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8. 14:00ㆍ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출처_wikipedia
조선인들의 책 구입 열기
“조선 사람들은 책을 좋아하여 사신들이 중국 땅에 올 때 옛 책과 새 책, 패관소설(稗官小說), 그리고 그들 나라에 없는 것들을 시중에 나가 서목을 베끼고 또 책이 비싸다 하여도 아까워하지 않고 구입해 돌아가므로 오히려 그들 나라에 이서(異書)가 많다.”
16세기 중국 명나라의 문인 진계유가 사신으로 들어온 조선인들의 책 구입 열기에 대해 표현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시대에는 책의 출판과 판매가 활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선비들은 중국에 가는 사신을 통해 책 구입을 부탁하여 몇 년을 기다렸다는 사실이 김택룡의 『조성당일기』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성당일기』에는 김택룡이 3년 만에 구한 『성리대전(性理大全)』, 『통감(通鑑)』, 『송감(宋鑑)』등을 장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겉표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표지에 베와 비단을 쓰기도 하며 두꺼운 종이에 치자물을 들여 좀이 슬거나 낡아지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두루마리 형태의 목판 인쇄물, 출처_경향신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704년~751년 사이에 제작되었고, 전란 속에서도 1234년에 금속활자가 개발되었을 정도로 고려시대의 출판 기술은 세계적인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14세기 조선은 불교 중심의 고려 체제를 부정하고 유교를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던 만큼 책의 출판은 국가가 주도하는 구조였고 비용 측면에서도 책을 인쇄하는 작업은 국가가 나서야만 가능한 작업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경전과 책은 서적원에서 제작하여 보급하는 구조로서, 책들은 관판(官版)•서원판•사찰판•사가판(私家版), 방각본으로 구분됩니다. 영리를 목적으로 서점에서 발행한 방각본이 나오기 전의 판본들은 중앙 관서에서 활자를 만들어 필요한 책들을 제작하여 관리, 서원의 유생, 사찰의 중, 문중의 가족 등 제한된 특정 독자만을 대상으로 제공되었기에, 충분한 책의 공급이 불가능했습니다.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서 베껴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널리 쓰인 해결책이 베껴쓰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종 20권에는 책이 없어서 남의 책을 빌려 필사하여 외운다는 소식에 세종이 주자소에서 책을 보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교육과 과거 시험을 중시했던 조선시대였지만 사대부 지식인들에게도 책은 사거나 선물을 받지 않고 책을 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책을 빌려서 베껴쓰는 작업은 저렴한 가격에 책을 얻는 방법일뿐더러 내용을 철저하게 공부하는 중요하고도 고된 방법이었습니다. 서찬규는 『임재일기』에서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서 베껴쓴다”로 표현하여 당시 선비들이 얼마나 책을 소중히 읽고 베껴쓰려고 했는지를 알게 해줍니다. 여러 권의 책을 요약하는 방법과 더불어 책들에 담겨있는 다양한 주제와 논의를 자신의 관점으로 조합하는 방법으로 진화됩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 실학자들이 방대하고 다양한 학문적 내용을 출판할 수 있었던 것은 빌려서 베껴쓰며 이해하고 저술하는 방식을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유배지에서 자녀들을 교육하기 위해 책을 발췌하여 베껴 집필하도록 지도하는 정약용의 편지에서 그 사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난해에 내가 너희들에게 『고려사(高麗史)』에서 긴요한 말들을 뽑으라고 하였는데, 지금 이 일이 너희들에게 있어 시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좋은 책 한 권을 만들 수 있는 체재를 잡아보내니, 너희들은 아무쪼록 이것에 의거하여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뽑아 책을 완성한 뒤에 인편에 보내도록 하여라. 그러면 내가 그 옳고 그름을 감정하겠다. 책이 완성되면 아무쪼록 좋은 종이에 깨끗이 베끼고 내가 쓴 서문을 책머리에 싣고, 항상 책상 위에 두고 너희 형제들이 아침 저녁으로 읽고 익히도록 하여라.”(정약용,『유배지에서 보낸 편지』中에서)
젊어서 구로공단 노동자로 생활하던 작가 신경숙은 어느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창작 학습을 하기 위해 조세희의『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베껴 쓰기를 했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열공”하는 학생들이 자신만의 노트나 파일에 책의 내용들을 요약하는 것은 아직도 도서관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중농주의 실학자로 조선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 출처_wikipedia
17세기 방각본의 출현
조선 초기에 서점을 설치하려는 시도가 몇 번 있었지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업경제가 발달하면서 17세기 중엽부터 출판지 또는 출판자의 이름, 상호(商號) 등을 명시한 방각본들이 등장했습니다. 방각본(坊刻本)이란 말은 상인들에 의해 판각(板刻)되어 서방사(書坊肆)에서 판매된 책들을 뜻합니다. 방각본 출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끝난 17세기 이후 상업적 이윤을 목표로 소설들이 출현하면서 확산됩니다. 18~19세기는 소설의 시대라 할 만큼 많은 소설들이 등장하는 시기였습니다.
