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P판의 귀환, 추억의 아날로그를 찾는 사람들

2013. 3. 8. 10:26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예년보다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번 겨울이었다. 추위스케치 겸 다큐소재 발굴차 황학동 벼룩시장을 찾았다.  잔뜩 웅크리고 시장골목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얼음장 같은 바깥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냄새가 나는 한 가게를 발견했다. 노란 텅스텐 조명 아래 오래된 턴테이블이 잔뜩 쌓여있고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김이 폴폴 올라오고 가게 주인이 입은 스웨터까지 이 분위기를 더욱 훈훈하게 만들고 있었다.

 

 

 

 


LP판 다시 생산, 마니아의 힘

 

대뜸 들어선 가게에선 귀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이름 모를 연주자의 바이올린곡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이번 다큐 아이템이 정해졌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였지만 아날로그 감성이 부쩍 관심을 받고 있는 요즘 트렌드를 감안하면 시의성에도 부합되는 재료였다.

 

 

국내에서 중고엘피판이 가장 많이 거래되고 있는 중구 회현지하상가를 찾아갔다. 평일이라  한산할 것 같았던 가게는 외국인들과 마니아들로 제법 붐비고 있었다. 외국인과 가게 주인을 인터뷰하던 중 유치원에나 있을 법한 작은 의자에 앉아 엘피판을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트렌치코트 차림의 중년신사를 발견했다. 음악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말을 걸자 이 신사는 젊은 사람이 엘피판에 관심을 갖는다며 오히려 나를 반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아니 이 신사는 일방적으로 엘피판에 대한 강의하고 나서는 자신의 엘피판을 보여주겠다며 집으로 초대까지 했다.

 

 

  ▲ LP판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 

 

회현상가 방문 후 엘피판에 대한 공부가 우선이겠다 싶어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았다. 얻은 정보의 다양함과 방대함 그리고 선도(鮮度)를 감안해봤을 때 한국의 엘피판 문화는 꽤 두껍게 형성되어 있었고 최근 들어 다양한 연령대에서 붐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붐에 힘입어 10년전 서라벌레코드가 문을 닫으면서 중단됐던 엘피판 제작도 다시 이루어지고 있었다.

 

 

LP제작을 하고 있는 김포의 LP공장을 찾았다. 김포의 한 물류창고에 만들어 놓은 공장이라 아직 제 모습을 갖추진 못했지만 몇 안되는 직원들은 새로운 형식의 엘피판을 만들기 위해 연구 중이었다. 공장모습이 그림(?)이 되지 않아 결국엔 연구 중인 직원들을 모아 색색의 엘피판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림을 만들었다. 이런 부탁을 할 때는 참 부끄럽고 미안하다.

 

 

  ▲ 최근 LP열풍에 힘입어 공장이 생겨났다 

 

초대를 받은 노신사의 집을 방문했다. 러시아에서 금융업에 종사하고 있는 서기열씨는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엘피판가게를 찾는다고 했다. 진공관 앰프까지 갖춰진 서씨의 집 한 쪽 벽은 엘피판으로 가득했다. 가장 아끼는 판이라며 요한나 마르치의 바이올린 연주곡을 틀어준 후 조용히 옆에서 커피를 내리는 서씨의 모습을 보면서 바쁜 취재를 내려놓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1회용 음악이 갖지못하는 낭만'

 

 ▲ LP에 새겨진 음구를 카트리지가 읽으며 음악이 재생된다. 

골을 지날 때 만난 먼지까지 소리로 전달되어 특유의 '지직' 잡음이 난다.


 

혹독했던 올겨울 추위도 누그러지고 눈도 비가 되어 내리고 있다. 겨울과 어울릴 것 같은 엘피판의 소리도 가는 겨울과 함께 기억 속에서 잊혀 질까 아쉽다. “찾고 듣고 지워버리는 요즘 음악은 인스턴트다. 하지만 엘피판은 음악을 소유한다는 느낌을 준다.”  취재 중 만난 한 엘피마니아의 이 말처럼 지직거리는 잡음까지도 간직할 수 있는 엘피판의 따뜻한 기운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길 바란다.

 



이 글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3년 2월호 중 정연호 서울신문 사진부 기자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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