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1. 15. 15:48ㆍ수업 현장
서울 동북고등학교 권영부 선생님의 교직 생활 28년은 국내 미디어교육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신문 활용 교육의 산증인이자 뉴스 리터러시 교육 전문가인 권영부 선생님에게 학교 현장 속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
편집부
신문 활용 교육(NIE)이라는 단어조차 생소하던 1989년. 동북고등학교 권영부 선생님은 경제 교과에 신문 기사를 접목하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수업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교과서에 밑줄 긋고 암기하는 교육 방식을 따분해하는 아이들의 표정과 세상과는 단절된 듯한 교과서 내용에 충격을 받은 탓이었다.
“교사가 되기 전에 기업에서 근무했습니다. 기업은 현실보다 미래를 보게 합니다. 경제 이론보다 실무 능력을 더 중요시하고요. 그런데 아이들이 배우는 경제 교과서는 제가 고등학생일 때 배운 것과 별반 달라진 것이 없더군요. 강산이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는데 교과서는 시대의 변화와 상관없이 여전히 암기 위주의 지식에만 머물러 있었습니다. 안타까웠죠. 세상과 소통할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던 차에 신문이 떠올랐습니다.”
신문으로 수업하는 이상한 선생
1990년대 초만 해도 신문은 다양한 최신 정보를 발 빠르게 전달하는 대중 매체였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모바일 환경이 발달하지 않았고 교실에서 활용 가능한 정보원으로는 신문이 거의 유일무이했다. 권영부 선생님은 미국과 일본에 있는 가족과 지인에게 연락해 신문 활용 교육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해외 서적과 문서 등에 소개된 신문활용 교육은 그야말로 눈이 번쩍 뜨이는 신세계였다. 당장 교과 내용과 관련 있는 신문 기사를 잘라서 OHP 필름을 뜨고 활동지를 만들었다. 환율이니 국제 수지니 인플레이션이니 하는 추상적인 교과서 용어들이 피부에 와닿는 현실 개념으로 잡히니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학생들 반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집중력과 이해력이 높아졌고 수업 분위기도 좋아졌습니다. 다만 동료 교사들과 학부모들이 우려의 눈길을 보냈습니다. 이상한 선생이 와서 신문으로 수업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신문 기사로 문제를 출제하니 일반고와는 맞지 않는 선생이라는 질타도 받았습니다. 만약 그때 물러섰다면 지금처럼 박수받는 수업을 할 수 없었겠죠.”
뉴스를 읽고 이슈에 대해 토론하는 교내 '뉴스활용 이슈토론 대회' 모습
교직에 몸담은 지난 28년간 권 선생님은 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교육적인 시도를 선보였다. 통합논술, 구술면접, 진학 포트폴리오, 수행평가, 인성교육, 경제 교육, 토론경시대회 등 교과와 비교과, 진학 지도에서 뉴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렇게 다른 교사들이 시도하지 않는 방식을 사용하다 보니 스스로 연구할 점도 많았고 주변의 반대에도 부딪혔다. 순간순간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때마다 권 선생님이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의 변화 때문이었다. 뉴스를 접할수록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 단순히 외운 지식을 되뇌지 않고 끊임없이 발전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한 결과였다. 토론과 발표 시간이 치열해진 건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수업에 몰입하는 학생들의 모습 자체가 권 선생님에게 기쁨으로 다가왔다. 또한, 교과서라는 틀 속에 갇힌 지식을 세상이라는 열린 공간과 연결해서 소통하게 했다는 보람도 컸다.
미디어교육의 굵직한 화두 중 하나가 리터러시다. 요즘처럼 소셜미디어의 영향력이 막강한 상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강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교과 중심으로 수업을 운영하는 학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위한 시간을 따로 배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권영부 선생님은 기본적인 리터러시 역량을 바탕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는 방안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1991년에 제정된 미국의 국가리터러시법(National Literacy Act)은 리터러시를 문제 해결 역량으로 정의합니다. 즉 리터러시를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으로 국한하지 않고 문제를 식별하고 이해하고 해석하고 창작하고 소통하고 종합하고 해결하는 총체적인 능력으로 봅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런 리터러시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기본 교과 시간에 읽고 쓰고 말하는 능력을 충분히 다진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도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2017년 뉴스활용이슈토론대회.
권영부 선생님은 학교 수업에서 접목 가능한 리터러시 역량을 네 가지로 구체화한다. 산문, 문서, 이미지, 수량 리터러시다. 글을 그림이나 통계, 계산식, 토론, 논술, 브리핑 같은 또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역량을 의미한다. “비교과 시간은 뉴스 리터러시 교육에 집중하기 좋습니다. 제가 진행한 인포그래픽스·노노그램·타이포그래피 그리기 경시대회, 국무회의식 토론대회, 역사 인물 모의재판대회, 해시태그 경제경시대회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모든 활동의 중심에는 뉴스가 있습니다. 그리고 뉴스는 종이신문과 스마트폰에 기반을 둔 뉴스를 포괄합니다.”
100명의 도큐몽 육성을 목표로
20년 넘게 뉴스를 활용한 리터러시 교육에 매진한 권영부 선생님은 요즘 부쩍 미디어교육의 확장성 문제를 고민한다. “한국 미디어교육의 큰 축인 신문 활용 교육은 1995년부터 본격화됐습니다.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렇다 할 만한 전문가가 없습니다. 뉴스 리터리시 교육 역시 꾸준히 하시는 분이 드뭅니다. 왜 확산되지 못할까, 저는 교사들이 교과서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과서에서 눈을 돌리면 뉴스라는 엄청난 통로가 보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교과서를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권영부 선생님은 교과서를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뉴스 정보를 가공해서 교과서 내용을 제시할 때 학생이 몰입하는 수업, 교사가 설레는 수업이 가능하고 종국에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확대로 이어진다는 주장이다.
“완벽하지 않으면 출발조차 하지 않으려는 교사들이 많습니다. 그분들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일단 도전해 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보완해 나가면 됩니다. 제 경험상 선생의 관점이 아닌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프로그램은 실패할 확률이 낮습니다.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아이들이 변하는 현실적인 기회가 마련될 겁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열정 있는 소수의 교사에 의해 좌우된다. 구심점 역할을 하는 미디어 교사가 있는 학교에서 훨씬 효과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다. 권영부 선생님은 이런 의미에서 전문성을 갖춘 수종(樹種)형 인재 양성을 강조한다. 프랑스는 국가 차원에서 미디어 활용 수업을 연구하는 도큐몽(Document, 사서 겸 미디어교육 전문 교사)을 배출한다. 권 선생님은 한국에서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백 명의 도큐몽을 육성할 미디어 교사 프로그램이 개설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현재 한국언론진흥재단에서 제공하는 미디어교육 자료의 양이 어마어마합니다. 이것만 잘 활용해도 한국식 도큐몽 양성에는 무리가 없을 겁니다.
미디어교육을 위해 한 가지 더 제안한다면 전문가 그룹이 모이는 기회를 재단 차원에서 더 늘려주었으면 합니다. 미디어교육 전국대회처럼 미디어교육에 관심 있는 선생님들이 모여서 직접 논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발전적인 제언들이 많아질 것으로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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