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소통의 장, '투서함'

2015.08.20 14:00다독다독, 다시보기/지식창고



말과 글의 차이


말은 목소리의 색깔, 말하는 사람의 자세 등에 의해 전달하려는 내용이 영향을 받습니다. 보통 말을 하다보면, 감정이 섞이게 되고, 주변의 상황에 따라 앞뒤가 바뀌기도 하며, 반복적으로 말하게 됩니다.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경향이 있어서, 장황하게 되기도 하고, 자칫 말꼬리로 인해 논쟁적으로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얼굴표정, 눈동자, 손짓 등 비언어적 요소에 의해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무엇보다도 얼굴을 마주 보아야 하기 때문에, 말을 통한 정보의 전달은 화자에게는 다소 부담이 됩니다. 특히나 상하관계일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글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은 한번 나오면, 수정이 불가능하지만, 글은 최종 전달되기 전까지는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비언어적 요소가 배제되기 때문에, 핵심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매우 용이합니다. 아울러 사건이나 내용을 배열하는데 말 보다 간결하게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말로 정보를 전달할 경우, 상황적 요소가 내용을 통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관청이나 기관의 비리를 말한다든지, 자기주장을 강하게 말할 경우, 혹시나 불이익이나 처벌을 받지 않을 까하는 불안이 있기도 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말의 이러한 불안을 제거하고,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소위 ‘투서함’이라는 것이 자주 이용되었습니다. 


동양에서의 투서함 기원


동양에서 투서함은 기원전 206년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영천 태수였던 조광한이라는 사람이 ‘항통(缿筩)’을 설치하여 도적을 다스린 데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 후 서기 690년에서 704년까지 재임한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인 측전무후가 ‘동궤’라는 투서함을 이용하여, 귀족 관료 등 자신의 반대세력을 처단하기 위해 이용했습니다. 구리로 만든 이 투서함은 일단 투입한 문서는 다시는 꺼낼 수 없도록 만들어 사회를 감시, 통제하는데 이용하였습니다. 


출처_조선왕조실록


조선시대 투서함 – ‘항통(缿筩)’


조선시대에는 이 투서함을 항통(缿筩)이라 하였는데, 1456년 세조 2년에 이극감이라는 사람이 “항통을 만들어, 넣기는 하되 꺼내지는 못하게 하여 사람이 익명 투고할 수 있게 하고, 거기에는 누가 어느 집에서 물건을 훔쳐서 어느 곳에 숨겨 놓았다는 내용 등을 상세히 적도록 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제로 1497년 연산군 3년에는 이를 사용한 기록이 있습니다.


형조가 연산군에게 말하길


“곽시(郭偲)가 수설 부정(水雪副正)양(讓)의 처인 장씨(張氏)를 해치려고 하여, 그 종과 사통하였다고 모함하여 말하면서, 향리(鄕吏) 김해(金海) 등에게 비밀리 글을 항통(缿筩) 속에 넣게 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었으니, 교수형에 처하여야 합니다. 지금 죄를 면하려고 하여 아들을 시켜 상언(上言)하게 하였으니, 수리하지 마십시오.”  (연산 21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월 28일(경오) 4번째기사)


라 하니, 연산군이 그대로 따랐습니다.


『임관정요』에 나타난 투서함, 항통 


『임관정요』를 지은 순암 안정복(1712-1791)은 수령으로서 중간 관리자와 말단 직원인 이서배가 제대로 일을 하는지를 알기에는 “다른 지역 사람을 시켜 몰래 알아내는 방법보다도 항통법을 쓰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 옛사람들이 사용했던 항통법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항통법으로 민간에서 발생하는 여러 폐단과 관정(官政)의 득실을 자세히 알아보고, 때에 맞게 처리하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다.“(안정복, 『임관정요』)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항통은 혹 작은 병이나 혹 대나무 통 등 얻기 쉬운 재료로 만들어 사용”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항통은 굳게 밀봉하고 겉에 작은 종이가 겨우 들어갈 만한 구멍을 내며, 또한 밖에서 꺼낼 수 없도록 한다. 이렇게 만든 항통을 각 면(面)의 규모를 고려하여 1, 2개 혹은 2, 3개를 보내되 이장(吏長)에게 서로 전하여 마을에 달게 하고, 한 달이 지난 뒤 항통을 거두어 열어본다.”라고 하였습니다. 항통이 너무 빈번하면 그 효과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안정복은 “달마다 항통을 내려 보내면 폐단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부임 초에 2, 3차례 연속해서 보내서 그 지역의 풍토와 민속이 어떤지를 자세히 살피고 그 뒤에 1년에 2, 3차례만 보내는 것이 좋을 것이다.”(안정복, 『임관정요』)라고 하여 항통의 효과를 극대화 하고자 하였습니다. 안정복은 항통에 투서된 내용을 관정(官政), 관리배(官吏輩), 양반(兩班), 도적(盜賊)등 네 가지로 분류하여 처리하였습니다.


