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들에게 책을 읽게 해야 하는 이유는?

2014. 5. 1. 11: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책을 자녀에게 읽혀야 한다는 얘기는 주변에서 많이 합니다. 그런데 왜 읽혀야 하는지 정확하게 얘기해주는 사람은 적죠. 저도 책을 많이 읽는 편이지만, 왜 책을 읽혀야 하는지 말로 설명을 하려면 종종 막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문학도였던 딸아이가 썼던 글을 사람들에게 보여준답니다. 아이들에게 왜 책을 읽혀야 하는지에 대해 이보다 더 명징한 증언이 또 있을까 싶어서죠. 저는 이 글을 책 읽기에 소홀한 아이들이나 죽자고 공부만 강요하는 부모들에게 종종 읽게 합니다. 



엄마와 책을 읽던 딸의 글

 

 

회색 철제 책장. 잡고 흔들면 기우뚱할 정도로 약하고 허접스러운 것이었지만 칸칸마다 책이 꽉 차있었다. 둘째가 태어나기 전, 젊은 부부와 그들의 어린 딸이 살던 단칸방에 책장은 조금 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좁은 공간을 고집스럽게 차지하고 있는 책장을 부부는 굳이 치우려 하지 않았다. 낮이면 아이는 혼자서 책을 읽었고 밤이 되면 엄마의 무릎을 베고 책 읽는 소리를 들었다. 책을 꺼낼 때 손에 닿던 철제의 차가운 느낌. 이것은 어린 날 나의 이야기다.


젊은 엄마는 바쁜 일과 속에서도 틈틈이 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책을 펴고 앉으면 나도 마음에 드는 걸 한 권 꺼내 그 옆에 바짝 붙어 앉곤 했다. 사실 뭘 읽고 싶었다기보다는 엄마와 체온을 나누고 싶은 아이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사락사락.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어머니가 책장을 넘기던 소리가 기억난다. 아니, 기억이 난다기보다는 그때의 고요와 행복감이 가슴 속에 남아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책 읽기는 그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어머니와 책을 읽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새로운 세계와 만났고, 또 나의 세계를 만들어갔다.


 

이미지 출처 pixabay by PublicDomainPictures



그땐 읽는 게 마냥 좋았다. 책을 소리 내서 읽을 때 귓가에 퍼지는 내 목소리도 좋았고, 꼭꼭 씹어 먹듯 눈으로 가만히 읽는 것도 좋았다. 다른 것에 욕심을 부려 부모님을 속상하게 한 일은 거의 없는 것 같은데(물론 부모님의 기억은 나와 다를 수 있다.), 책 욕심은 많은 편이었다. 부모님과 서점에서 같이 고르는 것이나 어머니가 사다 주는 책만 해도 한 달에 여남은 권은 되었으니, 꼬마의 독서량치고는 꽤 방대하다 할 수 있겠다. 


읽는 것 자체가 좋았기 때문에 쌓아놓은 책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 독서를 통해 알게 된 사실들을 친구들에게 자랑하거나 어른들에게 똘똘하다 칭찬 한마디 듣는 것도 즐겼으니, 앙큼한 지적 허영심도 있던 셈이다. 또래보다 말재주와 글재주가 빨리 트인 것 이외에도 나의 독서습관이 진정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다.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자마자 큰 벽에 부딪히게 된다. 배워야 할 과목도 많아지고 그 깊이도 초등학교 때와 다르기 때문이다. 일단 교과서의 두께가 배로 늘어난다. 다시 말해 읽어야 할 활자 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때는 비슷하던 아이들이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확연히 수준 차이를 보인다. 배경지식의 유무와 이해력의 정도도 물론 큰 요인이겠지만, 거기엔 더욱 원초적인 이유가 있다. 경험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것은 ‘읽기를 두려워하느냐, 그렇지 않으냐’의 차이이다. 줄 글을 읽는 것에 훈련되어 있는 아이들은 대범하게 교과서를 읽어 내려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들춰보는 것 자체를 부담스러워하는 것이다. 


열심히 책을 읽다 중학교에 진학한 나에게 그런 부담은 없었다. 특히 나는 국어 교과서와 사회 교과서 읽는 것을 즐겼는데, 그 두 교과서가 이야기책이나 위인전의 확대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공부를 설렁설렁했던 것에 비해 내가 거두었던 성적은 과분했다. 그 시절, 나를 아껴주신 여러 은사님께 드리는 소소한 양심고백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수능시험을 보던 날, 언어영역의 문학 부분 전 지문이 이미 읽어본 작품들에서 출제되는 신기한 경험을 한 적도 있다. 공부가 하기 싫으면 과감히 문제집을 덮고 소설책을 꺼내 읽었던 수험생의 무모함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생각한다. 온전히 내 공간이었던 독서실 책상에는 문제집보단 시간이 되면 읽고 싶었던 책들이 더 많았다. 수능 전날에 아거사 크리스티의 잔혹한 살인극으로 스트레스를 풀었던 것은 부모님께 비밀이다.




이미지 출처: 이미지비트



사람은 누구나 언어 속에서 산다. 하지만 살아가며 느끼게 되는 것은 누구나 같은 언어를 가지게 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만나보면 자신만의 매력적인 아우라(Aura)로 상대를 혹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그 만남 자체가 공허하게 느껴지도록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경우에 두 부류를 나누는 기준은 그 사람이 가진 ‘깊이’이다. 그리고 그 깊이는 보통 상대가 어떤 ‘언어’를 가졌는지 구분된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생각’이나 ‘말’, 또는 ‘글’과도 바꾸어 볼 수 있다. ‘언어’를 가꾸는 가장 강력하고도 쉬운 방법은 바로 독서이다. 부모님이 나에게 세상을 주었다면, 그 세상을 채운 것은 책이라 할 수 있다. 


합리적 인생관이니, 거시적 세계관이니 하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많은 것에 부딪히고 깨지는 젊은 날, 내가 조금이라도 덜 바보스러울 수 있다면 그것은 책을 읽었기 때문이다. ‘연애를 글로 배웠다’는 우스개가 유행하고 있지만, 그게 나쁠 것은 없지 않나. 글로라도 연애를 배운 사람과 아예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의 연애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생각. 나름대로 타당하지 않은가. 


나는 많은 것을 책에서 배웠고 또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그것이 맞거나 틀리고, 또는 같거나 다르다는 것을 체득하며 살고 있다. 지금도 독서를 통해 나만의 언어, 생각, 그리고 말과 글을 가꾸고 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간 나도 나만의 깊이를 가지게 되겠지.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펼쳐질 내 인생을 가꾸어 줄 것이다. 그 믿음의 저변에 있는 것은 분명 회색빛 철제 책장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어머니와 책을 읽던 시간에 대한 아련함이리라.






이미지 출처: 이미지비트



제가 딸이 쓴 글을 보여줘도 “어떻게 책 읽기가 먼저에요? 일단 대학부터 들어가야 하니 공부가 우선 아니예요?”하며 반문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성적도 배경지식이나 이해력이 없다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지 않을까요? 허술하고 부실하여 결코 실력과 연결될 수 없죠. 


지식에 지혜를 입힐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거기에 사람의 질서나 사람의 도리, 사리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까지 얹는다면 더할 나위 없죠.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함이라는 현실적 이유 외에 책 속에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무궁무진한 가치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책을 사랑하면 그만큼 책은 사람을 만들고 인생을 바꾸죠.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 눈앞에 보이는 성적에만 급급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책 읽기를 통해서 알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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