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6. 14: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응답하라 1983, 혁대에 차고 다니던
그 많던 삐삐와 숫자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출처_1995년 10월 31일 한겨레 20면
자그마하던 그 귀여운 놈의 정식 이름은 “무선호출기”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삐삐”라고 불렀죠. 누군가 전화기로 수신 번호를 보내면 “삐삐, 삐삐” 하는 소리로 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용자들은 직관적인 이름을 좋아하여 언제부터인가 모두들 “삐삐”라고 부른 것입니다. 송신은 할 수 없고 수신만 되는 단방향(one way) 통신기기입니다. 사람들은 전화기를 통해 초등생 1학년의 손바닥보다 작은 크기인 삐삐의 LED 액정에 자신의 전화번호와 함께 번호들만 남겨둘 수 있었습니다. 메시지를 수신한 사람은 사용 가능한 전화나 근처 공중전화로 가서 발신자에게 연락하는 방식이었습니다. 1990년대에 삐삐를 받은 사람들이 새겨진 전화번호에 연락하기 위해 삐삐를 들고 공중전화 박스 앞에 길게 줄을 선 광경을 시내 중심가에서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1988년 11월 7일 『매일경제』 16면의 7단 통광고의 광고 카피입니다.
“곳곳에 떨어져 있는 거래처, 수많은 고객. 시시각각 급변하는 비즈니스 환경 속에서 비즈니스맨의 발은 수십 개라도 모자란다. 폭주하는 업무, 산더미처럼 쌓이는 일. 자칫 잘못하면 모두 엉망이 되고 만다. 비즈니스의 생명은 타이밍! 금성 무선호출기 삐삐로 타이밍을 살린다. 비즈니스에 힘찬 속도가 붙는다. 성공을 향해 쾌속 질주한다. – 금성 삐삐”
출처_1988년 11월 7일 『매일경제』 16면
새로운 삐삐 커뮤니케이션 언어의 탄생
수신자 번호와 함께 전달되는 숫자들이 새로운 삐삐 커뮤니케이션 언어가 되었습니다. 언어의 탄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100”은 “백”이란 발음을 “back”라는 말과 매칭시켜서 “돌아와”라는 의미를 뜻했습니다. 외근하는 실무자들이 가장 많이 받은 숫자 메시지는 “8282(빨리빨리)”였을 것입니다. 저는 이 시절 창작과 비평사 제작 담당자였습니다. 하루에 수십 개의 업체들을 방문하거나 연락을 취하여 책을 만들어냈습니다. 유홍준 선생님의 전설적 베스트셀러인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이은성 작가의 『소설 동의보감』이 한창 팔릴 때였으니 얼마나 연락할 일이 많았겠어요. 하지만 핸드폰이 등장하기 전이었으니 늘 현장에서 외근하는 저에게는 하루종일 삐삐가 울려댔습니다. 그 때 그 시절 회사에서 직원들 사이에 자주 사용되던 숫자 언어들을 모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0090(가고 있는 중이다), 0098(조금 늦겠다), 100(돌아와), 112(긴급상황), 1182(일을 빨리 진행하시오), 1414(식사나 함께 합시다, 식사식사), 1200(일이 빵빵, 지금 바빠요), 1254(이리 오소), 1255(내가 있는 곳으로 오시오), 12504(이리 오십사), 230(이상 무), 2255(이리로 와), 2525(아주 좋았다), 2626(이륙이륙, 약속 장소로 간다), 7205(오늘 미팅한다), 7272(호출해라), 7676(착륙 착륙, 장소도착), 820(빨리와), 825(빨리와), 8200(약속 장소 도착), 8255(빨리 와 주세요), 8282(빨리 빨리), 8578(바로 출발합시다), 9090(GOGO, 가자), 911(긴급출동), 981(급한 일)
출처_1995년 5월 8일 『경향신문』 9면
연인들을 설레게 하는 삐삐 언어들
1990년대 젊은 직원들은 회사에서 지급해준 것 이외에 자기 돈으로 하나 더 장만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회사에서 준 것을 “사람을 옭아매는 동아줄”이라고 하면서 “지옥 삐삐”로 부르기도 했죠. 반면에 자신이 사서 애인, 친구, 가족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은 “노는 삐삐”라고 불렀습니다. 세월이 지나고 세대가 변해도 직장인들의 마음과 감정은 왜 그대로인지 웃음을 자아내게 합니다. 경향신문 1996년 10월 22일의 ‘통계로 보는 세상’ 기사에 따르면 ‘직장인들은 삐삐가 직장 생활에서 필요한 물건이며 호출되었을 때 기분 좋은 상대는 애인 56%, 친구 24%, 가족 18% 순으로 나타납니다.
비즈니스를 위해 탄생했다고 하지만 삐삐 언어는 수많은 젊은 연인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새로운 숫자 언어들을 폭발적으로 만들어냅니다. 그 시절 연인들의 오글거리는 문자들을 모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0000(당신은 나의 0순위), 0001(영원토록 변치말자), 0024(영원히 사랑해), 0100(돌아오라, BACK), 0404(영원히 사랑해, 영사영사), 0124(영원히 사랑해요), 0242(연인 사이), 04(영원히 사랑해 ), 1004(당신의 천사로부터), 1052(러브, LOVE), 1010235(열열이 사모한다), 1602(사랑해), 2848(이제 그만 만나요), 3505(사무치게 그립다), 486(사랑해), 4860(우리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5091(오늘 밤 전화하세요), 5112(항상 널 생각하고 있겠다), 521000045(우리 만나요), 5222(우리 연인 되자), 5454(오빠 사랑해), 5543(오오 사랑), 5825(오빠 미워), 5844(오빠를 사랑하는 사람), 5854(오빠 사랑해), 6515(보고 싶다), 6516(보고 싶다, 연락 바란다), 7486(죽도록 사랑해), 95258(굿모닝 오빠, 안녕 오빠), 98258(굿바이 오빠)
삐삐의 전성시대와 몰락
1983년에 시작되어 013(SK텔레콤), 015(서울이동통신, 나래이동통신), 015-77(해피텔레콤)의 번호 체계로 서비스되면서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삐삐 사용자들은 2천만 명 수준에 이릅니다. 1989년에 17만원에서 20만원 하던 삐삐 가격은 1990년대 후반에는 1만원으로까지 떨어지고 초중고생들도 삐삐를 사용하면서 십대 청소년들을 상대도 하는 마케팅 광고가 자주 등장합니다.
핸드폰이 1988년에 처음 출시되면서 400만원이 넘던 핸드폰의 가격이 1990년대 후반에 100만원 이하로 떨어지고 업체들이 다양한 할부 판매를 공격적으로 펼치면서 삐삐 사용자는 급격하게 줄어들게 됩니다. 흥미로운 것은 삐삐 호출을 받으면 전화를 걸기 위해 달려가던 공중전화가 같은 시기에 거리에서 사라져 갔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점점 삐삐는 마니아적 애착을 가진 사람들과 의료 기기의 오작동을 우려하는 병원 관계자들만이 사용하는 기기가 되었습니다. 2015년도 1월 기준으로 삐삐 사용자 수는 3만 1522명이나 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자그마하던 추억의 그 놈, 삐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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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병훈 박사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연구원으로 그리고 협성대학교 광고홍보학과와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 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콘텐츠 산업 생태계와 비즈니스 그리고 창작과 생산 커뮤니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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