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유일한 방송계 여성 저널리스트

2015. 8. 17.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김지자 기자가 녹음기와 마이크를 들고 취재하는 모습. 당시 녹음기는 휴대용이라고 해도 ‘아이스케키 통’으로 불릴 만큼 우람하고 육중했다. / 사진 제공_필자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8월호>에 실린 언론학 박사, 전 광운대 정보콘텐츠대학원장 / 김성호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한국 방송 최초의 여성 기자는 김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동아일보가 설립한 동아방송(DBS)이 1963년 3월 개국에 앞서 모집한 1기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해 1971년 8월까지 8년 남짓 방송기자로 활약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방송 사료에는 김지자보다 2년 여 앞서 공채 시험에 합격한 여성 기자가 2명 보이는데, 그중 한 여성이 1961년 5월 KBS 기자 공채에 합격한 정기자이고, 다른 한 여성은 그해 9월 MBC에 합격한 주옥연입니다. 앞으로 심층적 탐구가 더 이루어져야 하겠지만, 이들이 기자 생활을 한 자취가 없는 점으로 미루어 합격 후에 곧바로 퇴직했거나 혹은 그 기록된 문헌이 오류이거나 둘 중의 하나로 상정됩니다.


김지자는 1941년생으로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던 해 1인 1963년 동아일보가 설립한 동아방송국(DBS) 제1기 방송 견습기자 선발 시험에 52 대 1의 경쟁을 뚫고 합격했습니다. 그 당시 동아 방송국은 개국 두 주 전쯤인 3월 24일 기자 시험을 치렀는데, 총 응모자 420명 가운데 8명을 뽑았습니다. 김지자가 방송기자 생활을 시작한 동아방송 보다 역사가 앞선 방송사로는 국영방송 KBS와 1961년에 개국한 문화방송 MBC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최초 여기자의 자긍심


한국 최초의 여성 기자를 고증하려면 KBS, MBC 양사의 현황을 면밀히 파악하여 논거를 제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KBS는 기자가 국가공무원인 국영방송인지라 정기적인 공채보다는 인원 충원의 필요에 따라 간헐적으로 선발했습니다. 1940년대 말이나 50년대 중반에 공채를 통해 기자를 모집하기도 했으나 여성 기자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1961년 5월에 정부 인사 부처인 내각사무처가 방송 요원을 모집하면서 13명의 기자를 선발했습니다. 그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 기자 한 명이 보이는데, 그 이름이 정기자입니다. 이보다 앞서 발행된 문헌인 ‘주간방송’에도 ‘수험번호 14 정기자(여)’로 가장 먼저 기술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합격하고 4개월 후인 1961년 9월 30일 현재, 재직 방송인들을 기록한 ‘방송인명록’에서는 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공채 시험에는 합격했지만 곧바로 그만둔 것으로 판단됩니다.


다음으로 MBC의 상황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문화방송은 1961년 12월 개국에 앞서 5월에 방송기자를 비롯해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을 공개 채용 시험을 거쳐 선발했습니다. ‘주간방송’에 따르면 기자 직종 합격자 명단에는 수험번호 113 형진한, 155 김용수, 192 주옥연 등 세 명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문화방송 역사서에는 주옥연이 제1기 편성 요원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그해 9월 9일 편성과에 준사원으로 입사하여 그 다음 해인 1962년 10월 13일 퇴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주간방송’이 잘못 기록한 오류로 판단되며, 상대적으로 ‘문화방송 30년사’는 철저한 기록으로 크게 돋보입니다.


‘주간방송’ 41호(1965.7.31.) ‘방송기자석’에 실린 김지자 기자의 글. 이 글에서 김지자는 자신이 당시 유일한 방송 여기자가 아닐지 추측하며 방송기자로서의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 자료 제공_필자


이렇게 동아방송보다 역사가 앞선 KBS, MBC등의 상황을 방송 사료를 통해 추적한 결과, 김지자가 한국 방송 최초의 여성 기자로 판명됐습니다. 그는 취재 현장에서 방송기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던 1965년경 당시에도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면서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그 시절 한 방송 전문 주간신문인 ‘방송’지에 기고한 글에서 ‘스릴·매력 있는 방송 여기자’ 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이 최초의 방송 여성 기자임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방송 여기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장담할 처지는 못 되지만 ‘한국에 방송 여기자가 꼭 한 사람 있답니다’고 떠들어 본다면 이건 자가 PR을 겸한 지나친 독선일까? 일간 신문이나 통신, 잡지 기자와 달리 방송 여기자란 무척이나 고된 직업이다. 하루 평균 15회 이상 있는 뉴스 마감시간에 쫓기며 묵직한 휴대용 녹음기까지 걸메고 뛰어다니다 보면 온몸의 마디마디에 피로가 엄습한다(필자주: 컬러는 필자가 임의로 강조한 것임).”