당시의 소설들로는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 『예덕선생전』, 『호질(虎叱)』, 『허생(許生) 』, 판소리계 소설인 『춘향전(春香傳) 』, 『심청전(沈淸傳) 』, 『흥부전(興夫傳)』, 『토끼전』등이 있습니다. 조선시대에 소설을 가장 좋아하는 임금이 영조(1694~1776)였다는 사실은 당시 전 사회적으로 소설이 얼마나 인기였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소설들이 대부분 언문(諺文)으로 천대받던 한글로 출판되었으니 영조와 정조 시대에 활성화된 방각본은 한글의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한글을 익힌 민중들이 책을 읽고 그들의 문학적 욕구와 정서가 군담소설이나 애정소설 등에 수용되는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소설은 한글 소설이 자연스럽게 주류를 차지했습니다. 양반들이라고 해서 한문 소설만 읽었던 것도 아니므로, 독자 대중을 겨냥하기 위해서는 한글 소설이라야 적합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홍길동전, 출처_wikimedia
패관문학(稗官文學) 또는 패관소설(稗官小說)
패관(稗官)이란 중국에서 임금이 민간의 풍속이나 정사를 살피기 위하여 거리의 소문을 모아 기록시키던 벼슬 이름입니다. 이 뜻이 확장되어 이야기를 짓는 사람을 패관이라고 부르게 됩니다.이들이 모아 엮은 내용에는 자연스럽게 창의성(創意性)이 가미되고 윤색(潤色)되어 흥미 본위의 산문적인 문학 형태로 자리잡힙니다. 왕실의 이야기에서부터 상인·천민·기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의 삶과 시문에 얽힌 사연, 꿈, 귀신, 풍속, 성(性)에 관한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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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공병훈 박사
연세대학교 경제학과와 서강대 대학원 디지털미디어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서강대 언론문화연구소연구원으로 그리고 협성대학교 광고홍보학과와 상명대학교 역사콘텐츠 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콘텐츠 산업 생태계와 비즈니스 그리고 창작과 생산 커뮤니티이다.
참고 자료
김택룡, 『조성당일기(操省堂日記)』, 1612-02-19~1612-02-22. 「중국 가시는 길에 중국책 좀 사다주십시오!-중국가는 사신에게 부탁한 책이 수년을 지나 전달되다」
서찬규, 『임재일기(臨齋日記)』, 1845-03-26~1859-01-01. 「닭이 울 때까지 베껴쓰고, 추위와 더위에도 베껴쓴다. - 조선 선비들의 독서법」
그림출처 : 위키미디어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4/40/Danwon-Seodang.jpg
http://en.wikipedia.org/wiki/Jeong_Yak-yong#/media/File:Jeong_Yak-yong.jpg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Honggildongjeo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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