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24. 13: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아침 출근길에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기기로 영화를 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퇴근길에는 친구나 연인과 극장을 찾아 영화를 볼 수도 있죠. 그만큼 영화는 이제 생활 속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문화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만나는 영화에는 감독의 숨은 생각과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시대의 아픔을 반영하기도 하고 사람이 생활하면서 계속 만나는 경제, 문화에 관련된 내용도 있죠. 그래서 오늘은 영화를 통해 시대의 사회상을 만날 수 있는 신문기사 한 편을 소개해 드릴까 해요. 바로 경향신문에서 연재되고 있는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인데요,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즐거움을 함께 느껴볼까요?
가족애를 통해 문화대혁명을 그린 ‘5일의 마중’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의 <5일의 마중>은 한 가족의 이야기입니다. 한 줄로 축약해보자면, 문화대혁명이 파괴한 한 가족의 정상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네요. 영화는 문화대혁명의 절정기에서 시작합니다. 아버지인 루옌스는 이미 15년째 수감 생활 중이죠. 그런데, 어느 날 남아 있던 가족 엄마 펑안위와 딸 단단이 소환됩니다. 아버지 루옌스가 탈출했으니 혹시라도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신고를 해야 한다고 말이지요. 반동분자를 은닉하는 것 자체가 죄라는 엄포도 곁들입니다.
마침내, 아버지가 어둠 속에 지붕을 타고 넘어 가까스로 문 앞에 도착합니다. 하지만 이미 집 주변은 감시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상태, 남편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리지만 아내는 두려움에 떨며 망설일 뿐인데요. 때마침, 무용단 연습을 마친 딸아이도 귀가를 합니다. 딸은 반동분자 아버지 때문에 선전극의 주연을 놓쳐 울분이 솟은 상태이죠. 어머니가 머뭇대는 동안 루옌스는 딸과 마주치고 아버지는 딸에게 소식을 전하려 하지만 딸은 고개를 젓습니다. 결국, 루옌스는 아무 종이나 찢어, 쪽지를 문틈 아래로 밀어 놓고 황급히 집을 떠납니다.
다음날, 남편을 만나기 위해 음식과 옷가지를 준비해 약속 장소로 가지만 그만 두 사람 모두 붙잡히고 맙니다. 무심한 3년의 세월이 지나 지독한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잦아들고, 아버지 루옌스는 석방돼 집으로 돌아오게 되죠.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남편이 집에 돌아왔지만, 아내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데요. 문을 열어주지 못한 미안함, 자신 때문에 남편이 잡혔다는 자책감 그리고 딸아이가 아버지를 밀고했다는 괴로움 때문에 심인성 기억장애를 갖게 된 것이죠.
말하자면, <5일의 마중>은 한 여인의 부서진 정신과 그것을 복구하기 위해 애쓰는 가족애를 통해 문화대혁명의 야만성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런데,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자기 탓이라며 서로에게 잘못을 고하죠. 아내는 자신이 망설였기 때문에 남편이 붙잡혔다며 미안해하고, 남편은 애초에 자신이 반동분자로 낙인찍힌 게 다 원인이라고 아내를 위안합니다. 사실은 아버지를 밀고한 자가 자신이었다고 딸이 고백하자, 아버지는 이미 다 알고 있었다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며 토닥거립니다. 루옌스의 가족 그 누구도 당, 중국, 사회를 원망하지 않습니다.
관객들은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잘못은 그들 가족의 구성원 각자가 아니라 문화대혁명이라는 시대, 사회에 있다는 것을 말이죠. 등장인물들이 내 잘못이라고 말할 때마다 오히려 사회가 치러야 하는 죗값은 더욱 커지는데요. 아름다웠던 한 가족의 정상성을 망친 것, 그것은 아버지의 부도덕도, 어머니의 부정도, 자식의 패륜도 아닌 폭력적이었던 시대였음이 선명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시대와 사회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중국은 더 냉정하게 비판받습니다. 이 가족의 고난은 모두 사회 탓으로 빚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감성을 담아 전달하는 영화의 수사학
<5일의 마중>은 그런 점에서 <제보자>나 <변호인> <도가니> 같은 최근 한국 영화의 직설법을 떠오르게 합니다. <5일의 마중>이 시대의 폭력을 환기하는 방식이 최근 한국 영화들의 고발 문법과는 완전히 대조적이기 때문인데요. <5일의 마중>이 감동을 준다면 <제보자>는 울분을 자아내죠. 여기엔, 내 탓이라고 말하는 인물들과 당신의 잘못을 밝혀내는 어법의 차이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차별성은 바로 시간의 거리에 있습니다. 장이머우가 40여년 전에 일어난 문화대혁명을 그려내고 있다면 우리 영화들은 고작 10년이나 20년 안팎의 사건들을 다루고 있죠. 그리고 무엇보다, 문화대혁명이 과거완료의 시제 즉, 이미 역사적으로 가치 평가가 이뤄진, 청산된 과거로 여겨지는 데 비해, 최근의 한국 영화 속 사건들은 심리적 현재 진행형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아직 이 사건들이 끝나지 않은 일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객관적 거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1999년, 이창동 감독이 <박하사탕>에서 ‘나 돌아갈래’를 외치며, 과거를 소환할 때엔, 그래도 그 폭력적 과거가 꽤 먼 곳에 놓여 있다고 믿었고, 느꼈었습니다. 1980년대를 주변에서 겪었던 주인공을 내세울 수 있었던 것도 이 심리적 거리감과 관련되는데요. 향수와 반성의 수사학은 이 심리적 거리 위에 세워진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80년대 문학이 고발의 문학이었고, 1980년대 영화가 선전의 형식을 선택했을 때, 그땐 문화예술적 주체들에게 폭력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였습니다. 자책의 수사학으로 역설하기에는 지독히도 시급한 현재의 문제였기에 수사는 유보되었고 선언이 우선시되었죠. 1990년대 새롭게 등장한 감성의 언어와 수사학은 그래도 1980년대의 터널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의 반영이었습니다. 이 심리적 거리와 안도감 속에서 1990년대 문화의 자율성은 확보되었는데요. 그래도 마음껏 감성을 누려도 될 것이라는, 상호 간의 안도가 형성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2014년 현재, 상업영화의 문법 안에서도 우리는 고발을 선택합니다. 아니 선택해야만 한다고 여기고 있죠. <5일의 마중>처럼 내 탓이라는 반어적 윤리학을 보여줄 심리적 거리도, <박하사탕>처럼 중간적 인간형을 두고 객관화할 만한 여유도 우리에게 없는 듯 보입니다. 지금, 너무도 시급한 문제가, 바로 우리 눈앞에 있으며, 영화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모두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이 직설법과 고발의 문체에서는 절박했던 1980년대의 흔적이 있습니다. 상황이 달라졌고, 더 나아졌다고들 하지만 우리의 심리적 현재는 여전히 1980년대입니다. 돌려 말하고, 거꾸로 말하기에는 직설법으로 고발하고, 투명하게 밝혀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은데요. 수사학은 진실이나 정의와 같은 거대 담론을 잠시 내버려둬도 좋을 때, 그 시간의 거리를 두고 출현할 수 있습니다. 수사학을 할 수 없는 시대, <5일의 마중>을 보며, 그 반어적 수사학이 부러워지는 까닭입니다.
ⓒ 다독다독
위 내용은 경향신문에 연재 중인 강유정 영화평론가,강남대 교수의
[강유정의 영화로 세상읽기] 수사학이 불가능한 시대 기사를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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