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읽기와 친해지기 위한 첫걸음, 호기심

2012. 9. 6. 09:19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토요일 늦은 아침. ‘TV를 틀까, 아침 신문을 읽을까’하는 순간의 머뭇거림 속에서 토요일 아침자 신문을 집어 들었다. 아침부터 뇌를 TV속에 맡기기보다는 세상일을 조금 더 주체적으로 읽고 싶었다. 거창한 이야기 같지만, 그저 시간을 조금 더 두고 세상사를 조금 더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활자와 가까운 편은 결코 아니었다. 고등학교 때, 가장 부러웠던 친구들 중 한 부류는 신문의 논조를 파악하고 기사가 편향되었다느니, 팩트(fact)가 잘못되었다느니 불평하던 애들이었다. 비판이 가능하다는 것은 이미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고, 그 사안에 대해 자신만의 판단이 서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는 사안에 대해 비판까지 하고 있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 가서도 신문읽기는 습관이 되지 못했다. 믿거나 말거나 대학 3년을 다니면서도 몸에 익지 않았던 신문읽기가 대학 마지막 학기에 수강했던 ‘저널리즘 비평’ 수업 이후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갔다. 언젠가 학습에 있어서 ‘적절한 코칭(coaching)’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학생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한다 하더라도 선생님이 ‘이건 이렇게 풀어보는 게 어떨까, ○○는 왜 그렇게 생각했니’하면서 때로는 맞장구 쳐주고, 때로는 야단치며 함께 공부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이다. 






나에게는 저널리즘 비평 수업이 그랬다. 여덟 분의 현직 기자들이 ‘내가 지키는 글쓰기 원칙’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하셨다. 대부분이 수년간의 기자생활 뒤 논설위원의 자리에 있는 분들이었다. 특강이 시작하기 전, ‘몇십 년간 한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은 일에 있어서 자신만의 철학이 있기 마련’이라는 이재경 교수님의 소개말에 염(念)했고, 과연 그분들의 철학에 동(動)했다.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오병상 중앙일보 수석 논설위원이었다. 많은 기자분들이 ‘내가 쓰는 글쓰기 원칙’에 대한 주제를 논할 때,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리드는 어떻게 쓰는 것이고, 스트레이트 기사와 내러티브 기사의 구성은 어떻게 하며, 취재원의 결정은 어떻다는 등. 하지만 그는 ‘어떻게 쓸 것인가’보다는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인권, 민주주의, 법과 제도’라는 세 가지 원칙을 가지고 글을 쓴다고 했다. 이 사안이 누군가의 인권을 침해하는 일이라면 그는 글을 써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기사를 썼다. 이것이 민주주의나 그 민주주의를 지탱해주는 합의된 법과 제도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또한 기사로 알렸다. 



오태진 조선일보 논설위원 특강 중 한 컷




‘기자 분석’이라는 과제로 특강 후 그와 따로 인터뷰를 할 기회도 있었다. 기자는 그가 쓴 기사로 말하기 때문에 최근 5년간 그가 쓴 사설을 읽고 분석해서 갔다. 분석을 해보니 과연 그의 글 또한 민주주의와 법과 제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007년부터 2012년까지의 글 56편을 분석한 결과, ‘민주’라는 단어가 직접적으로 나온 글만 17편이었다. ‘책임’, ‘견제와 균형’, ‘독립’, ‘양심’이라는 단어들이 뒤따랐다.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라는 물음에 ‘소신’이라는 답을 금방 주었던 그는, 인생의 향방에 대해 묻는 내게 자신의 경험을 스스럼없이 들려주었다. 네 시간 가량 묻고 답하고를 반복하다, 그는 웃으며 ‘성공하면 연락해’라는 인사말을 던져주고 떠났다. 


그러니 수요일 격주로 나오는 오병상 논설위원의 중앙시평은 안 챙겨보려야 안 챙겨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쓴 중앙시평뿐만이 아니다. ‘저널리즘 비평’ 수업을 들으며 만난 기자들로부터 생생한 동기부여를 받았고, 그들이 ‘함께 사는 사회’(실제로 이 말은 특강을 해주신 한국일보 임철순 주필이 만들어 기사화했던 표현이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를 위해 펜을 잡고, 타자를 쳐서 쓴 기사가 너무나도 궁금해졌다. 오늘 우리의 주변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우리의 삶 속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오늘도 신문을 넘기며 생각한다. 역시 문제는 호기심이다. 그 호기심에 불을 지펴준, 이번 특강을 마련해주신 교수님과 여러 기자분들, 그리고 한국언론진흥재단에 감사함을 전한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2012년 1학기 대학 신문읽기 강좌 후기 공모전> 수상작 중 대상 하세린 님의 '문제는 호기심이다'를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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