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의 역설

2015. 4. 15.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비범한 성공을 거둔 완벽주의자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바이올린 연주자 정경화,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 개그맨 이경규, 가수 보아.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다르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하나의 특징이 있습니다. 바로 ‘완벽주의(perfectionism)’입니다. 하나같이 자타가 공인하는 것처럼 적당한 수준에 머무르거나 만족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비범한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들의 탁월한 퍼포먼스를 보면 과녁 정중앙을 맞히는 ‘퍼펙트 골드’가 연상됩니다.


출처_위키피디아


잡스는 깔끔함과 단순함 추구…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일벌레


2011년 10월, 56세에 췌장암으로 사망한 잡스는 여느 CEO가 그렇듯 자신의 상품이 IT산업에서 최고가 되길 바랐습니다. 컴퓨터의 디자인이나 폰트(서체), 아이콘 등의 미학적 아름다움과 완성도에도 상당히 공을 들였죠. 잡스는 깔끔하고 단순한 디자인에 무척이나 집착했습니다. 심지어 컴퓨터 내부 회로에 장착된 메모리칩이 보기 흉하다고 지적할 정도였으니까요(월터 아이작슨, 『스티브 잡스』). 1984년에 입사해 우리나라 최고 기업인 삼성전자의 CEO가 된 신종균 사장은 ‘일벌레’, ‘완벽주의자’로 불린다지요. 5년 전 임원회의에서 자사 스마트폰 디자인을 대학생 졸업 작품 수준이라고 품평했다는 중앙일보 기사가 인상적입니다.



 정경화, 이경규, 보아…클래식, 대중예술 모두 완벽함 요구 


예술계로 넘어가 볼까요? 서울시향 지휘자인 정명훈 씨의 누나이자 2007년부터 줄리아드 음대 교수로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그도 연주 중에 발생한 작은 실수를 용납 못하는 깐깐한 거장입니다. 2005년 손가락 부상을 입고 수년간의 공백기를 거치기 전까지 음악에 관해 완벽주의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13세 때 줄리아드에 입학한 음악 신동도 완벽한 연주를 위해 수십 년간 긴장과 피나는 노력 속에 살았습니다. 1981년 제1회 MBC 개그 콘테스트로 데뷔한 이경규 씨는 35년 경력의 성공한 개그맨이자 방송인이면서 영화감독입니다. 자금 확보가 어렵고 흥행 성패에 대한 부담도 있어서인지 그도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는데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꼼꼼한 완벽주의자라는군요. 15세에 가요계로 입문해 일본 무대의 정상까지 차지했던 15년차 가수 보아 씨도 예외가 아닙니다. 일간스포츠와의 인터뷰에서 대중적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완벽한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군살 없는 완벽한 몸으로 노래도 잘 하고 춤도 완벽하게 춰야 사람들이 좋아하니까요.



완벽주의는 성공의 방정식일까?


위의 사례를 종합해보면 완벽주의는 ‘성공의 방정식’처럼 보입니다. 아니 성공의 충분조건은 아니더라도 필요조건은 되는 것 같습니다. 성공한 사람들 중에 악착같은 완벽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없다는 게 우리의 경험칙이니까요.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체득한 등식은 “고통 없이 얻는 것도 없다(No pain, no gain!)”가 아닐까요? 하지만 성공하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공식은 역설적으로 성공에 대한 하나의 ‘신화’이자 ‘신기루’입니다. 오히려 성공한 사람들은 완벽주의 ‘덕분에’ 성공한 것이 아니라 완벽주의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것입니다. 즉, 우리의 상식과 달리 완벽주의는 성공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방해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제가 그냥 지어낸 말이 아니라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 데이비드 번즈가 그의 베스트셀러 『필링 굿(Feeling Good)』에서 한 말입니다. 



 완벽주의자의 자기 패배적 결말



번즈 박사는 1980년 『심리학 오늘(Psychology Today)』 11월호에 실린 ‘자기 패배를 부르는 완벽주의자들의 시나리오(The perfectionist’s script for self-defeat)’란 글에서 완벽주의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첫째, 완벽주의자는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달성하기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다보니 끊임없이 강박적으로 애를 씁니다. 셋째, 주로 자신이 성취한 것을 통해서 자기 가치를 평가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냐고요? 탁월함을 추구하는 완벽주의가 자기 패배로 이어진다는 게 번즈 박사의 결론입니다. 악담이 아니라 번즈 박사가 당신이 완벽주의자라면 무엇을 하든 (학생이든 운동선수든 영업사원이든 학자든) ‘루저’가 될 거라고 강조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성과가 나의 모든 걸 말해준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역량에 비해 과도한 목표를 세우면 이건 좌절감을 맛보기에 딱 좋게 쓰인 시나리오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차원에서 완벽주의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는 패배의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곤한 완벽주의자의 삶


게다가 완벽주의는 심신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의도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패배감에 젖으면 자기 통제력도 떨어지고 자존감도 낮아집니다. 낮은 자존감이 우울증이나 불안을 유발하기도 하고요. 이런 불안은 떨림이나 식은 땀, 심장 박동 증가, 가슴 통증, 과호흡, 어지러움 등의 신체 증상으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리처드 윈터, 『지친 완벽주의자를 위하여』). 바꿔 말하면, 우리의 생각과 달리 완벽주의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에 엄청난 부담만 안겨줄 뿐 별다른 이득을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완벽주의를 가리켜 ‘만성 스트레스의 레시피’라고 하는 것이겠지요(박진영, 『심리학 일주일』). 위에서 언급한 완벽주의의 신체 증상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스트레스 반응이니까요.



최고가 아니면 도태되는 ‘완벽의 법칙’


이미 언론에 나왔지만 이경규 씨를 비롯해 김장훈, 이병헌, 차태현, 정형돈 씨 등이 방송에서 공황장애를 고백한 바 있지요. 연예계만큼 시청률과 흥행이라는 결과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최고가 아니면 생존이 어려운 곳도 없을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 연예계는 완벽에 대한 스트레스로 가득 찬 우리 사회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합니다. 김병만 씨가 출연한 ‘정글의 법칙’은 재미와 감동이라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완벽의 법칙’은 가혹함뿐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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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김건우 (서강대학교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

서강대학교 철학과와 서강대 대학원에서 신문방송학과 박사를 수료했으며 현재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