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 장면, 그곳에 있던 그 책.

2014. 6. 3. 11:02다독다독, 다시보기/이슈연재

 

이미지 출처_ 영화 <타인의 삶> 캡처

 

한 편의 영화가 기억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사랑하는 그 사람과 함께 본 그 영화,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왔던 그 영화, 내가 존경하는 감독의 그 영화, 가슴 울리는 명대사가 기억에 남는 그 영화, ……. 영화를 보는 순간의 기분과 상황에 따라 각기 다른 감성의 작용이 이루어질 테고, 그에 따라 영화에 대한 기억법은 조금씩 달라지겠죠.

 

이런 건 어떨까요. 영화에 등장한 인상적인 책으로 그 영화를 기억하는 것. 책, 특히 고전(classic)이라 일컬어지는 명작들은 종종 영화의 스토리텔링 요소(또는 부품)로 사용되곤 합니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난해하여 머리에 쥐가 나려는 찰나, 친절하게도 영화 속에는 관객들의 이해를 돕는 책 한 권이 마치 사건의 단서처럼 제시되기도 하죠. 또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암시하거나 남다른 영웅심을 부각하려는 의도로도 책이라는 소품이 쓰입니다.


 

 

황폐해진 미래 지구를 배경으로 한 SF영화 <오블리비언>에서,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 분)가 남몰래 읽던 책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라는 영국 시인의 연작시 『호라티우스(Horatius)』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이미지 출처_ 영화 <오블리비언> 캡처

 

 

잭 하퍼는 인류를 말살하려는 사면체 모양의 외계 기지 ‘테트(Tet, tetrahedron의 약어)’와 맞서는 캐릭터입니다. 혈혈단신은 아니고, 조력자들의 지원을 받죠. 지하 도서관을 본거지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반란 조직이 바로 그들입니다. 테트의 습격으로 지구가 멸망한 뒤, 잔존한 인류는 반란군을 조직하여 지하 도서관에 은신하는데, 이곳에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 찬란한 영광을 누렸던 수많은 고전 서적들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위 시에 나오는 “선조들이 남긴 유산과 신들의 전당을 지키기 위해” “두려운 위험과 맞서는” “용맹한 호라티우스”는 어쩌면 잭 하퍼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네요.

 

이미지 출처_ amazon 

 

원문으로라도 읽어보시고 싶다면 다음 사이트를 참고해보세요.
http://goo.gl/9RHLVH

 

 

 

1999년작이니 어느새 15년이나 된 <매트릭스>에도 기억해야 할 책 한 권이 등장합니다. 이 작품은 불교 경전인 『금강경』과 『화엄경』, 성경, 그리스 신화, 장자, 플라톤, 칸트, 데카르트 등 동서양의 다양한 철학적 개념들이 융합된 사이버 펑크 영화입니다. (감독인 라나 워쇼스키와 앤디 워쇼스키 남매는 대단한 독서광으로 알려졌죠.)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요약하면, 우리가 실재(real)라고 믿어왔던 이 현실이 사실은 ‘매트릭스’라는 가상 세계였고, 진짜 현실은 따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낯설고 도발적이기까지 한 이런 설정은 프랑스의 한 철학자가 정립한 유명한 이론과 맞닿아 있는데요. 영화 초반부에 힌트가 등장합니다.

 

이미지 출처_ 영화 <매트릭스> 캡처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토머스 앤더슨(키아누 리브스 분)은 부업(?)인 해킹으로 용돈 벌이를 합니다. 해킹 자료 저장 디스크를 숨겨놓은 두꺼운 책, 영화에서는 잠깐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분량(약 7~8초 정도)입니다만, 이 책이 바로 <매트릭스>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해설서입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저술한 『시뮬라크라와 시뮬라시옹(Simulacra and Simulation)』이죠. 이 책이 말하는 개념들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 책은 『시뮬라시옹』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도 출간되어 있습니다. 민음사의 ‘현대사상의 모험’ 총서 시리즈 중 한 권인데요. 내용이 워낙 난해하긴 합니다만, 번역 자체는 굉장히 매끄럽습니다. “실재는 이제는 조작적일 뿐이다. 사실 이것은 더는 실재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상 세계도 더 실재를 포괄하지 않기 때문이다.” (16쪽), “감추기는 가졌으면서도 갖지 않은 체하는 것이다. 시뮬라크르하기는 갖지 않은 것을 가진 체하기이다.” (19쪽) 같은 문장들은 상당한 흡인력을 발휘하죠.

