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5. 30. 15:07ㆍ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읽을 수 있는 건 글만이 아니죠. 드라마나 영화 또한 '읽다'의 사전적 의미처럼 '뜻을 헤아려 아는' 텍스트이니까요. 최근 제가 읽은 책과 드라마, 영화 중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종합편성채널 JTBC의 드라마 '밀회'였습니다. 지난 27일 열린 제50회 백상예술대상에서 TV 부문 연출상과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난 드라마이기도 했죠.
'밀회'를 보는 방법이 한 가지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누군가는 주인공 '혜원'(김희애)과 '선재'(유아인)의 애틋한 사랑에 감정 이입을 했습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이 드라마에서 상류 사회의 위선을 보기도 했고, 소재가 되는 피아노와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재미도 있었을 겁니다. 어떻게 봐도 좋을 겁니다. 좋은 텍스트는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게 하는 깊이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전 영화 담당 기자여서인지는 몰라도, '밀회'가 제가 봤던 몇 편의 영화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더군요. 재미있는 점은 그 영화들이 제 기준에서는 별 다섯 개 만점에 네 개 이상을 줄 수 있는 영화라는 겁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밀회' 또한 이 영화들에 못지 않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 편의 영화와 '밀회'의 특정 장면, 설정, 주제를 연결해 볼까 합니다. '이렇게 읽을 수도 있구나' 정도로 가볍게 읽어 주시면 좋겠네요.
먼저 '장면'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밀회'는 피아노를 소재로 한 드라마입니다. 당연하게도 주인공이 피아노를 치는 장면이 각 회에 최소 한 번 이상 나옵니다. 이 장면들 중 제가 가장 인상깊게 본 피아노 장면은 '혜원'과 '선재'의 합주입니다. 두 사람이 처음 합주하는 곡은 슈베르트의 '네 손을 위한 판타지(Fantasie in F Minor for Piano Four-Hands)'이고, 두 번째 합주곡은 모차르트의 'KV521 알레그로'였습니다.
출처_ jtbc 홈페이지
저는 이 두 번의 합주를 보면서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2013)를 떠올렸습니다. 주인공 '인디아 스토커'(미아 와시코브스카)와 그의 삼촌 '찰리 스토커'(매슈 구드)가 함께 피아노를 치는 장면을 말이죠. 기존의 클래식 곡이 아닌 음악감독 클린트 먼셀이 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하죠. 영화에서 가장 에로틱한 장면입니다. 아마 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느꼈을 겁니다. 두 명의 스토커가 연주가 아닌 일종의 성행위를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박찬욱 감독 또한 그렇게 말했죠.
처음 만난 혜원과 선재는 함께 피아노를 치며 격정에 빠져듭니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들은 환희를 느낍니다. 이쯤되면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에요. 두 사람은 피아노를 통해 섹스를 합니다. 그리고 오르가즘을 느낍니다. 두 번째 연주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일련의 사건 뒤에 재회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피아노 앞에 앉습니다. 다시 한 번 절정의 오르가즘을 느낀 두 사람은 연주를 마친 뒤 숨을 헐떡입니다. 그리고 선재가 혜원에게 말합니다. "한 번 더 해요."
연출을 한 안판석 PD와 극본을 쓴 정성주 작가가 '스토커'를 봤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전 강하게 의심을 합니다. 두 사람이 '스토커'의 피아노 장면을 참고했을 거라고 말이죠. '밀회'와 '스토커'의 피아노 장면을 비교해서 본다면 두 작품 모두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겁니다.
출처_ 네이버 영화 ‘스토커’ 스틸컷
다음은 '설정'입니다. '밀회'는 40대 초반의 혜원이 20대 초반의 선재와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습니다. 연상녀와 연하남의 사랑은 최근 드라마나 영화의 트렌드를 볼 때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이미 2002년에 KBS 2TV의 '고독'이라는 드라마가 15살 차이가 나는 남녀의 사랑을 그리기도 했으니까요.
'밀회'의 사랑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랑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사랑을 통해 연상녀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반성한 뒤 새로운 삶에 첫 발을 내딛는 게 핵심이죠. 자신이 믿는 세계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처음부터 다시 세우는 과정인 겁니다. 저는 '밀회'의 이 설정에서 루카 구아다그니노 감독의 영화 '아이 엠 러브(I Am Love)'를 봤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 출연해 우리나라 관객에게도 익숙한 베우 틸다 스윈튼이 주연한 영화죠.
'아이 엠 러브'의 사랑은 '밀회'보다 더 파격적입니다. '엠마'(틸다 스윈튼)는 아들의 친구인 '요리사 안토니오'(에두아도 가브리엘리니)와 사랑에 빠집니다. 엠마는 부족한 게 없는 여잡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이탈리아 재벌 집안에 시집을 왔어요. 남편에게는 큰 문제가 없고 장성한 아들과 딸이 있습니다.
혜원도 엠마와 같은 상황입니다. 그는 성공한 커리어 우먼입니다. 억대 연봉을 받아요. 좋은 집에서 좋은 차를 타죠. 떼를 쓰는 남편이 있기는 하지만 부부 사이에 큰 문제는 없습니다. 출중한 업무 능력으로 주변 대부분의 사람으로부터 신뢰 받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엠마와 혜원은 엉뚱한 남자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로부터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안토니오의 요리를 맛본 엠마는 혜원이 선재와 피아노를 치면서 그랬듯이 일종의 오르가즘을 느껴요. 엠마는 음식을 입에 넣고 탄식을 내뱉습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소재만 다를 뿐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똑같이 자신의 대궐같은 집을 떠나 남자의 허름한 집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기 때문이겠죠.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서 마음이 텅 빈 인생은 어떤 의미도 없음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두 여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던집니다. 인생의 전부를 바쳐서 의미 없이 쌓아 올렸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죠. 혜원은 부와 명예 모두를 잃습니다. 엠마의 경우는 더 심각해요. 부와 명예뿐만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해 마지 않던 아들 '에도' 또한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죠.
