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 작업의 의한 중세 유럽의 성서 코덱스 출판

2015. 5. 18. 09:00다독다독, 다시보기/기획연재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 <장미의 이름(The Name of the Rose)>은 1327년 이탈리아 수도원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소설은 당시 교황과 황제간의 권력 다툼, 교황과 프란체스코 수도회 사이의 논쟁, 제국과 교황에 양다리를 걸친 수도회의 입장, 수도원과 중세 도시의 갈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온통 저를 몰입시킨 것은 중세 수도원의 출판 과정이었습니다.  


책의 형태를 띤 최초의 필사본, 코덱스(codex)


인쇄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의 중세 유럽의 책과 출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글이 씌어진 면들을 하나로 묶었다는 점에서 책의 형태를 띤 최초의 필사본인 코덱스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코덱스 이전에는 주로 파피루스 두루마리나 밀랍판(蜜蠟板)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코덱스는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두루마리에 비해 몇 가지 장점이 있었습니다. 두루마리는 원하는 내용을 찾으려고 할 때 일일이 펼치거나 감아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겠지요. 코덱스는 원하는 페이지를 쉽게 펼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코덱스는 페이지의 양면에 글을 쓸 수 있어 단 1권에도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양이나 송아지 가죽이 사용되었습니다. 양피지(羊皮紙)는 양의 가죽을 씻어 늘인 다음 석회로 처리하고 건조하여 표백해서 만들다 보니 코덱스 책은 매우 비싼 가격이었을 것입니다.


중세 가톨릭과 성서 코덱스의 확산


구약성서의 부분인 이사야(Isaiah)서의 사해 두루마리는 가죽으로 된 두루마리입니다. 1947년 양치기 소년들이 사해의 북서쪽 기슭에 있는 키르바트쿰란의 동굴에서 우연히 발견한 필사본 두루마리들을 발견하는데 이 때 발견된 것들을 사해두루마리(Dead Sea Scrolls)라고 부릅니다. 이 필사본들의 발굴은 고고학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으로 꼽힙니다. 이 사본을 복원하여 학자들은 히브리어 성서가 확립된 시기가 AD 70년 이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BC 4세기부터 AD 135년까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었으며, 초기 그리스도교와 유대인의 종교 전통이 어떤 관계를 갖고 있었는지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서 사본들은 파피루스 두루마리였습니다. 기원 후 4세기경까지 그렇게 사용되다가 성서 사본을 만드는 데 벨럼을 사용하게 되어 파피루스를 사용하는 일이 줄어듭니다. 성서의 경우, 두루마리 책 1권으로는 마태오의 복음서 하나 정도를 베낄 수 있었지만, 보통의 코덱스 한 권에는 사대복음서와 사도행전이 모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코덱스 1권에 신약성서와 구약성서 모두를 담은 것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9세기에 만들어진 성서 코덱스.출처_위키피디아


코덱스는 그리스나 로마의 유물로서도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중세 이전에도 사용되던 방법으로 판단됩니다. 유럽의 코덱스와는 별개로 멕시코의 아스텍인들도 1000년경부터 코덱스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텍의 코덱스는 그림이나 상형문자들로 씌어졌는데, 점성술로 미래를 점치거나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또한 세금 징수 같은 행정적인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코덱스 방법이 확산된 것은 가톨릭이 로마의 국교가 된 이후의 중세가 교황청과 그리스도교 중심으로 변화하던 역사적, 문화적 환경과 관련됩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인들은 한권으로 두툼하게 만들어진 성경책을 좋아합니다. 수요자의 니즈(needs)가 생산 방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지요. 


가톨릭이 고대 후기와 중세시대에 책을 만드는 활동이 지속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수세기 동안 경전을 경외시해온 유대교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손상되지 않는 재료에 기록하려던 노력에 따라 파피루스보다 튼튼한 벨럼지나 양피지 코덱스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에디오피아의 필사본 성경 코덱스. 출처_위키미디어

처음에는 양피지로 된 코덱스가 쓰였으나 그후에는 종이로 된 코덱스가 더 널리 쓰였습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코덱스는 4세기경에 만들어진 그리스어 성서 필사본인 『코덱스 시나이티쿠스(Codex Sinaiticus)』입니다. 5세기경에 만들어진 또 다른 그리스어 성서 필사본인 『코덱스 알렉산드리누스'(Codex lexandrinus)』는 현재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코덱스 아우레오스(codex aureus)라는 말이 있는데, 무렉스(murex)라고 하는 자주색 물감으로 물들여진 종이나 양피지에 황금색 글씨로 씌어진 책을 뜻합니다. 코덱스 아우레오스로서 현재 남아 있는 것들은 대체로 8~9세기에 제작되었습니다.


15세기경부터는 종이에 씌어진 원본들도 흔하게 발견됩니다. 성직자나 연구자들이 성서를 인용할 때 여러 경전을 찾아 비교 연구를 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그런 면에서도 많은 양의 책들을 펼쳐서 비교할 수 있는 코덱스가 더 편리했을 것입니다. 가톨릭은 전세계 포교를 목표로 했기 때문에 수많은 성서 코덱스가 계속 제작됐을 것이고 국교화된 로마 제국의 시기이던 수백년 동안 많은 곳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수도원의 성서 코덱스 출판 


5세기 서로마 제국 붕괴와 연이은 야만인들의 약탈로 책 보존은 크게 위협받았습니다. 당시 안전하게 보존할 유일한 장소는 가톨릭 수도원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사회 혼란 속에서도 서적을 제작하고 도서관을 세우는 일을 맡았습니다. 수도원에 설치된 스크립토리움(scriptorium)은 책의 편집과 제작을 통괄하는 스크리토리(scritori)와 필사를 담당하는 코피스티(copisti)로 구성되었습니다. 수도원들은 도서관과 필사실인 스크립토리움에서 끊임없이 서적을 필사하였습니다.


라자로 갤디나노(Lázaro Galdiano) 박물관의 <스크립토리움의 성 제롬>(St Jerome in the scriptorium) 출처_위키미디어


구술을 통해 여러 필경사가 동시에 같은 내용을 복사하던 로마 시대 상업적 출판 행위와는 달리 수도사들은 내용을 1부씩 베껴쓰는 방식이었습니다. 베껴쓰기가 끝나면 교정을 보면서 제목이나 주석 등을 달았고, 그후 채식자(彩飾者)의 손으로 넘어가 그림이나 기타 장식적인 부속물들이 보충되었으며, 마지막 단계로 제본이 이루어졌습니다. 책 특히 성경을 성직자와 귀족들에게 판매하여 수익을 얻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수도사들의 필사 작업은 수도원의 중요한 활동이자 선교 활동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림 출처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Baptism_-_Ethiopian_Biblical_Manuscript_U.Oregon_Museum_Shelf_Mark_10-844_b.jpg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Codex_Petropolitanus_fols._164v-165r.jpg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Eliza_Codex_23_Ethiopian_Biblical_Manuscript_a.jpg

  • http://commons.wikimedia.org/wiki/File:Master_of_Parral_-_St_Jerome_in_the_scriptorium_-_Google_Art_Project.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