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는 『플레이보이』 출신 : 유명 작가를 품은 야한잡지 이야기

2015. 6. 4. 08:58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시골 고모 댁에서 봤던 『TV 가이드』


잡지를 처음 접한 것은 ‘국딩’ 시절이었을 겁니다(그 당시에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습니다). 여름방학 때 가끔 속리산 자락에 있는 고모님 댁에 놀러 가곤 했습니다. 말린 담배 잎을 담은 포대자루가 벽면에 가득 쌓여 있어서 한여름에도 모기 한 마리 얼씬하지 않던 조그만 사랑방에 십대 사촌 누나들이 보던 작은 책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죠. 『TV가이드』였습니다. 드라마나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뿐만 아니라 연예인 소식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재미난 잡지였죠. 뒤쪽에는 펜팔 코너도 만들어 놨습니다. 젊은 남녀들이 자신의 나이, 취향, 주소 등을 공개해 놓고 친구 요청을 기다리는 ‘만남의 광장’ 같은 곳이었죠.


출처_서울신문


이발소에 ‘천사’를 만나게 될 줄이야…


중학교에 들어가니 학교 방침에 따라 억지로 ‘스포츠머리’를 해야 했습니다. 주말 오후에 이발소에 가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잡지를 ‘보았습니다’. ‘보았다’고 말한 건 그 잡지가 저에겐 ‘읽는’ 잡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선데이서울』 등의 성인잡지를 처음 접한 건 그 때였을 겁니다. 잡지의 중간쯤엔 ‘천사’가 고이 접혀 있었죠(“My angel is the centerfold”라는 팝송 가사도 있죠. 잡지 중간에 몇 단으로 접혀 있는 커다란 사진이 ‘센터폴드’입니다). 한쪽 팔을 활짝 펴야 할 만큼 천사의 사진은 컸습니다. 커서 좋긴 했으나 공개된 자리에선 마음껏 보기 불편하다는 게 흠이었습니다. 그 천사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짧게 느껴졌습니다. 최소한 저에게 이발소 사장님의 마케팅은 성공적이었던 셈입니다.


역시 ‘미제’는 다르다는 송강호의 대사에 공감


플레이보이(Playboy)펜트하우스(Penthouse)같이 이름만 알던 잡지를 스무 살이 넘어 군대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경기 북서부의 미군부대에서 근무하던 어느 금요일 저녁, 일을 마치고 제 또래의 장난기 많은 흑인 친구의 방에서 라면을 맛있게 끓어준 적이 있습니다. 박봉의 한국 군인에게는 호사스런 라면이었습니다. 참치와 냉동 만두 그리고 계란이 들어갔으니까요. 정말 잘 먹더군요. 그가 답례로 만들어 준 주스 섞은 럼주도 곁들였습니다. 술이 약한 탓에 금세 취기가 돌았습니다. 이리저리 방을 구경하다가 구석에서 컬러잡지 특유의 은은한 종이냄새를 풍기며 애타게 주인을 찾는 커버 걸’(cover girl, 잡지의 표지모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북한군 경비병 역할을 했던 송강호가 남한 병사가 건넨 성인잡지를 가리키며 했던 말은 옳았습니다. ‘미제는 다르더군요. 그 친구에겐 이미 시들시들해진 잡지를 한 아름 안고 제 방으로 왔습니다. 며칠 동안 참 즐거운 시간을 보냈죠.


미셸 맥루언, 출처_위키피디아


‘플레이보이 인터뷰’를 수업시간에 읽다


대학원에 다니면서도 『플레이보이』를 봤다고 해서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여체를 탐닉하는 남성들의 도색잡지로만 아는 그 잡지에는 ‘난잡한 볼거리’만 있는 게 아니라 ‘고상한 읽을거리’도 있습니다. ‘지구촌(global village)’라는 말을 유행시킨 주인공이자 1964년 출간된 『미디어의 이해(Understanding media)』란 책으로 악평과 찬사를 동시에 받은 스타급 미디어 이론가로 신문방송학과에서 자주 언급되는 마셜 맥루언의 심층 인터뷰가 실린 곳이 『플레이보이』입니다. 휴 헤프너가 1953년 12월 미국 시카고에서 창간한 이 성인잡지를 작가 복거일은 영국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묘사합니다. 『플레이보이』가 겨냥한 시장은 “시골에서의 취미 생활에 관한 기사들이 가득한 전통적 남성 잡지들과 싸구려 도색 잡지들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은 틈새”라고 말이죠. 성인잡지라고 해서 노골적으로 몸을 드러내는 사진으로만 도배하지는 않았다는 겁니다. 그렇고 그런 내용만 있다고 알려진 잡지를 당당하게 집어드는 것은 멘탈 강한 성인 남자에게도 그렇고 그런 일이니까요.


