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학 드라마, 현실과 다르지 않은 이유

2012. 7. 30. 10:35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드라마 <하얀거탑>에서 천재 외과의사 장준혁(김명민)은 마치 예술가처럼 그려진다. 수술대에서 그가 잡은 메스는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지휘봉처럼 우아하게 환자의 배를 가르고, 수술바늘로 외상을 봉합하는 손동작은 마치 기타 줄을 고르는 손처럼 리드미컬하게 움직인다. 급박한 환자가 누웠을 때는 폭풍처럼 빠르게 움직이다가 또 위기의 순간이 넘어가면 너무나 평온하게 움직이는 그 손은 마치 악기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출처-왼쪽 위에서 시계 방향으로 MBC 골든타임, SBS 외과의사 봉달희, MBC 하얀거탑]





우아한 의사들 사이에서 소외되는 환자들


하지만 장준혁의 우아함은 환자라는 대상을 하나의 사물처럼 소외시킨다. 장준혁이 그의 라이벌로 등장하는 해외파 의사 노민국(차인표)과 한 환자를 두고 마치 대결하듯 수술을 하는 장면은 겉으로 보기엔 멋져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은 끔찍하다. 드라마가 의사들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행위와 대결의 스펙터클에 집중하게 만들지만, 시각을 바꿔서 만일 당신이 그들이 대결하는 수술대에 누워있는 환자라면 어떨까. 


결국 <하얀거탑>이 전하는 얘기도 이것이다. 천재적인 외과 기술을 가졌고 그래서 그 조직의 맨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 그 기술을 맘껏 활용했지만, 결국 그러다보니 정작 환자가 소외됐다는 것. 장준혁은 소외된 환자가 부메랑처럼 되돌려준 의료사고라는 암초에 걸려 침몰하고 만다. 게다가 자신 스스로 말기암 환자가 됨으로써 그 대상이 된 자들(환자들)의 아픔을 온몸으로 짊어진 채 저 세상으로 가게 되는 형벌을 받는다. 



[출처-MBC 하얀거탑]




모든 의학드라마들은 기본적으로 의사와 환자를 다루지만 이 누군가는 손에 메스를 들고 또 누군가는 수술대 위에 눕게 되는 의사와 환자라는 존재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이 결국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많은 의학드라마들에서 의사는 동시에 환자인 경우가 많다. 장준혁이 정신적이고 정서적인 장애를 가진 인물이고 결국은 말기암 환자로 죽게 되는 것도 그렇고,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외과 의사인 봉달희(이요원)가 심장병을 갖고 있다는 것도 그렇다. 물론 구체적인 질병이 없는 경우에도 어김없이 그들은 정서적인 장애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들 또한 사랑하고 아파하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다.





의학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종합병원의 불편한 진실


하지만 의사가 가진 이러한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장애는 그래도 인간적이다. 그들은 어쨌든 실력이 좋든 나쁘든 환자를 외면하지는 않고 그들 앞에서는 최선을 다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적인 한계를 느낀다. 같은 인간이지만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에 뛰어넘어야 할 것들이 그들에게는 있다. 피가 튀고 살이 갈라지는 광경 앞에서도 냉정을 유지해야 하고 죽음이 경각에 달린 환자 앞에서도 침착하게 상황에 대처해야 한다. 그들은 그 한계를 넘어 차츰 성장해간다. 이것이 성장담을 담기 마련인 의학드라마의 한 흐름이다.


그런데 <골든타임>이라는 응급실을 배경으로 하는 의학드라마는 이러한 의학드라마들과는 조금 방향을 달리하고 있다. 환자들은 과연 의사들의 한계(무능력, 생명의 한계) 때문에 죽음에 이르게 되는 걸까. 과거라면 아마도 그런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다. 살리고 싶어도 의료 환경이나 설비가 혹은 의료종사자들이 여의치 않아 살릴 수 있는 환자를 놓치는 경우도 많았을 테니까. 하지만 요즘처럼 병원이 도처에 널려 있고, 과거에 비해 성능이 좋아진 의료장비를 갖춘 병원에서 환자가 사망하게 되는 것은 단지 의료 환경 때문만은 아닌 일이 되었다. 


종합병원, 그것도 응급실 같은 경우에는 여러 과의 공조가 무엇보다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다. 복합적인 외상환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일 이 공조체계가 깨진다면 어떻게 될까. <골든타임>이 그리고 있는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 종합병원 이면에 놓여진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낸다. 



[출처-MBC 골든타임]




교통사고를 당한 여중생이 응급실에 실려 왔다. 뇌도 다쳤고, 다수의 골절도 있는데다가, 외상도 상당하다. 여러 과의 의사들이 모였다. 그런데 이 위급한 환자를 치료하기는커녕 누가 먼저 수술을 할 것인가를 놓고 실랑이를 한다. 자칫 자신이 먼저 수술을 했다가 환자가 사망하기라도 하면 그 책임이 자신에게 미치기 때문이다. 서로 먼저 수술을 하라고 미루다가 결국 이들은 그 자리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과의 의사에게 수술을 미룬다. 그 의사가 먼저 수술을 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손을 뗀다. 결국 그 의사를 기다릴 수 없어 이 병원에서 수술을 받지 못하게 된 환자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다 사망한다. 


