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6. 14:08ㆍ특집
‘안 돼’라는 훈육에서 비판적 사고 계발로
디지털 윤리 역량과 교육
올 초 우리 사회를 충격에 빠트린 이른바 ‘n번 방 사건’ 이후
디지털 성범죄 재발을 막기 위한 법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조건 법과 규율을 정한 뒤, 따르라고 훈육하는 데서 나아가
디지털 환경에 필요한 시민의 윤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글 오연주 (한국정보화진흥원 디지털포용본부 책임연구원)
디지털 기술 발전과 더불어 프라이버시, 알 권리, 자율성 등의 가치는
그 개념, 범위, 중요성에서 변화를 맞고 있다.
디지털 윤리 교육은 이러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비판적 사고에 필요한 자원의 획득을 돕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최근 디지털 기술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사고, 그리고 이에 맞서는 실천과 정책 과제는 종종 디지털 윤리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n번 방 사건’과 ‘n번 방 방지법’이라고도 불리는 「전기통신사업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 성 착취·아동 성범죄 금지 조항을 추가한 카카오 알고리즘 윤리 헌장, 디지털 교도소 등이 있다.
이들과 관련된 언론 보도, 정책적 논의, 일상의 대화에서 디지털 윤리는 마치 자명한 의미를 갖는 개념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디지털 윤리라고 여겨지는 것들은 시대와 문화적·사회적·정치적 맥락에 따라서 끊임없이 협상의 대상이 되고 변화하며, 어제의 아날로그 환경에서 옳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오늘의 디지털 환경에서는 설득력을 잃을 수 있다. 그렇다면 처방전처럼 내려지는 규율, 규범, 가이드라인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훈육적인 교육에서 나아가, 비판적 사고 능력에 기반한 디지털 윤리 역량을 기르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다양한 가치 탐색하기
우리나라에서 디지털 윤리가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 건전한 정보 문화 확산과 정보통신 심의를 목적으로 정부 기관과 민간 자율기구가 운영되면서부터이다. 이후 사이버 폭력과 불건전 정보가 확산되면서 1990년대 말부터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네티켓 캠페인이, 200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공교육 제도를 중심으로 정보통신윤리교육이 시작됐다. 온라인상의 ‘올바른’ 기업적 실천과 개인의 행동을 강조하는 심의 및 교육이 디지털 윤리에 대한 대중적 논의의 출발점이 됐고 그 영향력은 아직 남아 있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에 따라 온라인상에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늠하고 실천하는 것이 디지털 윤리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윤리 역량은 누군가가 옳다고 말하는 도덕적 행위(moral action)를 따르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경합하는 가치들로 인해 생겨나는 문제에 민감성(moral sensitivity)을 가지고, 다양한 도덕적 원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도덕적 추론(moral reasoning)을 하며, 추론의 결과로 특정한 윤리적 입장을 갖추고 도덕적 결정(moral decision)을 내릴 수 있을 때 윤리적 리터러시를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삶에서 일어나는 윤리와 얽힌 상황들은 대개 복잡하고 다층적이기에 이와 같은 탐색과 사고의 과정은 더 중요할 수밖에 없다. 디지털 기술 발전과 더불어 프라이버시, 공유, 알 권리, 행위성, 자율성 등의 가치는 그 개념, 범위, 중요성에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디지털 윤리 교육은 이러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비판적 사고에 필요한 자원의 획득을 돕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온라인에서 디지털로 확장하기
최근까지도 교육 현장에서는 정보통신 윤리, 사이버 윤리, 인터넷 윤리와 같은 용어가 종종 사용된다. 용어에 대한 정의는 사용자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대개는 온라인 미디어상에서 지켜야 할 행동적 규범을 다룬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다. 사이버 폭력에 대한 예방과 대처, 온라인상에서의 평판 관리, 디지털 저작권 보호, 개인 정보 보호 등이 주로 다루어지는 주제다. 이 모두가 디지털 윤리의 주제에 포함될 수 있지만, 오늘날 디지털 기술이 일상생활에 파고드는 정도를 고려하면 온라인 미디어상의 윤리 문제를 다루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논의에서 분명해졌듯이 디지털 기술은 온라인 미디어를 넘어 건강, 가전, 안보, 도시 계획, 생산 공정, 농수산업 등 인간 생활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활용되고 있다.
