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기와 자기 검열에 주눅 든 우리를 돌아보다2

2015. 6. 29.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위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신문과 방송 2015년 4월호>에 실린 'SBS 스페셜' 작가/ 신진주님의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모든 것이 천천히 흘러가는 나라 노르웨이

 

네덜란드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금기라면 노르웨이에 찾을 수 없는 것은 자극이 아닐까 싶습니다. 노르웨이 촬영을 결정했을 때 우리를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엄청난 물가였습니다. 오슬로 시내의 가장 저렴한 호텔조차 제작비로는 엄두도 못 낼 정도였고, 맥도날드에서 한 끼때우는 비용이 1인당 25,000원에 달하며, 현지 통역과 운전에 필요한 인건비는 노동의욕을 상실케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촬영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슬로우 TV’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시킨 배경이 못 견디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침식사가 제공되지 않고 공동욕실을 사용하는 도시 외곽의 배낭여행객용 펜션을 예약하고 라면과 햇반을 챙겨 떠나야 했던 노르웨이 촬영. 하지만, 그곳에서 만난 슬로우 NRK가 광고수입 없이 시청료로만 운영되는 진정한 공영방송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방송이 만약 화면조정 수준의 낮은 시청률을 기록했다면 우리는 그 배경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7시간 기차 생방송은 노르웨이 인구의 30%가 시청했고, 듬해 67(134시간) 동안 이어진 여객선 후티그루트편은 노르웨이 인구의 67%가 시청하는 진기록을 세웠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노르웨이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것일까요? 책임 프로듀서인 토마스 헬룸은 여객선에서 바라본 민가의 소를 10분간 보여준 장면을 슬로우 TV의 백미로 꼽았습니다. 소는 그저 풀을 뜯거나 천천히 걸어갈 뿐 어떤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48%라는 순간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계속해서 화면을 보여주면 시청자들은 화면 내에서 각기 다른 것들을 보게 됩니다. 편집자나 성우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에 대한 내용도 말해주지 않죠. 시청자들이 스스로 재미를 찾아내는 겁니다.담당 PD의 이런 분석을 증명이라도 하듯, 생방송이 중반에 이르자 시청자들이 하나둘 카메라 앞에 모여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카메라에 포착되는 육지에서 손을 흔드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동차와 요트, 수상스키 등 온갖 아이디어를 동원해 여객선을 따라다니기 시작했고 노르웨이 여왕까지 그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여객선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슬로우 TV는 전 국민의 축제가 되어 있었습니다.

 

진정한 쌍방향 방송을 실현한 슬로우 TV는 이후에도 진화를 거듭했습니다. 자작나무를 도끼로 찍어 장작으로 만드는 과정부터 시작된 모닥불편은 그 나무들이 모두 타서 숯이 될때까지 생방송됐고, 시청자들은 모닥불이 타는 TV 앞에 삼삼오오 모여 뜨개질을 즐겼다고 합니다. 이듬해엔 양털을 벗겨 털실을 만들고 그 실로 스웨터를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뜨개질편이 또 한 번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겨울철이면 오전 10시나 되어야 해가 뜨고 오후 3시면 해가 지는 노르웨이에서 모닥불과 뜨개질은 긴 밤을 보내는 가장 노르웨이다운 예능이었던 것입니다. 전통적인 연어 낚시 과정을 주제로 잡은 해에는 방송시간이 너무 짧다는 시청자들의 항의가 잇따랐습니다


탤런트 박재민이 실제 참가했던 노르웨이의 슬로우 TV ‘Minutt for Minutt’는 2박 3일간 899곡의 찬송가 이어부르기를 생방송으로 보여줍니다. 합창단엔 은퇴한 노인과 교도소 수감자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했는데 소외가 없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주는 것이 슬로우 TV의 정신입니다.


