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17. 11:15ㆍ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이미지 출처: flickr by Anton Khoff
10대 소년 미하엘은 비가 쏟아지는 귀가 길에서 열병으로 심하게 구토를 합니다. 이때 그곳을 지나가던 30대 중반의 여인 한나가 그를 도와주죠. 며칠 후 마이클은 그날의 감사를 표하기 위해 한나의 집을 찾습니다. 여기서 일이 벌어집니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게 된 거죠. 그렇게 미하엘과 한나는 연인이 됩니다. 그런데 한나는 좀 특이한 구석이 있어요. 관계를 갖기 전에 항상 미하엘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한 것이죠. 아무튼 그렇게 사랑이 깊어가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집니다. 세월이 흘러 법대생이 된 미하엘은 우연히 참관하게 된 재판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전락한 한나를 목격합니다.
눈치 챘겠지만 이 이야기는 2008년 개봉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영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입니다. 파격적인 로맨스 영화죠. 스무살 가까이 나이 차이가 나는 소년과 여인의 사랑을 다루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의 홍보 또한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티저 영상이나 정식 예고 영상 모두 두 사람이 만나 격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편집해 내보냈으니까요. 이게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감독 달드리 감독은 금기를 넘어선 이들의 사랑을 어떤 영화보다 아슬아슬하게 그려냈거든요. 성행위 자체보다 그 직전의 성적 긴장감을 묘사하는 부분은 탁월하기도 하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매거진 <더 리더 – 책을 읽어주는 남자> 포토
하지만 미하엘과 한나 두 사람의 사랑이 이 영화의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극히 일부분이죠. 감독 스티븐 달드리가 이 영화를 통해, 또 '더 리더'의 원작자인 독일 작가 베른하르트 슐링크가 동명의 소설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것은 따로 있는데, 그 이야기는 미하엘이 한나의 재판을 지켜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1부가 미하엘과 한나의 만남과 헤어짐이라면, 2부는 한나의 재판을 지켜보는 미하엘의 복잡한 감정이고, 이 영화에서 더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챕터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이 왜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인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미하엘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 줍니다. 미하엘이 책을 읽어'줬'다는 게 중요합니다. 한나는 스스로 책을 읽는 것이 아닌 남이 읽어주는 그대로 '듣고만' 있었다는 것이죠.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재판 과정에서 드러납니다. 한나는 글을 읽지 못했어요.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게 그가 재판에 서게 된 이유입니다.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돈을 더 주겠다는 곳에서 일했고, 글을 읽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도 모르는 문서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한나는 나치 복역자가 된 거죠.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매거진 <더 리더 – 책을 읽어주는 남자> 포토
한나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그는 재판에서 말합니다. "난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일했을 뿐"이라고요. "그게 왜 죄가 되는 것이냐"고도 합니다. 하지만 한나가 나치를 위해 일을 했던 과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미하엘은 한나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일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나를 도울 수 없습니다. 도울 수 있는데도 말이죠. 갑자기 떠나버린 한나에 대한 원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알 수 없는 죄책감일지도 모르고, 부담감일지도 모르죠.
결국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는 20세기 최악의 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과 그들의 만행을 되집어보는 영화입니다. 가해자의 입장에서 말이죠. 그토록 잔악한 짓을 저지른 나치가 독일인 전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어떤 사람은 홀로코스트에 적극 참여 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그 사실을 전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무관심했을 수도 있죠. 한나처럼 그저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았던 사람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런 그들을 동정하고, 연민할 수는 있을지언정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결국 감옥에서 죽어가는 한나, 그런 한나를 보고 눈물 흘리지만 적극적으로 돕지 않는 미하엘의 행동은 그런 의미입니다. 면책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독일의 과거 세대와 이들을 바라보는 현재 독일인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매거진 <더 리더 – 책을 읽어주는 남자> 포토
성실하게 사는 것보다는 제대로 인식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이 영화의 핵심입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가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무지 또한 죄가 될 수 있다는 거겠죠. 그래서 감정의 강한 흔들림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곧은 이성으로 마무리하는 지적인 작품입니다..
책을 읽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겁니다. 단순히 재미로 읽을 수도 있고, 정보와 지식을 얻기 위함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시간을 죽이려고 책을 읽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무엇인가를 읽고, 쓰는 행위를 통해 어떤 앎을 얻게 된다는 것은 가끔은 이렇게 삶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어디 한 개인의 삶 뿐이겠습니까. 한 세대의 문제가 되기도 하겠죠. 독일처럼 나라의 문제가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도 읽고 쓰는 행위를 멈출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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