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에 살았던 유명인들을 한 권의 책에서 만난다면?!

2013. 10. 22. 14:25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서태지, 유재석, 장동건이 동갑내기라는 것, 다들 알고 계셨나요? 한때 동갑내기 연예인이 누구누구라는 사실이 방송과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전혀 동시대 인물이 아닐 것 같은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자라고 활동해 왔다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놀라움을 산 것 같은데요. 이를테면 설운도가 장국영보다 두 살 더 어리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죠.


이런 비유가 적절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지난 주 나온 <1913년 세기의 여름>(문학동네)을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이 책에는 프란츠 카프카, 파블로 피카소, 지그문트 프로이트에서부터 찰리 채플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이르기까지 현대 유럽의 지성사와 문화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300여 명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저자는 1913년 당시 이 인물들의 행적을 치밀하게 조사해 드라마틱하게 엮어냅니다.




▲ 1913년 세기의 여름

플로리안 일리스 지음·한경희 옮김 | 문학동네 | 396쪽  [출처 - 교보문고]



허름한 차림의 한 러시아인이 오스트리아 빈 북부역에 도착한다. 서른넷의 이 남자는 덥수룩한 콧수염에 머리도 감지 못한 채 절룩거렸다. 그가 지닌 위조 여권에 따르면 이름은 스타브로스 파파도풀로스. 1913년 1월 빈에 도착한 그는 그 가명을 버리고 말했다. “내 이름은 이오시프 스탈린이다.” 그는 비밀 은신처에서 레닌의 지시로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를 쓰고 있었다. 스탈린은 쇤브룬 궁전 공원을 자주 산책했다. 그때 다른 한 남자도 그 공원을 좋아했다. 스물세 살의 실패한 화가였다. 미술아카데미 입학을 거절당하고 500명이 우글거리는 남성쉼터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침대, 옷걸이, 거울 하나가 있는 작은 방이 전부였다. 그림을 고물상에게 헐값으로 팔아 생활하는 그는 하루 종일 조용했지만 정치토론만 벌어지면 흥분했다. 이름은 아돌프 히틀러. 1913년 1월의 어느 오후 빈에서는 20세기를 극단의 시기로 물들인 두 사람이 공원에서 조우했을지도 모른다. (…)


[경향신문 2013-10-19]드라마처럼 구성한 ‘100년 전’…인류사에 족적을 남긴 300여명의 행적



그 중에서도 20세기의 가장 지독한 폭군 혹은 독재자로 꼽히는 젊은 날의 스탈린과 히틀러가 한 번쯤 마주칠 수 있었던 사이라는 건 상상력을 자극하기엔 충분한 소재였습니다. 실제 그들은 공원에서 한 번쯤 눈인사를 주고받았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분명히 이 소재를 가지고 소설이나 영화를 만들어낼 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런 우연적 만남의 가능성이나, 동시대에 이런이런 인물이 살았다는 단순한 나열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닐 것입니다. 1913년은 19세기와 20세기의 분기점이었고, 우리가 사는 ‘현대’를 만들어낸 해라는 것입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행적에서 우리는 어렴풋이 그걸 눈치 채게 됩니다. 특히 저는 오늘날 현대사회의 음울한 모습이 1913년에서 비롯된 것 같아 흠칫함이 드는 부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내와 네 자녀를 죽이고 무고한 시민들에게 권총을 쏴 12명을 죽인 에른스트 아우구스트 바그너의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해가 1913년이었습니다. 포드 자동차가 최초의 벨트 컨베이어 생산체제를 갖춘 것도 같은 해이고요. “날로 사람이 부속품화 돼 간다”는 느낌은 아마 이때부터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1913년 세기의 여름>이 ‘현대’의 탄생을 다뤘다면, ‘근대’의 출발점을 되짚어본 책도 있습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까치)라는 책입니다. 


 


▲1417년, 근대의 탄생

스티븐 그린블랫 지음·이혜원 옮김 | 까치 | 400쪽 [출처 - 교보문고]



1417년 겨울, 말을 타고 독일 남부를 달리던 서른일곱 살 포조 브라촐리니의 심경은 복잡했을 것이다. 그가 비서로 일하며 모시던 교황 요한네스 23세는 콘스탄츠공의회에서 권력 투쟁 끝에 쫓겨났다. 포조 또한 졸지에 마땅히 기댈 곳도 없는 처지로 떨어진 셈이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거나 이탈리아로 돌아가지 않고 독일 남부의 수도원을 헤매고 다녔다. ‘책 사냥꾼’으로서의 본능 때문이었다. 그는 잃어버린 고대 문헌을 찾아내는 것으로 유명한 인문주의자이자 책을 베끼는 필사가였다. 그 시절 그가 오래된 수도원 서가에서 뽑아든 필사본 한 권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 책은 바로 고대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 서사시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였다. 저자는 1000년 동안 잠들어 있던 이 책이 포조를 통해 세상에 전해짐으로써 르네상스가 싹트고 중세가 해체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


[경향신문 2013-05-18]이 남자가 발견한 한 권의 불온한 책이 근대를 열었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도대체 무슨 내용이었길래 그랬을까요? 이 책의 핵심은 바로 ‘원자론’입니다. 지금은 원자론이라고 하면 중학교 과학 시간에 다 떼겠지만 그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물은 꽉 짜인 질서나 계획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입자들의 일탈과 불규칙적인 충돌의 결과로 탄생하므로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는 주장은 신 중심의 중세 체제를 위협할 만큼 불온한 주장이었죠. 그래서 원자론은 ‘위험한 생각’과 연결되는 하나의 가교 역할을 했는데요. 이후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 빈치뿐만 아니라 몽테뉴, 갈릴레오, 프로이트, 다윈, 뉴턴, 아인슈타인도 이 책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네요. 책 한 권으로 근대의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근대와 현대의 탄생을 다룬 두 책을 살펴보면서 재미있었던 점은 ‘우연’이야말로 역사를 움직이는 한 축이었다는 것입니다. 루크레티우스 또한 ‘일탈’이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결정적 요소라고 했는데요. 그의 책이 세상에 드러나 영향을 미친 과정을 봐도 알 수 있지요. <1913년 세기의 여름>에 소개된 루이 암스트롱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암스트롱은 열두 살 때인 1913년 1월1일 0시, 새해가 시작되자마자 길거리에서 함부로 권총을 쏘다 경찰에 체포됩니다. 소년원에 갇히게 된 그는 우연히 보호관찰관 피터 데이비스를 만나게 되는데요. 소년원에서도 날뛰는 암스트롱을 보다 못한 그가 트럼펫을 쥐어주게 되지요. 암스트롱이 우연히 데이비스를 만나지 않았다면, 역사상 가장 위대한 트럼펫 연주는 탄생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걸 보면 길거리에서 우연히 스친 사람, 받아든 광고전단 하나도 무심코 넘기지 못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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