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6. 5. 09: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4년 8월호>에 실린 국민일보 디지털 뉴스센터 문화부 팀장 / 한승주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유럽에서 인터넷상의 ‘잊혀질 권리’를 인정하는 판결이 나오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시효가 지났거나 부적절한 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구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 그러나 이 권리가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라는 반대 입장도 만만치 않습니다. ‘잊혀질 권리’와 함께 ‘알 권리’ ‘기억할 권리’도 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잊혀질 권리’ 법제화를 위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됐습니다. 유럽 재판부터 찬반 논란, 한국에서의 법제화 가능성 등을 짚어봤습니다.
‘잊혀질 권리’ 세기의 판결
스페인 변호사 코스테하 곤살레스는 2010년 구글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1998년 빚때문에 자신의 집을 강제 경매한다는 일간지 기사가 아직도 검색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까마득히 옛날 일이고, 지금은 완전히 해결된 문제가 구글에 검색되자 그는 자신의 명예가 실추되고 있다며 구글에 기사 삭제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거절당했고 이 사건은 결국 유럽사법재판소까지 가게 됐습니다. 재판소는 곤살레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구글에 해당 기사로 연결되는 링크를 삭제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 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됐습니다.
‘잊혀질 권리’. 명확한 정의는 없지만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자신에 대한 정보 가운데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기억되고 싶지 않은 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잊혀질 권리’에 대한 판결은 무조건 환영할 만한 것일까요. 문제점은 없을까요. 한국에서도 법제화돼 현실화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유럽사 법재판소의 판결에 대한 찬반은 팽팽했습니다. 개인정보 보호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표현의 자유를 포기했다는 평가로 엇갈렸습니다.
밀려드는 삭제 요청
구글은 이 판결을 반영해 자사 사이트에 ‘잘못됐거나 부적절하거나 오랜 시간이 흘러 유효하지 않게 된 개인정보’에 대해 삭제를 요청하는 코너를 만들었습니다. 유럽에서만 접수 나흘 만에 4만 1,000건이 신청됐습니다. 그동안 이용자들이 얼마나 삭제 욕구가 강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 반대하는 논리는 이렇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사적 검열의 문이 열린 것이다. 정치인이나 무언가를 숨기려는 사람에 의해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미국 컴퓨터·커뮤니케이션산업협회)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해석된 잊혀질 권리는 결국 동료들이 이미 적법하게 알고 있던 진실을 국가의 힘을 빌려 동료들의 기억으로부터 삭제하겠다는 시도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판결의 진원지인 유럽은 그후 어떻게 됐을까요. 가디언, 파이낸셜타임스 등 영국 언론들은 구글이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정보 삭제에 적극 나서면서 사용자의 알 권리를 해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개인의 잊혀질 권리와 언론의 공적 보도가 맞부딪치는 상황이 늘어나고 있으며, 정보 세탁의 논란까지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일부 삭제 요청 건은 딱 부러지지만 상당수는 모호한 영역에 있으며, 어떤 기사가 공익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이제 구글의 몫이 돼 버렸습니다.
구글은 7월 초까지 모두 7만 건의 삭제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속도는 줄어들긴했지만 요즘도 하루 1,000건의 삭제 요청이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국가별로는 프랑스가 1만 4,000건으로 가장 많고 이어 독일(1만 2,000건), 영국(8,500건) 등의 순서입니다. 삭제되는 링크는 요청 1건당 평균 3.8개이며 총계로는 25만 건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이 중에 부유층과 권력자의 치부를 숨기기 위한 정보 세탁 요청도 제법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무책임한 투자로 세계 금융위기를 촉발한 스탠 오닐전 메릴린치 최고경영자(CEO)를 비판한 경제담당 부장의 2007년 블로그 링크가 이번 판결 이후 차단됐습니다.
영국 언론들은 구글이 어떤 사유로, 누구의 요청을 받아 삭제했는지 공개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정보 검열이며 언론 자유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구글이 오판을 해 중요한 정보들이 인터넷에서 사라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적지 않습니다. 팩트를 찾으려면 이제 구글의 비유럽판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등 부작용이 적지않습니다.
우리나라 법제화 가능성
네이버, 다음, 네이트 등은 게시글에 대한 삭제 요청을 받으면 한 달동안 해당 글을 온라인에서 가려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 기간에 게시자가 글을 삭제합니다. 당사자 A가 어떤 글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손만 들면’ 조치를 해주게 돼 있는 것입니다. 만약 B가 A가 요구한 삭제가 정당하지 않다고 문제를 제기할 경우 이 사안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A가 공인이라면 문제가 달라집니다. 공공의 알권리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해당 게시글이 명백하게 허위로 소명되지 않는 한 처리를 제한합니다. 공인 A는 이 경우 인터넷자율정책기구에 심의를 요청할수 있습니다.
잊혀질 권리가 있다면 기억할 권리, 알 권리도 있습니다. 잊혀질 권리를 요구하는 당사자의 반대 입장에 있는 건 구글이 아니라, 다른 구글 이용자라는 것입니다. 잊혀질 권리의 범위와 처리 방법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공공의 이익이 우선시 되어야 할 사안은 어디까지일까요? 현재 인터넷자율정책기구는 공인이라는 기준을 중요하게 봅니다. 하지만 때로는 평범한 민간인의 경우에도 공공의알 권리가 더 가치 있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신중한 접근 필요
정치인의 병역비리는 공인이라서 알 권리에 해당되고 연예인은 법적으로 공인이 아니라서 상관없는 것일까요?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면 잊혀도 되는걸까요? 기준이 불명확합니다. 이해가 상충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잊혀질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될까요. 잊혀질 권리 판결에 대해 가장 반색하는 것은 정치인이라는 얘기가 들립니다. 지방선거를 앞둔 후보자 A가 예전의 부적절한 언행이 담긴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모두 삭제해 달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일까요? 제도적으로 악용될 소지를 없애도록 민감한 법조항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한국인터넷진흥원 백수원 박사의 제안이 눈에 띕니다. 잊혀질 권리를 제도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선 원천적으로 사생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정 기간이 지난 자료에 관해서는 자동적으로 별도의 보관함을 통해 검색되도록 하는 방식을 도입하자는 것입니다. 사용자가 글이나 사진을 인터넷에 올릴 때 타이머로 특정시점을 설정해놓으면 해당 시점이 될 때 글이나 사진이 시한폭탄처럼 소멸하며, 자기 계정뿐 아니라 다른 계정으로 퍼진 자료도 함께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타인이 올린 글에 대한 삭제에 관해서는 이 시스템 도입을 통해 해결하기는 어렵습니다. 백 박사는 이 때문에 모든 자료에 관해 기간별로 관리하는 방식의 도입이 기술적으로 가능한지 검토해야 한다고 부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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