우리가 찾아갔던 지난해 11월엔 6번째 슬로우 TV899곡의 찬송가를 이어부르는 60시간 합창 생방송을 앞두고 있었습니다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조금 실망스러운 게 사실이었습니다. 찬송가를 23일 동안 이어부르는 것은 지루하고 길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노르웨이 미디어학자인 이스펜 교수의 설명은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 “슬로우 TV의 첫 번째 소재였던 기차는 노르웨이의 땅을 가로지르고, 여객선 후티그루트는 노르웨이의 해안선을 모두 지납니다. 그리고 이번 합창 생방송에는 노르웨이 전역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참여하죠. 렇게 소외되는 지역이나 사람이 없는 것이 바로 슬로우 TV의 정신입니다.” 정말 그랬습니다899곡의 찬송가를 부를 합창단엔 은퇴한 노인과 어린이, 최북단 소수민족부터 교도소 수감자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한 사람들이 참가한 것입니다. 나는 3년 전 학교폭력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며 세계 최초의 학교폭력방지법을 제정한 나라가 노르웨이라는 것을 신기하게 여겼었는데, 슬로우 TV 덕분에 비로소 그 의문을 풀 수 있었습니다.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는다는 공동체 정신, 그것이 바로 70년대 유전 개발로 갑작스럽게 부자가 된 노르웨이가 별다른 혼란 없이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남을 수 있었던 비결이 아닐까요?

 

리얼리티의 두 얼굴, 레바논과 미국


TV쇼가 그 사회의 거울이라는 공식은 미국과 중동에서도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지상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인 미국에선 아메리칸 아이돌로 시작된 리얼리티 쇼가 프라임타임의 70%를 장악했다고 합니다. 노래와 요리, 살 빼기와 육아, 취업과 데이트 등 리얼리티 쇼의 소재는 다양하지만, 형식은 모두 오디션과 서바이벌뿐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지만 소수의 승자만이 우승 상금을 독차지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모순을 빼닮았습니다. 유럽에서 다양한 인간군상을 지켜보는 사회 실험의 발상으로 시도된 빅브라더익스페디션로빈슨('서바이버'의 유러버전)이 미국에선 유난히 출연자 간의 연합작전과 배신, 경쟁과 속임수에 집중하는 특징을 보였는데, 리얼리티 쇼에 캐스팅되고 오래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뉴욕 한복판에 등장해 성업 중인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였습니다. “리얼리티 쇼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우승자를 통해 아메리칸 드림을 실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탈락자를 선택하는 과정이 쇼의 핵심입니다.” TV에 나오는 출연자를 평가하고 비하함으로써 현실의 불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미국인들의 심리가 리얼리티 쇼의 전성기를 만들었다는 잭 룰 교수의 분석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리얼리티 쇼 열풍에 휩싸인 것은 이슬람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즌10을 자랑하는 레바논의 인기 리얼리티 쇼 ‘스타 아카데미’.


리얼리티 쇼 열풍에 휩싸인 것은 이슬람 세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빅브라더아메리칸 아이돌을 합친 것 같은 중동의 리얼리티 쇼 스타 아카데미가 벌써 시즌10을 맞이했으니, 얼리티만 보자면 우리나라보다도 훨씬 앞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성들이 여전히 히잡으로 얼굴을 가리고 모스크에서 기도를 할 때조차 남녀가 따로 앉아야 할 만큼 보수적인 이슬람 문화권에서 어떻게 남녀가 혼숙을 하는 24시간 관찰 리얼리티가 가능했을까요? 레바논에 위치한 LBC방송국으로 직접 찾아가 보니 현실은 더 놀라웠습니다. ‘스타 아카데미는 유럽 제작사인 엔데몰 중동지사가 미국 기업 코카콜라의 자본으로 제작하는 것이었는데, 합숙소는 온통 코카콜라 상표로 도배되다시피 했고, 오디션 쇼에선 출연자들이 코카콜라를 들고 춤을 추는 등 노골적인 광고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IS의 본거지인 시리아를 공습하겠다는 발표로 반미감정이 치솟고 있는데도 미국식 리얼리티 쇼에 대한 중동 사람들의 열광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주일간 합숙소와 오디션 쇼를 지켜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습니다. 리얼리티 쇼가 선보인 서구식 생활방식과 시청자 투표가 독재와 내전으로 억압됐던 중동 젊은이들의 다양한 욕구를 자극했던 것입니다. 쿠웨이트에선 리얼리티에 참가한 여성 출연자들 덕분에 오랫동안 국회에 계류됐던 여성참정권이 통과되는가 하면, 팔레스타인 난민촌 출신의 모하메드 아사프가 시청자 투표로 우승을 차지하며 중동 청년들의 반미 정서를 대변하는 등 중동에서 리얼리티 쇼는 사회 변화를 주도하는 기폭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었습니다. 국 자본으로 반미정서를 분출하는 것이 중동 리얼리티 쇼가 10년째 건재한 이유였습니다.


