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9. 14: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10여년 전만해도 볼 수 있었던 지하철 신문판매원
지금은 사라진, 신문과 관련한 일상적 풍경 하나. 제 기억으론 불과 2000년대 초반까지도 서울 시내 지하철 안에서 판매원으로부터 신문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신문판매원들이 당일 점심이나 오후에 나온 내일 날짜의 스포츠신문이나 일간지(석간 및 초판)를 옆구리에 낀 채 열차 안에서 특유의 어투로 신문 제호를 나지막하게 읊조리고 다닙니다. 그러면 퇴근길에 마땅한 오락거리가 없어 심심하던 승객들이 신문을 사보곤 했죠(당시 한 부 가격은 5백 원이었던 것 같네요). 무가지의 등장으로 유료신문이 외면 받고 스마트폰의 여파로 종이신문이 밀려나면서 판매원은 고사하고 신문 보는 사람조차 이제는 지하철 안에서 구경하기 힘들게 됐지만요.
성실한 고학생 이미지…1980년, 고교생 이하가 신문배달원의 80% 이상
종이신문은 대중매체 가운데 서민의 애환과 삶의 굴곡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매체가 아닐까 합니다. 신문 내용이 아니라 ‘사람 손’에 의해 신문이 전달되는 방식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전후의 급격한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 신문 배달원은 불온한 소년 부랑자나 예비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했습니다만, 불우한 가정환경과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하며 공부하는 ‘고학생’ 이미지가 강했습니다. 언론학자 윤상길 교수가 쓴 <우편배달에서 모바일 뉴스서비스까지: 한국 신문유통의 사회문화사>라는 글을 보면, 1980년만 하더라도 신문배달원 7만 3천여 명 중에 80% 이상이 미성년(고교생 이하)이었고 그 중에서 중학생의 비율(42.6%)이 가장 높았습니다. 놀랍게도 초등생의 비율(18.4%)이 고교생(20.1%)에 못지않았습니다.
신문 젖어 ‘우울’ 수금 안 돼 ‘속상’…주린 배로 배달하다 ‘졸도’
너무 일찍 생활전선에 뛰어든 ‘배달 소년소녀’들의 고생은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합니다. 신문이 비에 젖을까 봐 웃옷을 벗어 신문을 감싼 채 이른 새벽에 배달을 하거나 추위에 손이 터지는 건 약과죠. 수금을 하러가서 욕을 먹거나 냉대를 당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구독료를 받으러 온 신문 배달원에게 욕하지 말자는 고교생 독자의 투고가 있었을 정도니까요. 사정이 이렇다보니 월말 수금이 제대로 안 돼 자기 돈으로 ‘사납금’을 채워 넣는 일까지 있었습니다. 점심을 굶고 석간신문을 돌리다 쓰러진 여중생, 배달 중 심장마비로 죽은 남자 중학생 이야기에선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신문배달을 하는 삼남매의 맏이였던 17세 소녀는 얼마 안 되는 월급으로 홀어머니를 비롯한 다섯 식구가 고구마를 쪄먹고 동생들 학비와 학용품비를 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하는군요. 현재 60~70대 이상 일부 어른들의 소설 같은 청소년 시절 이야기입니다. 1950~60년대 신문배달원 기사를 보면 요새 문제되는 ‘열정 페이’의 20세기 버전을 보는 것 같습니다.
출처_경향신문
인생역전 신화의 주인공 되기도…정주영·김우중도 ‘배달 소년’ 출신
‘로또 당첨’ 확률만큼 아주 드물지만 신문 배달원 중에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사례도 있긴 합니다. 동아일보 1985년 1월 25일자 10면에는 중국음식과 신문배달을 하면서도 서울 법대에 합격한 김성수 군의 ‘미담’이 소개됐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를 여읜 뒤 어머니가 재혼하자 전남 해남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상경, 고학으로 큰 결실을 거뒀다고 기사는 말합니다. 이뿐만이 아니죠. 경향신문 1987년 10월 6일자 7면에는 김우중 대우회장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김 회장은 “경향신문 판매소년 시절이 그립다”고 추억하는군요. 중학교 2학년 때 1.4 후퇴 후 내려갔던 피난지 대구의 시장에서 하루에 100부씩 경향신문을 팔았던 경험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이밖에도 전두환 前대통령, 故정주영 현대 회장, 신격호 롯데 회장 등도 배달 소년 출신입니다. 이들이 신문을 배달했기 때문에 세속적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한 때 신문배달은 곤궁한 사회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청소년들에겐 생활의 쓴 맛을 직접 체험하는 모종의 ‘통과의례’ 같았었나 봅니다.
“학생은 공부만 해야”…1990년대 사라지는 배달 소년소녀들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소녀는 산업 발전이 정점을 향해 달려가던 1990년대 들어 사라집니다. 소득 수준 향상과 높아진 교육열, 입시 경쟁의 심화로 일과 공부를 병행할 수 없게 되면서 학생들이 공부에 전념해야 낙오하지 않는 시대가 열린 겁니다. 윤상길은 정상적인 학생이라면 입시를 위해 공부에만 전념해야 하는 방향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뀐 탓에 학생 신문 배달원은 스스로를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지적합니다. 학생인데도 공부할 시간에 신문을 돌린다는 건 곧 공부를 포기하거나 애초에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으로 비쳤을 겁니다. 성실함과 고진감래의 대명사였던 배달 소년이 부정적인 사회적 대상으로 낙인찍힌 것이죠.
출처_경향신문
주부들은 과외비, 노인들은 용돈 벌기 위해 신문 배달
이즈음부터 학생들의 빈자리는 주부들로 채워지게 됩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신문기사를 검색해보면 30~40대 주부들의 신문배달이 여가를 선용해 건강도 챙기며 수입도 거둘 수 있는 짭짤한 부업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에는 신문배달로 월평균 10~15만원, 1990년대 초반에는 20~25만원 정도를 벌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의 과외비와 생활비 일부를 이걸로 충당했다는군요. 특이한 사례도 있습니다. 동아일보 1997년 4월 1일자 47면엔 청와대 경호실 직원으로 일하며 신문을 돌리는 2쌍의 30~40대 부부 이야기가 나옵니다. 공무원의 박봉을 생각하면 월 60만원은 큰 도움이라고 하니 격세지감입니다. 고학생들이 생계를 꾸리기 위해 시작했던 신문배달이 주부나 직업이 있는 사람들의 부업이 됐으니까요. 최근엔 새벽잠이 없고 아직 근력이 있는 남성 노인들이 용돈을 벌기 위해 신문을 돌린다고 합니다. 2013년 6월 현재, 조선일보의 한 지국에서 일하는 60대 후반의 남성은 100여부를 돌리고 한 달에 22만원을 받는다고 하네요.
출처_경향신문
신문 산업은 하향세…배달원 나이는 급상승
인터넷으로 보는 뉴스가 대세이다 보니 종이신문과 관련된 여러 지표들은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유가 발행부수와 열독률은 오래 전부터 지속적인 하향세입니다. 신문지국이 줄면 배달원의 숫자도 줄 수밖에 없겠죠. 배달원에 대한 처우도 낮아질 겁니다. 이런 하향세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높아지는 게 있다면 배달원의 나이 정도랄까요. 한 때 ‘쌩쌩’했던 10대 신문배달원의 얼굴에도 점차 주름이 늘어갑니다. 이제 자신의 생업이었던 신문지국을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부모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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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건우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서강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과 박사를 수료했으며 현재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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