정반대의 상황도 있다. 어떤 환자가 등산을 하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역시 여러 과에 걸쳐 수술이 필요한 상황이다. 평상시에도 잘 보이지 않던 의사들인데, 쉬는 날인데도 각 과의 과장들이 다 모였다. 이유는 이른바 VIP의 전화 한 통. 그 환자를 잘 봐달라는 전화를 한 사람은 이 병원 이사장의 부인. 과장들은 서로 자기 과가 먼저 수술을 하겠다고 나선다. 그 VIP가 가진 영향력이 막대하기 때문에 그 수술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의사들의 개인주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네 의료 시스템이 가진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이 의료시스템은 자본주의의 시스템(돈의 시스템)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돈이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뭐든 할 수 없는. 그것이 물건 사는 일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일이라는 점에서 수긍하기가 어려워진다. 돈 없으면 살 사람도 죽어야 한다는 얘기인가.



[출처-MBC 골든타임]




물론 극화된 부분이 없잖아 있지만 의학드라마인데도 보다 보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기가 어렵다. 이 드라마 속의 과장들은 제가 필요한 환자만 돌보는 것 같다. VIP라면 제 간이라도 꺼내줄 것처럼 정성을 쏟지만, 힘도 없고 백도 없는 가난한 서민들이라면 당장 죽음이 경각에 몰려 있어도(아니 오히려 그렇다면 더더욱) 손 하나 까닥하려 하지 않는다. 도대체 이런 병원이 실제로 있을까 싶지만(이런 불편한 진실은 물론 병원의 이익을 위해 감춰지기 마련이다), 의외로 이런 병원들이 많다. 


실제로 병원에 가면 서러워지는 게 다반사다. 병원만큼 이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돈이 있거나 성공했거나 유명하다면 의사들의 태도도 달라진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라면 말 그대로 막막하고 서러울 수밖에 없다. 이른바 VIP병동은 인권을 넘어서 의료서비스를 체험할 수 있지만, 몇 개의 병상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일반병동에 가면 아파도 돈이 아까워 아픈 내색을 하지 않는 이들이 다반사다. 


병원이 사람의 질병을 고치는 곳이고,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없애주고 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라는 고전적인(?) 정의에 합당하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새 병원은 하나의 사업체가 되었고, 의사 역시 병원에 돈을 벌어주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러니 사람을 다룬다는 것이 다를 뿐, 의료행위가 생명을 구한다는 그 의미에 더 부합한다기보다는 때로는 사업에 더 가까워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아픈 현실일 것이다. 





병원 내 권력 다툼에 환자는 양념일뿐


실제로 일반외과 같은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과를 지원하는 전공의들이 점점 줄어들고 대신 생명과는 상관없는 성형외과나 정형외과, 피부과 같은 비보험 적용이 많은 이른바 ‘돈이 되는’ 과에 전공의들이 더 몰리고 있는 현실은 이러한 작금의 우리네 의료 환경을 잘 말해준다. 그도 그럴 것이 의사를 직업으로 선택하는 이들 중 대부분이 사회적인 성공을 목적으로 하는 경우가 다반사가 아닌가. ‘의술만 있고 인술은 없다’는 개탄조차 이제는 어딘지 구닥다리로만 여겨지는 세태다.


<하얀거탑>이나 <골든타임> 같은 병원 내 권력을 다루는 드라마를 보다가 화가 나는 이유는 거기서 정작 소외되어 있는 우리네 서민들의 몸을 보기 때문이다. 이들 드라마들 속에서 환자는 마치 의사를 돋보여주기 위해 수술대에 누워있는 재료처럼 보인다. 심지어 목숨을 내놓고 누워있는 이 환자를 통해서 누군가는 천재의사로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수많은 환자들의 몸을 담보로 그들은 권력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출처-MBC 하얀거탑]




이것은 그대로 우리네 사회의 한 단면을 상징적으로 그려낸다. 신문을 펴면 등장하는 수많은 문구들의 이면에는 어쩌면 저렇게 수술대 위에 몸을 누이고 있는 수많은 서민들의 고통이 있는 지도 모른다. 정치인들은 그렇게 수술대 위에 몸을 눕히고 있는 서민들을 끝없이 호명하지만, 진정 그것이 그들의 생명을 살리겠다는 진심인지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그들의 호명이 생명이 아닌 권력이 될 때 사회의 비극은 시작된다. 


<골든타임>이 보여주듯 몸이 자꾸만 하나의 상품처럼 대상화되는 세태는 안타깝게도 이미 그 몸을 생명으로 다루어야할 병원에서마저 일어나고 있다. 같은 병이라도 돈이 있으면 고칠 수 있지만 돈이 없으면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사회에 희망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것을 수치화하고 계량화하는 사회가 만들어낸 물화는 생명마저 상품처럼 다루는 비극적인 현실을 낳았다. 생명 앞에서 돈과 권력을 저울질 하는 세태는 시쳇말로 멘붕(멘탈붕괴)의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한가를 보려면 그 사회의 병원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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