저는 두 번째로 강한 의심을 합니다. 안 PD와 정 작가는 영화 '스토커'와 '아이 엠 러브'를 절묘하게 뒤섞은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스토커'는 피아노 장면 외에는 '밀회'와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는 영화이지만, '아이 엠 러브'는 달라요. '밀회'와 매우 흡사하죠. 물론 표절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전혀 아닙니다. 두 극을 연결 지어 보면 더 재밌을 거라는 거죠..
출처_ 네이버 영화 ‘아이 엠 러브’ 스틸컷(좌) / Jtbc 홈페이지(우)
세 번째는 의미입니다. 주제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밀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기사도 많이 쏟아졌습니다. 대부분의 글은 '밀회'를 '상류층의 위선'을 꼬집는 작품이라고 평했죠. 맞습니다. 그런 요소도 있죠. 하지만 '밀회'가 진짜 말하고 싶어했던 것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지점에 있습니다. 그것은 '왜 상류층의 위선을 꼬집는가'하는 것이죠. 그것은 '삶의 의미'와 관련이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씨네21'에 기고한 영화 '노예 12년'에 대한 좋은 글을 읽다가 '밀회'와 '노예 12년'은 어쩌면 같은 맥락의 극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좀 황당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릅니다. 1841년, 자유인이었던 흑인이 노예로 팔려가 12년 간 노예 생활을 하고 다시 자유인이 된 이야기와 2014년 대한민국 남녀의 사랑이야기 '밀회'를 비교하다니요. 하지만 우리는 혜원의 유명한 대사를 기억합니다. "난 우아한 노비야."
"그러니까 나는 지금 '노예 12년'을,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841년에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연주 여행을 떠났다가 그곳에서 납치돼 남부 뉴올리언스로 팔려가서는 '플랫'이라는 새 이름으로 12년 동안 노예생활을 하다가 다시 자유인이 되는 데 성공한 한 남자 솔로몬 노섭의 이야기라고 요약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 말한 신형철은 이 영화를 다시 이렇게 요약합니다.
"솔로몬에게는 삶의 의미가 너무도 분명하지만 그는 노예이기 때문에 그것을 실현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삶은 계속 팽팽한 의미를 유지할 수 있고 자신의 삶을 통제하는 주인으로 남는 반면, 주인 에드윈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지만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이어서 그 환멸을 노예들에게 분출하느라 통제 불능의 폭력에 몸을 맡기는 것인데 이때의 그는 자신의 맹목적 충동의 노예인 것이다. 요컨대 에드윈과 솔로몬의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이를 통해 스티브 매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존재의 처지가 주인이냐 노예냐 하는 것이 그가 자기 삶에 대해 주인인지 노예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는 것. 노예에게 주인인 자가 삶에 대해 노예일 수 있고, 주인에게 노예인 자가 삶에 대해 주인일 수 있다는 것. 더 나아가 이렇게 뒤집어 말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솔로몬 노섭은 12년 동안 노예로 살아본 뒤에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에드윈 엡스는 그가 한번도 노예가 되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언제나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이다."('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노예들에게', 신형철'씨네21')
혜원은 성공을 위해 재벌 집안의 "노비" 노릇도 마다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게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죠. 그는 그의 말대로 노비, 노예입니다. 성공에 미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까요. 혜원은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어디 혜원뿐입니까.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상류층 사람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들은 돈에, 권력에, 명예에 종속돼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혜원보다 더 심각한 노예라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의 삶이 혜원 없이는 삶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노예에 의지하는 노예인 셈입니다.
출처_ 네이버 영화 노예12년 스틸컷
혜원이 선재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은 우연일지 몰라도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은 그가 '자유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재는 혜원에게 말합니다. "다 버리고 떠나자"고. 하지만 혜원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죠. 하지만 혜원은 알고 있습니다. 그가 선재와 함께 할 때 자유를 느낀다는 것을요. 그래서 그의 집을 찾아가고 그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는 겁니다. 그때만큼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으니까요. 혜원이 친구에게 선재가 "보고싶다"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자유가 그립다'는 말일 겁니다. 그가 허무하게 흐른 40년의 세월 때문에 친구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은 자유를 몰랐던 삶에 대한 후회겠지요.
결국 혜원은 자유를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한 번 자유를 맛본 사람이 그 짜릿함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혜원 주변의 상류층 인사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들은 자유를 알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선재(자유)를 끌어안는 혜원을 보면서, 혜원의 친구이자 상사인 '영우'가 말합니다. "부럽다." 극중 영우는 정략 결혼을 한 남편이 아닌 어린 호스트를 사랑하는 인물입니다.(물론 이 사랑은 서로의 조건을 충족하는 방식으로 이루진다는 의미에서 완전한 자유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자유에 대해 아주 조금은 아는 인물이죠. 혜원은 그렇게 '노예 40년'의 삶을 끝냅니다. 이제 '밀회'에서 '노예 12'을 떠올린 이유가 이해가 될 겁니다.
오늘 말씀 드린 이 세 편의 영화와 함께 '밀회'를 다시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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