더욱 확장된 범위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윤리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는 디지털 리터러시 교육의 변화도 수반되어야 한다. 디지털 시민성, 디지털 리터러시, 미디어 리터러시 등으로 불리는 교육은 디지털 미디어상의 텍스트와 상호작용을 비판적으로 읽고 해석하고, 협상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들 교육이 지닌 중요성은 여전하지만, 인간 삶의 양식을 바꾸는 더 큰 구조적 전환에 대한 교육의 중요성도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옥스퍼드 인터넷 연구소(Oxford Internet Institute)의 부설 기관인 디지털 윤리 랩에서는 이러한 구조적 전환에 핵심이 되는 데이터, 알고리즘, 거버넌스, 인프라스트럭처를 디지털 윤리 연구와 실천의 중심축으로 설정한다. 하버드대학의 버크만 클라인 센터(Berkman Klein Center for Internet & Society)의 ‘청년과 미디어(Youth and Media)’ 연구 프로젝트에서 데이터, 인공지능, 컴퓨터적 사고, 디지털 경제를 디지털 시민성의 영역으로 포함한 것도 유사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해관계자 모두의 윤리 생각하기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디지털 윤리 교육은 디지털 미디어 이용자로서 개인이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디지털 윤리의 문제는 인간과 디지털 기술의 상호작용 속에 발생한다. 그 점에서 기술 개발자와 디자이너,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기업의 윤리도 디지털 윤리 교육에 포함될 필요가 있다. 페이스북-케임브리지 애널리티카 정보 유출 사건, 아마존 AI 채용 시스템의 성차별적 알고리즘, 흑인을 고릴라로 분류한 구글 얼굴 자동인식 시스템과 같은 사례는 생산자와 기업의 실천이 갖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영향력을 보여준다. 더불어 사회 서비스를 비롯한 행정 영역에서 디지털 기술에 대한 정부의 의존성이 높아지면서 정부 및 공공 영역의 행위자 또한 디지털 윤리의 주된 이해관계자로서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 특히, 정부는 지원과 규제를 통해 디지털 기술의 발전 및 활용 과정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윤리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다.
개인이 기업과 정부 같은 조직의 운영에 관여할 수 있는 정도는 제한적이다. 그러나 최근 배달의민족이 불매운동 확산 이후 새로운 수수료 정책을 철회하고, 영국 정부가 알고리즘에 기반해 성적을 평가한 후 학생들의 반발로 해당 조치를 철회한 사례 3)에서 볼 수 있듯이 다수 시민의 집단적 감시와 비판은 조직의 결정을 재고하고 개선하는 힘을 갖는다. 누가, 어떻게 디지털 환경을 만드는가에 따라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의 삶의 양식이 결정된다. 따라서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는 개인으로서의 윤리를 넘어 이해관계자 모두의 윤리를 생각하는 디지털 윤리 교육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1) 케리스 (2018). “스마트폰 중독! 무엇이 문제일까요?”. 2018.11.3. https://www.youtube.com/watch?v=kQ8OFkL9PHg
2) 현재 널리 사용되고 있는 커먼센스 미디어(Common Sense Media) 또는 마이크 리블(Mike Ribble)
3) 영국 정부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해 A 레벨 시험을 치르기 어렵게 되자 그동안 실시한 예비 시험과 학교 과제 등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을 활용하여 성적을 산출했다. 결과에 대한 학생, 교사, 대학의 반발이 거세지자 영국 정부는 당초 계획을 철회했다.
4) 엠빅뉴스 (2020). “수수료 꼼수 인상 논란에 ‘배신의민족’ 비난까지 들은 배달의민족! 엿새 만에 고개 숙였다!” 2020.4.6. https://www.youtube.com/watch?v=lFAGFbNolM8
5) The Independent (2020). “Students protest A-level results and demand Gavin Williams’ resignation”. 2020.8.15. https://www.youtube.com/watch?v=6Cgb_wXR4e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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