일본의 TV쇼에는 일반인 출연이 드물고 연예인 의존도가 높은 대신 소재 선택에 거의 제한이 없습니다. 일본 인기 TV쇼 중 하나인 닛테레 방송의 ‘웃으면 안 되는 24시’.


 

같고도 다른 일본, 그리고 우리

 

마지막 취재지로 일본을 빼놓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들의 TV쇼가 다른 어느 나라보다 우리와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리얼리티 열풍과 함께 TV쇼의 주인공이 일반인으로 옮겨간 서구와 달리 여전히 대부분의 일본 TV쇼가 연예인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특히 그랬습니다세계 최초로 컬러TV를 개발하고 앞선 개항으로 서구 문화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는 일본이었지만, 일반인이 출연하는 리얼리티는 우리나라보다 더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전문가들은 그 이유를 아시아 특유의 집단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집단에서 튀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사생활을 노출해야 하는 리얼리티 쇼 출연을 꺼려한다는 것입니다. “영국 TV에서 일반인이 주인공이 되기까지 50년이 걸렸다는 현지 제작자의 말이 떠올라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연예인 의존도가 높다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우리나라의 TV쇼가 확연히 구분되는 특징도 있었는데, 바로 선정성과 가학성이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닛테레 방송국 TV웃으면 안 되는 24의 오오토모 프로듀서는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했습니다. “연예인은 전문직이기 때문에 TV에서 맞고 때리더라도 용서된다는 것인데, 이는 차력사가 차력을 하고 레슬러가 레슬링을 하는 것과 같이 연예인의 직업정신으로 이해된다는 것입니다. TV쇼 출연자가 연예인에 한정돼 있긴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만큼은 어떤 터부도 없다는 점이 일본 방송 제작자들의 자부심인 듯했습니다.

 

유럽과 미국, 중동과 일본을 돌며 TV쇼를 탐험하는 동안 제 머릿속에 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과연 우리가 얼마나 자유로운가?”하는 의문이었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이 누리는 언론 자유도 노르웨이 사람들이 즐기는 무위의 자유도, 미국과 중동인들에게 가능한 일반인들의 자기표현도, 일본 연예인들에게 허용되는 직업정신도 우리에겐 없습니다. 물론 TV에서 알몸을 보여주거나 사생활을 24시간 노출하고, 서로를 때리고 맞는 것이 무슨 자유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대한민국의 방송인들이 얼마나 많은 금기와 자기 검열 속에 갇혀 있는지, 되는 것보다 안 되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제작 환경속에서 얼마나 많은 창의적 아이디어를 사전 검열해 왔는지 말입니다. 올해 방송사들은 저마다 중국을 신년의 화두로 삼았습니다. 한류에 열광하던 중국은 이제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문화 생산자로 거듭날 모양입니다. 케이팝과 드라마 등 방송이 주도하던 한류는 과연 몇 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요? 쇼에게 세상을 물었더니 어떤 답을 얻었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언론 자유 세계 68위라는 현실을 극복하고 한류의 영광을 이어가는 길은 우리 스스로 설정한 금기를 조금씩 깨 나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