일명 '아이스케키통'으로 불렸던 휴대용 녹음기 / 출처_http://coreapress.com


학자의 길로 떠나다


이렇게 김지자는 한국 방송 최초의 여성 기자로서 동아방송의 뉴스 가치를 드높이는 데 혼신을 다해 취재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는 신문기자와 달리 방송기자로서 속보성 및 현장성을 살리기 위하여 녹음기를 항상 휴대하며 취재해야 했는데, 여성으로서 그 어려움은 꽤 컸습니다. 1960년대 상반기 상황만 하더라도 녹음기가 휴대용이라 하지만 ‘아이스케키통’으로 불릴 만큼 우람하고 육중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키가 작고 심약한 여성이 메고 다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남자 기자들 틈바구니를 이 녹음기를 앞세워 뚫고 들어갔습니다.


김지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동아방송의 기자는 방송국 소속이 아닌 동아일보사 편집국 소속이었습니다. 그가 견습기자로 입문한 방송뉴스실(실장이 과장 직급으로 초대 실장이 고재언)이나 ‘부 단위’ 부서로 격상된 방송뉴스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것은 신문 방송 겸영 회사로서 경제적 효율성을 고려한 방송 경영의 일환이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지자는 뉴스실, 방송뉴스부 소속의 일선 기자로 활약하면서 한때는 소년동아부 기자로도 근무한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문 매체의 선두 주자로서 기반을 구축한 동아일보는 월간지(신동아, 여성동아)및 어린이 신문 등을 동시에 발행하면서 기자들을 효율적으로 배치하여 활용도를 높였습니다. 동아일보나 동아방송 역사에서 개별 기자를 추적하다 보면 이러한 사례는 비일비재합니다.


김지자는 1971년 8월 동아방송에 사표를 내고 필리핀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오래 전부터 학자의 길을 준비한 듯 1967년 모교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필리핀 유학시절에도 동아방송 필리핀 주재 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1973년 국립 필리핀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국 주재 미국인구협회 국제인구문제응용연구회 담당 수석연구원, 연구실장, 연구부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김지자는 이러한 연구 경력을 바탕으로 1981년 서울교육대 전임 교수가 됐습니다. 그는 방송기자 출신 교육학자로서 교육방송에도 관심이 많아 그와 관련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필자가 출간한 ‘한국방송관계문헌색인’ 개정증보4판(1925~1997)에도 그의 방송 관련 논문 제목이 두 편이나 실려 있습니다. ‘전파매체의 평생 교육적 활용에 관한 소고’(서울교대 논문집, 1981)와 ‘지역사회 발전과 로컬방송’(방송위원회, ‘방송연구’, 1984) 등이 그것입니다. 저서로는 ‘지역사회개발론’(공저), ‘미래를 위한 가정교육’(공저)이 있고, 논문으로 ‘자기 주도적 학습의 연구동향’ ‘평생 교육의 이론적 기초’ 등이 있습니다.


1960년대 후배 여성 기자 없어


여성의 세기라고 일컫는 21세기로 접어든 후 여성기자가 급속히 늘고 있습니다. 각 방송사 메인 뉴스에 등장하는 기자들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메이저 방송사 보도국에 들러보면 여성 기자의 비약적인 증가 현상을 쉽게 목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김지자 이후 1960년대 내내 그 뒤를 잇는 여성 기자가 부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당시 지상파방송사의 관련 사료를 탐구해 보아도 1960년대에는 뚜렷하게 부각되는 여성 기자가없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이런 가운데 한국 방송 여성 기자사의 기틀을 놓는다는 차원에서 김지자 이후의 여성 기자를 거론해 보면 남승자, 문명자, 김운라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남승자는 1968년 KBS 아나운서로 방송계에 입문하여 1970년대 초 기자로 전직한 후 정부의 여러 부처를 출입하다 1980년대 들어 차장, 부장, 주간, 국장급 해설위원 등을 지냈으며 한때는 라디오, TV 보도 관련 앵커를 맡기도 했습니다. 문명자는 1971년 MBC 촉탁으로 3년여 동안 워싱턴 특파원 직을 수행했습니다. 김운라는 1970년 CBS 기자로 입사한 후 1980년 언론 통폐합으로 KBS로 이적되어 각종 출입처 기자, 차장, 부장, 주간, 국장급 해설위원 등을 거쳐 지역총국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여성 방송기자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그 연구 작업은 기자 관련 단체나 후진 연구자들의 몫으로 남기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