마릴린 먼로가 표지모델로 나온 1953년 플레이보이 창간호, 출처_위키피디아


초대 커버 걸은 마릴린 먼로…드류 배리모어, 패리스 힐튼, 킴 카디시언까지


물론 커버 걸 노릇을 했던 수많은 유명 모델과 배우들이 1950년대부터 현재까지 『플레이보이』를 핑크빛으로 포장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20대 독자들에겐 생소하겠지만 우리나라에 비교적 잘 알려진 배우를 나열해 보죠. 창간호에서 표지와 센터폴드를 장식한 마릴린 먼로를 시작으로 배우 킴 베이싱어, 슈퍼모델 신디 크로퍼드,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손녀 마고 헤밍웨이, 영화 <원초적 본능>의 샤론 스톤, 모델 겸 배우 파멜라 앤더슨과 안나 니콜 스미스, <ET>의 아역배우 출신 드류 배리모어, 휴 헤프너의 두 번째 아내 킴벌리 헤프너, 흑인 슈퍼모델 나오미 캠벨, 드라마 <비벌리 힐즈의 아이들>의 섀넌 도허티, 숱한 스캔들을 뿌렸던 호텔 재벌 힐튼가의 상속녀 패리스 힐튼, 킴 카디시언과 린제이 로한, 영국 출신 모델 케이트 모스 등이 있습니다.


러셀, 슈바이처, 호킹, 잡스도 ‘플레이보이 출신’…하루키 단편도 실려


하지만 이게 다는 아니죠. 『플레이보이』에 나온 인터뷰 대상자 중에는 당대의 지성계를 쥐락펴락하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알베르트 슈바이처, 1964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거부했던 프랑스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샤르트르, 1976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밀턴 프리드먼, 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백 년의 고독』으로 유명한 콜롬비아 출신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11년 췌장암으로 사망한 스티브 잡스,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코스모스』의 저자이자 천문학자인 칼 세이건, 빌 게이츠, 프린스턴 대학의 흑인 최초 철학박사 코넬 웨스트, 200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이기적 유전자』의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등도 ‘플레이보이 출신’(?)입니다. 플레이보이 인터뷰는 “기자가 대상자와 여러 주 동안 함께 지내면서 친숙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눈 기록이라 새겨들을 만한 얘기들이 많이 있었다”는 게 복거일의 독후감입니다. 『플레이보이』는 유명 작가들이 단편을 투고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사람으로는 『노르웨이의 숲』을 쓴 무라카미 하루키가 있죠. 1992년에 『플레이보이』에 실린 「빵가게 재습격(The second bakery attack)」은 하루키 작품의 영어 번역자이자 시카고대학교에서 일본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재이 루빈(Jay Rubin) 교수가 하루키의 제안으로 영어로 번역한 글입니다. 이듬해 『코끼리의 소멸(The elephant vanishes)』이라는 영어판 단편집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스티븐 킹, 출처_위키미디어


단편 하나에 2천 달러…생계에 허덕이던 킹이 욕심낼 만하기도


잡지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작가의 글이 실릴 수 있었던 건 다른 잡지들에 비해 높은 원고료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하루키가 돈을 벌기 위해 그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생계 곤란을 해결하려고 투고를 바랐던 작가도 있었습니다. 스티븐 킹은 창작론에서 『플레이보이』의 후한 원고료를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그를 성공한 작가로 만들어 준 『캐리』의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과정을 소개하며 “그 정도의 아이디어라면 전에도 많이 있었고 더러는 나은 것도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기서 『캐벌리어(Cavalier)』(『플레이보이』 같은 남성잡지)에 실릴 만한 좋은 이야기가 나오겠다고 생각했다. 내심 『플레이보이』에 대한 기대감도 없지 않았다. 『플레이보이』는 단편 하나에 2천 달러를 주었다”고 적어 놓았더군요. 『캐리』가 1974년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단편으로서는 거액이죠. 킹이 영어교사를 하며 받은 연봉이 6,400달러, 세탁소에서 일할 때는 1.6달러의 시급을 받았다고 합니다. 킹이 『캐리』의 계약금으로 받은 돈은 2,500달러였고요. 『플레이보이』를 따라 잡으려는 『펜트하우스』는 더 많은 원고료로 이름 있는 작가들의 글을 잡지에 올렸습니다. 하루키 애호가 임경선 작가가 하루키의 삶에 관해 쓴 책에 보면 「비치 보이스를 통과해서 어른이 된 우리들」이라는 에세이는 1983년 『펜트하우스』 5월호에 실렸다고 합니다.


저물어가는 잡지 산업…『플레이보이』 명성도 이젠 옛말


잡지의 겉과 센터폴드에는 누드 사진을 배치하고 안에는 명성 있는 작가의 글을 품었던 『플레이보이』의 ‘보색 대비’ 전략은 복거일의 말대로 도색잡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조금이나마 막아주고 그런 잡지를 본다는 죄책감을 덜어주는 명분을 제공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적어도 마릴린 먼로나 신디 크로퍼드, 패리스 힐튼이나 킴 카디시언을 구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루키의 단편을 읽고 마르케스, 러셀, 사르트르, 도킨스의 심층 인터뷰를 읽기 위해 이 잡지를 산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인터넷 음란물의 확산과 활자 기피현상으로 잡지가 사양 산업이 된 마당에 이런 변명(?)도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꽃 같았던 모델도, 위대한 지성도 이제는 점점 빛바랜 역사가 되어가니까요. 


<참고자료>

복거일(2006). 『현명하게 세속적인 삶』. 서울: 경덕출판사.

임경선(2007). 『하루키와 노르웨이 숲을 걷다』. 서울: 뜨인돌.

스티븐 킹(2002). 『유혹하는 글쓰기』. 서울: 김영사.

http://en.wikipedia.org/wiki/Playboy 

http://en.wikipedia.org/wiki/Stephen_King 

http://www.toptenz.net/top-10-writers-published-in-playboy.php 

http://www.randomhouse.com/knopf/authors/murakami/desktop_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