목민심서 / 출처_위키피디아


투서함(항통) 사용에 반대한 정약용


하지만, 1821년 다산 정약용은 그의 『목민심서』에서 항통의 사용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보였습니다. 


“항통(缿筩)의 법은 백성들로 하여금 걸음을 무겁게 하고 서로 눈치를 살피게 하는 것이니 결코 행해서는 안 된다. 갈고리로 남의 마음속을 긁는 것 같은 질문은 또한 간휼한 속임수에 가까운 것이니 군자로서 할 짓이 아니다.”(『목민심서』, 「이전육조」, ‘찰물’) 


정약용은 투서함이 일정부분 그 효과가 인정되는 바이나, 그 역효과가 더 크기 때문에 시행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전례를 본다면 투서함을 설치한 결과 아전과 백성들이 서로 고발하게 되고, 호족(豪族: 돈 많은 집안) 사이에 서로 고발하는 일이 생겨 지방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조장하고 또 무서운 원한을 맺어서 대대로 불꽃 튀기는 싸움을 하게하며 풍속을 크게 해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물정을 살핀다는 것이 도리어 큰 폐단을 낳게 되는 것이니 투서함 설치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며 말로써 상대방의 마음속을 떠본다는 것도 일종의 간휼한 수단이라고 볼 수 있으니 군자의 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일제 시대 투서함


‘항통’은 1920년에는 ‘투서함’이란 이름으로 신문지면에 나타났습니다. 1928년 2월 8일 동아일보에는 ‘투서함이 설치 본보장연지국에’라는 자사광고가 게재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출처_1928년 2월 8일 동아일보


“본보 장연지국에서는 오랜 동안 현안 중이든 투고함을 설치하고, 일반사회에 잠재한 사실을 적발하야 자래의 페풍악습을 개혁하는 동시에 사실을 더욱 민속히 보도키 위하야 특히 지방인사의 다수 투고를 환영”


해방직후 투서함


해방 이후 반민특별위원회는 투서함을 요긴하게 활용하였습니다. 1949년 2월 1일자 ‘반민조사투서함 이용’이란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반민특별위원회에서는 반민행위자조사에 박차를 가하고저 29일부터 동 위원회 정문 앞에다 투서함을 설치하였는데, 일반 국민들은 민족정기를 앙양하는 의미에서 반민혐의자가 있으면, 서슴치 말고 투고서함에 투서하여 주기를 바란다하며 투서문 끝에는 반듯이 주소와 씨명을 맑혀야만 효력이 발생한다고 한다.”(동아일보, 1949.2.1.)


현대의 투서함


1980년대에는 한국연예협회에서 회원들이 방송 밤무대 등에 출연하거나 일반사생활 속에서 갖가지 부당한 요구를 해오거나 부조리한 일들이 발견될 때, 투서함에 투서하도록 할 방침을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1990년대 투서함이 대학가에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91년 서강대 총학생회장 선거에서는 손인호 후보가 공약 대신 「여러분의 의견을 수렴합니다」란 제목의 투서함을 만들어 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선거운동기간 중 투서함에 들어온 내용을 정리, 도서관 앞 게시판에 공개하여 당선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1990년대 ‘파스퇴르 유업’에서는 화장실에 투서함을 설치하여, 매월 첫째 월요일에 이를 발표하고, 이에 대한 개선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여(매일경제,1995.9.18.), 기업 경영에 이용한 사례도 볼 수 있습니다.

출처_청와대 국민신민고 홈페이지


디지털 시대 투서함


이러한 투서함은 2천 년대 들어서면서, 사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2천 년대는 본격적으로 모든 것이 디지털 속으로 흡수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투서함 역시 인터넷이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청와대의 ‘국민신문고’, 지방 경찰청의 ‘소통광장’, 검찰청 ‘국민마당’ 등이 투서함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습니다. 


투서함은 사회의 비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기능과 사회 안전을 위한 환경감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때론 정치권력이 자신들의 정적을 숙청하려 이용하기도 하였지만, 궁극적으로는 국민들에 의한 보다 나은 사회 건설을 위한 건강한 소통장으로 이용되어 오고 있습니다. 

 

참고문헌

『조선왕조실록』, 『목민심서』, 『임관정요』, 〈동아일보〉, 〈매일경제〉