향해 틀렸다 말할 수 있는 용기를 보이고, 서로를 위해 좋은 말을 하자는 분위기로 이어진다. 20부작의 긴 이야기를 거치며 제비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은 알게 된다. 잘못됐다고, 틀렸다고 생각하는 일이 있다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같이 화내주고 싸워주고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디지털 세상 저 멀리 당신을 응원하고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것을 알게 해주는 방법은 오직 표현하는 방법뿐, 말하는 방법뿐이라는 사실을.
디지털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쉽게 악플이나 잘못된 소문을 접하게 된다. 이때 그것이 잘못됐다 생각을 할 순 있지만 그러한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기란 어렵다. 흔한 일이라 여기고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무심코 지나친 어떤 말이 제비를, 또 제비와 비슷한 누군가를, 때론 우리와 아주 가까운 누군가를 분명히 괴롭게 만든다. 그러니 ‘옳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선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는 이야기를 더 많이 퍼트리는 것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필요하다.’ 제작진은 제비의 이야기가 그렇게 들리기를 바랐다.
청춘의 힘으로 돌파하라
디지털 세상과 관련된 긴 이야기를 썼지만 <네가 빠진 세계>는 나에게 가슴 찡한 로맨스 드라마이기도 하다. 여기엔 두 개의 세계를 오갈 수밖에 없는 운명 앞에 놓인 제비와 수오의 슬픈 사랑 이야기도, 또 발을 동동 구르며 보게 만드는 가슴 설레는 청춘들의 삼각관계도 있다. 무엇보다 하이틴 로맨스는 손발 오그라들게 만드는 10대들의 거침없는 로맨스 대사가 매력일 테니,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귀여운 명대사도 있다. 우리 인물들이 단순히 드라마의 교육용 주제를 전달하는 도구로 그치지 않고 이들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과정을 보는 이들도 응원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며 다시 본 <네가 빠진 세계> 속 제비, 수오, 진우, 한세, 다미, 운현이는 여전히 청춘이었다. 큰 감정의 폭에 몸을 맡기고, 별거 아닌 것 같은 일에도 많이 눈물 흘리고 그보다 더 많이 웃으며 자신의 앞에 놓인 문제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헤쳐 나간다. 그런 인물들의 계산 없는 용감함이 화면 밖으로도 전달되길 바랐다. 보는 이들이 남의 이야기가 아닌 자신의 이야기라고 느낄 수 있는, 일상에서 쉽게 겪을 수 있는 디지털 세상의 문제들을 회피하는 대신 청춘처럼 돌파해나갈 수 있는, 이 드라마를 본 한 명이라도 그런 마음의 힘을 얻을 수 있기를. 제작자이지만 한 명의 시청자로서 제비를 응원하는 댓글을 남기며, 그런 생각을 했다.
본 원고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정부광고 수수료를 지원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통해 확인해주세요. ↓↓
'포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을 바꾸는 데이터’ 바로 읽기 (0) | 2023.05.19 |
---|---|
‘안전한 온라인 세상’ 어른이 만들어 주세요 (0) | 2023.05.04 |
국내 최초 미디어교육사 206명 탄생 (0) | 2023.04.13 |
미디어를 통한 지속가능한 성장을 꿈꾸다 (0) | 2022.10.31 |
허위정보, 혐오 표현 규제와 표현의 자유 보장 (0) | 2022.10.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