 

이미지 출처_ 알라딘 

 

 

 

명작 <지옥의 묵시록>은, <대부> 삼부작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1979년 영화입니다. 2001년에는 49분 분량의 추가 장면과 디지털 복원, 재편집이 입혀진 <지옥의 묵시록 리덕스>가 개봉하기도 했죠. 말론 브란도, 마틴 쉰, 로버트 듀발, 데니스 호퍼 등 기라성 같은 거성들이 출연했습니다. 젊은 시절의 해리슨 포드와, <매트릭스>의 '모피어스' 로렌스 피시번의 풋풋한(지금과는 너무도 다른!) 청년 시절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조셉 콘래드(Joseph Conrad)의 소설 『어둠의 속 (Heart of Darkness)』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인데요.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였지만, 전쟁영화•반전(反戰)영화로서보다는 한 편의 충실한 '신화' 영화로서 그 진가가 빛납니다. 베트남으로 파견된 미군들이 배를 타고 긴 강을 따라가면서 전장의 참상을 말없이 응시하는 장면, 전쟁을 겪으며 광기 어린 정신이상자로 돌변해버린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 분)과 조우하는 대목 등은 단테(Dante Alighieri)의 『신곡 - 지옥편(La divina commedia - Inferno)』을 떠오르게 합니다. 지옥을 순례하던 단테는 제8의 구렁에 갇혀 제 몸을 불태우는 형벌을 받고 있는 오디세우스를 만나게 되죠. 왠지 이 지옥의 오디세우스는 베트남 전장의 커츠 대령과 비슷해 보입니다.

 

이미지 출처_ 영화 <지옥의 묵시록> 캡처

 

신화적 요소로 가득한 <지옥의 묵시록>에는 중요한 책들이 등장합니다. 커츠 대령의 책상에 놓여 있던 두 권의 책인데요. 인류학자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James George Frazer)의 명저 『황금가지(The Golden Bough)』와 신화학자 제시 웨스턴(Jessie L. Weston)의 『제의에서 로망스까지(From Ritual to Romance)』입니다. 특히 『황금가지』는 세계 여러 지역에 걸친 신화, 종교, 주술 등에 대한 방대한 지식 때문에 문학도들의 필독서라고 하죠. 국내에도 몇몇 출판사들을 통해 출간되어 있습니다. 아쉽게도 『제의에서 로망스까지』는 국내 번역본이 아직 없네요.

 

 

 

 

이 영화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제목인 ‘타인의 삶’은, 서독 신문사에 동독 정부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극작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비밀경찰의 시선입니다. 극작가의 아내는 동독의 미녀라 할 만한 매력적인 배우인데, 두 사람이 나누는 사랑과 예술의 대화를 비밀경찰이 도청합니다. 이 과정에서 점차 비밀경찰은 인간성과 예술성에 감화되어가고, 동독 당국 몰래 예술가 부부를 지켜주고자 노력하죠. 

 

이미지 출처_ 영화 <타인의 삶> 캡처

 

비밀경찰은 극작가의 집에 잠입해 책 한 권을 슬쩍 훔쳐와 탐독하기까지 합니다. 그의 내면 변화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과연 어떤 책일까요? 극작가의 서재에 한 권쯤 꽂혀 있을 법한,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의 책입니다. 영화 속에 나온 책은 노란색 표지에 ‘Brecht’라는 글씨만 적혀 있는데요. 아마도 브레히트의 작품 선집인 듯합니다. 비밀경찰이 낭독하는 구절은 「마리 A.에 대한 회상(Remembrances of Marie A.)」라는 시의 한 대목입니다. 함께 음미해볼까요?

 

 

독일의 시인이자 극작가였던 브레히트는 희곡, 시, 산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저서들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있죠. 그중에는 브레히트의 시 마흔일곱 수를 모아놓은 시집도 있으니 한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이미지 출처_ 알라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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